[역사산책] 인삼이야기

BoardLang.text_date 2012.11.29 작성자 양정필

인삼이야기


 

양정필(근대사분과 회원)


  인삼은 시간적으로는 수천 년 동안, 공간적으로는 자생지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물론 중국과 일본을 포괄한 동북아시아에서 애용되어 왔기 때문에 인삼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우리가 시장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白蔘=乾蔘의 대중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간단하게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18세기 중엽 이전과 이후 인삼은 동일하게 ‘인삼’으로 불리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대개 18세기 중엽 이전 인삼은 지금의 산삼에 해당하는 것으로 산에서 채취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18세기 중후반이 되면 보호 대책 없이 채취만 일삼았기 때문에 산삼이 한반도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인삼에 대한 수요는 전혀 줄어들지 않은 상황에서 채취량이 급감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대체재를 찾아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산삼의 대체재로 밭에서 재배하는 인삼에 주목하였고, 19세기 들어서면서 인삼 경작이 본격화되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 인삼은 많은 경우 사람이 蔘圃에서 재배한 것을 말한다. 이 글의 소재도 재배한 인삼이다.

19세기 인삼을 대량 재배한 이들은 개성상인이었다. 松商이 인삼 재배법을 처음 개발한 것은 아니다. 인삼 재배법은 일찍이 삼남지방에서 발달하였다. 그럼에도 그 지역에서 대량 재배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자금 부족 때문이다. 인삼 수확까지는 5년 내외의 기간이 소요되는데, 그 기간 동안 계속해서 자금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19세기 조선 현실에서 이 경작 자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집단은 개성상인이 유일하였던 것 같다. 이후 개성상인은 개성 일대를 인삼 주산지로 발전시켰고 인삼 주산지 개성의 명성은 일제 강점기는 물론 지금의 북한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인삼은 명태가 동태로도 황태로도 북어로도 불리듯이 이름이 많다. 인삼밭에서 4년 혹은 6년을 재배한 후 수확한 것을 水蔘이라고 한다. 이 수삼을 다듬어서 햇볕에 건조시킨 것을 白蔘 혹은 乾蔘이라 하고, 수삼을 쪄서 말리면 색깔이 붉은 색을 띠게 되는 데 이를 홍삼이라 한다.

19세기 개성상인이 상품화시킨 것은 인삼밭에서 수확한 수삼이 아니고 그것을 쪄서 말린 홍삼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 사람들이 홍삼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개성상인은 수삼을 수확하고 이를 홍삼으로 제조한 후 중국으로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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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일제하 개성의 인삼밭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홍삼이 핵심 수출품이었으므로 사역원을 통해 일정하게 개입․감독하였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재정 수입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감독이라는 것은 매우 느슨하여서 인삼 재배는 물론 홍삼 제조와 수출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의 관리 감독이 허술하였기 때문에 개성상인은 수삼을 수확하면 거의 대부분 홍삼으로 제조하여 중국으로 수출하였다. 물론 그 홍삼에는 정부가 공식 허가한 것도 있지만, 정부의 허가 없이 몰래 제조한 것도 꽤 많았다. 이처럼 송상은 불법을 무릅쓰면서까지 수삼 대부분을 홍삼으로 제조하여 중국으로 수출하였기 때문에 수삼 가운데 백삼을 만들어져서 국내에서 유통되는 수량은 소량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 후 총독부의 홍삼 정책은 조선시대와는 크게 달라지면서 백삼 대중화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일제는 민간인의 홍삼 제조와 수출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개성상인은 더 이상 홍삼을 제조하거나 수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개성상인이 계속해서 인삼 재배는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개성상인은 삼포에서 6년간 인삼을 재배하여 수삼을 수확하면 일단 총독부 전매국 개성출장소에 모두 납부하였다. 그러면 개성출장소에서는 수삼 가운데 가장 우량한 것들만 선별하여 수납하고 인삼 주인에게는 그 대가로 배상금을 지급하였다. 수납 수삼은 홍삼으로 제조되어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한편 수납 대상에서 탈락한 나머지 인삼은 인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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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백삼 제조장

이런 과정을 거쳐 일제 강점기 개성 삼포주는 수삼을 소유할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와는 달리 그것으로 홍삼을 제조하여 중국으로 수출할 수는 없게 되었다. 새로운 사태에 직면한 개성 사람들은 이 백삼의 활용 방법을 두고 고심하게 된다. 고심 끝에 그들은 수중에 돌아온 수삼을 白蔘=건삼으로 제조하여 판매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개성 사람들이 새삼 백삼에 주목한 것은 이처럼 홍삼으로 제조하여 수출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차선책으로서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상인이 백삼에 주목한 이후 백삼 생산과 수요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백삼의 대중화가 비로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백삼 생산 증가는 삼포 면적 확대의 직접적인 결과물이었다. 蔘圃 면적은 1910년대 들어 급격히 확장되었고, 그에 따라 수삼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런데, 전매국 개성출장소의 수삼 수납 수량은 일정한 규모에서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다. 전매국의 설명에 따르면 홍삼은 대부분 중국 수출용인데, 홍삼 수출량 증가는 중국에서 가격 하락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내에서 가격 유지를 위해 수량을 제한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홍삼용 선별에 떨어져서 개성 삼포주에게 반환되는 수삼 수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개성 사람들은 그 수삼을 대부분 백삼으로 제조하여 판매하였음으로 당연히 1910년대 중후반 이후 백삼 유통량은 크게 증가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백삼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였다는 점이다. 그 결과 1920-30년대 백삼 생산량과 유통량이 급증하지만, 가격은 하락하지 않고 연도에 따라서는 상승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전까지 국내에서 백삼 유통이 활발하였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최대 산지였던 개성 일대의 인삼은 대부분 홍삼으로 제조되어 수출되었기 때문에, 여타 지역에서 재배한 인삼이 백삼으로 유통되었는데 그 수량은 1920년대 이후와 비교하면 소량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2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백삼의 대량 유통 즉 백삼 대중화가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수량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유지하거나 상승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백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개성 사람들의 상술이 수요 증가를 일으킨 측면이 있다. 그들은 근대적인 언론 매체의 광고와 직접 만든 전단지 등을 적극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백삼을 선전하였고 동시에 통신판매라는 새로운 판매 방법도 도입하여 판로가 확대되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국내에 국한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 등 해외까지 판로를 개척하였다. 다른 한편 수요자 층의 확대로 인한 백삼 수요의 증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인삼은 동양에서 언제나 애용되어 왔다. 다만 비싼 가격으로 인해 활용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는데 산삼이나 홍삼 등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저렴한 백삼의 등장은 이 잠재 수요를 크게 자극하였을 것이다. 덧붙여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로 백삼 유통이 조선시대보다 훨씬 편리해진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개성상인은 통신 판매를 적극 활용하였는데, 지방의 자산가들은 통신판매를 통해 인삼 시장에 직접 가서 구입해야 하는 수고로움 없이 집에서 백삼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백삼 대중화에는 다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째든 요즘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백삼=건삼이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애용되어 백삼 대중화가 시작된 시기는 대개 1910년대 후반부터였다고 생각하며 그 배경에는 위와 같은 사연이 있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