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역사 이야기] 해방 후 조만식의 활동과 운명(1)

BoardLang.text_date 2004.06.10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해방 후  조만식의 활동과 운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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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조선 민족주의 운동의 3대 거목으로 불린 조만식은 북한 민족주의 세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서북 지역에는 민족주의세력 가운데서도 기독교도들의 기반이 매우 강했으며 기독교 장로인 조만식은 해방과 함께 자연스럽게 북한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일제 말기 조만식은 식민지권력에 반대한 소극적인 저항의 의미에서 ‘은거’ 생활을 택했는데, 이 ‘무저항적인’ 태도를 두고 친일 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특히, 그가 총독부 기관지 ꡔ每日新報ꡕ 1943년 11월 16일 자에 썼다는 “學徒에게 告한다”는 그가 북한에서 숙청된 후 친일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유일한’ 증거로 인용되었다. 그의 명의로 나간 이 글은 젊은 청년학생들의 ‘성전’ 참여를 독려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가 이 글을 직접 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예를 들면, 나중에 김일성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것이 진짜 조만식이 쓴 글인지 아니면 일제가 조작한 글인지 그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 글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말로 그의 혐의를 사실상 씻어주었다.

해방과 함께 조만식은 평양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하면서 자치기관인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오윤선(吳胤善), 김병연(金炳淵), 이윤영(李允榮), 홍기주(洪基疇) 등 민족주의자들과 일부 친일혐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이 때는 아직 공산주의자들이 지하나 감옥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쉽게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는 공산측과의 관계를 설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막 진주한 소련군 지도부의 조만식에 대한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소련군 지도부는 북한 진주 이전에 이미 그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측의 평가에 따르면, “조만식은 토쿄측의 승낙하에 일본과 조선 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권력이 이양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바람직한 인물’로 기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마치 친일의 대부와 같은 묘사라 할 수 있는데, 이것만으로 보면 도저히 소련군측은 그와 협력관계를 맺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는 예상과 빗나갔다. 소련군 당국은 평남 건준의 대표로 떠오른 그의 존재를 아무런 동요 없이 인정하였던 것이다. 조만식을 배제하기에는 그의 북한 내 비중이 너무 컸다고 할 수 있다.

평남 건준이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었을 때 집행부서 구성에서 좌우 동수의 구도가 유지된 것은 조만식측과 공산측 간 타협의 결과였다. 조만식은 당시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위원장이었던 현준혁과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할 정도로 눈에 띠게 반공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현준혁이 9월 3일 차를 타고 가다 극우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에 의해 암살당할 때도 조만식은 그와 동승해 있었다.

조만식은 소련군 당국과 협력할 의사를 표시하였으나 그가 제시한 조건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소련측으로서는 일말의 불안감마저 느껴야 했다. 그러나 공산측은 그가 지닌 정치적, 대중적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그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공산측이 그를 끌어들이는데 큰 공을 들인 것은 당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연립구도 방침을 실천한다는 차원이기도 했지만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지지 세력 확보를 위해서도 그가 지닌 입지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만식의 입장에서는 북한 사회의 모든 분야를 통제한 소련군 당국을 위시한 공산측과의 협조 없이는 자신의 정치활동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 조만식은 서울에 와서 활동해 달라는 요청을 여운형으로부터 받았지만 “평양의 일이 중대하여 떠날 수는 없다”고 하면서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아마도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 북한을 좌파 일색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심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어느 정도 친미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10월 5일 미군정청은 각계 명망 있는 조선인지도자 11명을 군정장관의 고문관으로 임명하였고, 북쪽 출신으론 유일하게 그가 포함되었지만 그는 이 자리를 거절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남쪽의 민족주의자들과도 서신 등을 통해 연락을 취하였고,  미군정측과도 비밀리에 교류를 가졌다.

반대로 그는 북한에 주둔한 외세, 즉 소련군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았다. 소련군이 ‘해방군’이라는 일부 시각에 반해 그는 내면적으로 ‘점령군’이라는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행동과 태도는 소련군 당국을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1월 3일 그가 독자적인 민주주의계열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한 것은 좌파가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는 북한에서 나름의 우파의 이해관계를 수호하고자 하는 욕구의 소산이었다. 조선민주당은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측의 지원을 받아 창당되었지만 유산계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독자적인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에 조선민주당은 어느 누구로부터 통제받지 않고 자체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일찍부터 조만식과 공산측 사이에는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던 요인들이 싹트고 있었다. 이미 소련군 당국이 그의 ‘고집’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도 적지 않았다. 특히 그가 소련군 진주 직후부터 일부 소련군 병사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한 것은 군당국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아직 토지개혁을 실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악랄한 유산인 소작제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소작료 3:7제 운동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지주에게 ‘가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945년 11월 중순에는 신의주 학생봉기 사건 처리를 놓고 심한 항의를 하는 통에 소련군 지도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노선과 정책을 두고 발생한 민․공 간의 갈등과 공산측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점증하는 반감은 조만식을 따르던 한근조 등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의 일부 간부들이 남행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전부터 그의 추종자들은 이남의 민족주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민주당 지도부는 보이지 않게 김구의 중경임시정부를 추종하였다.

해방 초 조만식과 공산측은 협력의 틀을 만들어 정국을 운영하였지만 갈수록 양자의 입장 차이는 벙어지고 있었다. 자산계층의 이해관계를 일정 부분 대변했던 그에게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개혁 방식에 우호적일리가 없었다. 그러나 공산측은 가능한 한 그의 마음을 붙들어야할 처지에 있었다. 향후 한반도 정치구도에서 좌파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서도 조만식과 같은 ‘바람막이’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대는 곧이어 닥칠 탁치정국에서 파탄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