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8.15 해방일. 36년간 일제 통치의 신음에서 벗어난 경사스러운 날이면서 동시에 민족분단의 전조를 드리운 날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반도 해방이 민족해방 투쟁 세력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 말하자면 우리 민족의 자력에 의해 달성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방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전적으로 미․소가 이끈 연합국 승리의 결과이자 일본의 패배로 인해 실현된 것이었다. 물론 외세에 의한 해방이 우리 민족의 건국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된 바와 같이, 해방 후 전국적으로 등장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등은 우리 민족 스스로에 의한 건국 역량을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해방의 경로는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야만 한다.
일본의 항복
“1945년 8월 소련군은 조선 북부에서 일본군에 맞서 전투행동을 벌였고, 그들의 승리적인 결과는 온 나라의 운명에 분명한 영향을 주었다. 소련군의 신속하고도 가공할 타격에 의해 도처에서 일본의 군, 경찰 기구가 붕괴되고 식민기관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를 통해 자유와 독립을 향한 조선의 도정에서 주요 장애가 제거되고, 가장 중요한 민족적 과업이 실현되었다”(소련과 조선, 모스크바, 1988, 131쪽)
이 인용문은 한반도 해방의 관한 러시아측의 견해를 담은 주장이다. 다소간 과장이 섞여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 일본의 항복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미국의 원자폭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주장일 수도 있다. 그만큼 일본의 패전에 관한 진실이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현실이기도 하다.
일본과의 지루한 전쟁을 끌고 있던 미국은 일찍부터 소련을 참전시켜 일본을 패배시키고자 하였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사할린 남부 및 그 부속도서의 반환, 쿠릴열도의 소련 할양 등과 같은 참전 대가를 보장 받은 다음 대독전쟁이 끝난 3개월 후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같은 해 5월 독일이 항복하고, 이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지자 일본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막아 전쟁 종결에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고 전후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서, 일본측은 소련의 참전을 자체 생존의 갈림길로 보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소련의 중립화를 시도했던 일본 지도부는 여러 차례에 걸친 소련과의 물밑 접촉에서 전쟁 중재자 역할을 해줄 것을 원했지만 소련은 이를 거부하였다. 크레믈린지도부는 대일전쟁에 참여하여 자국의 이권을 확실하게 확보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사실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이 나라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종용하였다. 그것은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신속히 끝낼 방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1945년 7월 원폭실험에 성공하면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처방은 수십만의 무고한 인명 희생을 고려하지 않은 조처였다. 미국은 원폭투하로 자국의 전쟁 희생을 감소시키려 했다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원폭을 맞은 일본지도부는 처음 공황 사태에 빠졌지만 항복 의사를 비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8월 9일 소련군이 참전하자 일본의 항전 의지는 급격히 사그라지기 시작하였다. 14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권고한 8.14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날인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항복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소련의 참전
한반도의 해방 과정에서 소련의 역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대일전의 목적과 대한반도 작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련은 일본군국주의의 분쇄와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을 대일전쟁의 기본 목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소련의 구체적인 이해관계는 1904-1905년 노일전쟁 시기 일본에 빼앗긴 남사할린을 되찾고 태평양으로의 자유로운 출구를 확보하며,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는데 있었다. 또한 해방된 만주와 한국이 새로이 미국 등 다른 열강에 종속되거나 소련에 반대한 침략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신속한’ 참전은 이에 대한 연합국과의 약속을 지키는 한편으로 미국의 원폭투하에 일본이 조기 항복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만일 자국의 참전 없이 일본이 미국에 항복할 경우 소련은 이미 약속 받은 이권을 확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도 보장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전장 4천 km가 넘는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면공격을 개시하였다. A.M. 바실리옙스키 원수가 이끄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의 지휘를 받은 군대들은 자바이칼 전선군, 제1, 2 극동전선군, 태평양함대, 아무르강 적기 소함대로 이루어졌다. 170만명이 넘는 소련군 총병력수는 100만 명에 못미치는 일본 관동군에 비해 압도적인 숫자였다.
소련군의 북한 진격은 일본 해군기지가 소재한 웅기, 나진, 청진에 대한 폭격과 더불어 개시되었다. 10일 오전 제1극동전선군 소속 제25군 부대는 경흥을 점령하였다. 11일에는 태평양 함대 소속 정찰대원 140명이 별다른 작전 없이 웅기항에 상륙하였고, 그 이튿날 육전대 주력이 도착하여 25군 393 보병사단과 공동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12~13일에는 일본군과의 소규모 전투가 벌인 후 나진을 접수하였다. 주목할 것은 13~16일에 걸쳐 벌어진 청진 전투였는데, 이는 한반도 내 대일 전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작전이었다. 제25군 393 보병사단은 일본 나남 보병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16일 하오 육전대와 공동으로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은 일본군이 해로를 통해 본국으로 퇴각할 수 있음을 경계하여 19일에 어대진, 21일에 원산에 해군을 상륙시켰다. 24일에는 제25군 39보병사단 낙하부대가 평양과 강계에 투하되었다. 소련군의 진격과정에서 청진을 제외하고 큰 전투는 없었으나 도처에서 중소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짧은 기간에 벌어진 교전에서 발생한 소련군 희생자 규모를 살펴보면 전투가 비교적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으로의 진격을 담당한 제25군에서는 모두 4,717명의 희생자가 났다. 그중 전사자는 1,446명에 달했고, 실종자와 부상자는 각각 152명, 3,119명에 이르렀다. 소련군의 북한 내 사상자는 지상군과 해군 모두 합쳐 1,963명이었다. 3년간의 걸친 한국전쟁 기간에 겪은 소련군 인명 피해를 능가하는 사상자가 불과 10일만에 발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초기에 북한이 조선 해방에서 소련의 ‘절대적인’ 역할을 주장한 것도 조선 내 대일전투와 소련군이 입은 피해와 무관하지 않았다.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은 수년간 일본에 대적해온 미군의 역할에 비하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일본의 저항 의지를 꺾고 항복을 재촉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녔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항복은 1차적으로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일본군의 전력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원폭을 사용한 미국의 군사적 행동에 기인한 것은 틀림없다. 여기에 소련군의 참전은 일본군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킨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