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해서는 후속조치가 필요하다 박태균(현대사분과) 부시대통령은 지난 아펙 회담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한국전쟁의 종식을 선언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제안을 내 놓았다. 북한이 이미 이전부터 한국전쟁의 종식과 평화협정의 체결을 요구해왔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미국의 이러한 제안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며, 현재의 북핵 위기 국면을 풀어갈 수 있는 결정적인 제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의 종식이 선언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종식을 위해서 여러 가지 절차들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정전협정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협정이 맺어져야 한다. 이미 1950년대를 통해서 무효화되어 버린 정전협정은 더 이상 한반도에서 평화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인 논의가 지속되어야 한다. 주한미군의 문제와 함께 남북한의 군축 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냉전시대에 북한이 다른 나라와 맺었던 협상들도 재고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의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한미군과 남북한의 군축에 대한 논의이다. 정전협정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남한과 북한에서 더 이상 무기 증강을 할 수 없도록 했던 조항이 무효화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남과 북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규모로 군대를 유지하지 않아야만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1939년 8월 맺어진 리벤트로프-몰로토프 조약은 불가침 조약이라는 것이 실질적인 조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때 한갓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시 독일과 소련의 외상이었던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는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스탈린을 대신하여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독일과 소련이 동유럽을 분할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폴란드를 비롯한 많은 동유럽국가들과 핀란드가 히틀러와 스탈린의 팽창주의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사진) 독ㆍ소 불가침조약 협정 그러나 독소불가침 조약은 결과적으로 소련과 독일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먼저 피해를 본 쪽은 소련이었다. 독일은 1942년 불가침 조약을 휴지조각으로 만들면서 소련을 침공했다. 그리고 독일의 소련 침공은 곧 히틀러의 제국이 무너지는데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소련 역시 서부의 산업지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소련에게 이보다 더 큰 손해는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 사이의 ‘불신’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냉전시대 소련이 동유럽국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근본적인 장애가 되었으며, 결국 공산정권의 몰락과 함께 공산권이 해체되는데 하나의 원인을 제공했다. 독소불가침 조약의 역사는 현재의 한반도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정전협정의 당사국이었던 유엔군과 조·중 연합군 측에 의해서 전쟁의 종료가 선언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협정이 맺어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협정만으로는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 평화협정을 보장할 수 있는 물리력의 감축과 함께 이를 지속적으로 보장하고 감시할 수 있는 국제적인 기구의 구성 역시 필요로 한다. 아울러 정전협정을 새로운 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서 새로운 갈등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떠한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합의는 아주 조그마한 갈등에 의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미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작년 9월 19일에 6자회담의 합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미국 사이의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기점이 되었던 것은 별로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지 않았던 미국의 방코 델타 아시아은행에 대한 계좌 동결에서 비롯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오게 된 원초적인 책임은 핵을 협상 무기로 사용한 북한 정권에 있겠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미국의 북한 계좌 동결이었던 것이다. 이미 한국현대사를 통해서 하나의 사건이 커다란 위기로 전화되는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에 앞으로의 협상이 조심스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특히 서로 대립하고 있는 국가 사이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위기 상황을 더 확산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 소위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의 상황을 통해서 위기가 고조되는 것이다. 현재의 북미 간의 갈등은 1994년 북미 간에 맺어졌던 제네바 협정이 무효화되면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제네바 협정이 무효화되는 과정은 북한과 미국이 서로가 먼저 잘못했다고 책임을 떠넘기는 과정에서 위기가 고조된 측면이 있다. 누가 먼저 협정의 조안을 위반했는지는 알 수 없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면서, 더 강한 조치들을 계속 사용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처음에는 제네바 협정을 폐기시킨 미국을 비난하는데 그쳤지만, 그 다음에는 핵을 재처리하겠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했으며, 마지막으로 핵실험을 강행했다. 미국은 경수로 건설과 중유공급을 중단했고, 이제는 북한의 돈줄을 끊었다. 서로가 자신들은 잘못이 없고,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다고 계속 비난하면서 위기의 강도를 강화해 나간 것이다. 1966년부터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있었던 남북 간의 교전 역시 이러한 안보 딜레마의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미 1953년 정전 이후부터 군사분계선에서는 남북 간의 크고 작은 교전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교전은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급증하였다. 여기에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북한에 의한 대남 공세는 1966년부터 대폭 증가되었으며, 북베트남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한반도에서 위기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한국군 전투부대의 추가 파병을 막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기 박정희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 자신감을 보이면서 북한의 공세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발생했다. 유엔군 사령관은 한국이 단지 ‘피해자’일 때에만 미국이 도울 수 있다고 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더 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북한의 공세에 대해 적극적인 보복 공격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은 더욱 더 확대되면서 급기야 1966년 10월에는 미국의 존슨대통령이 한국을 방안하고 있었던 시기 북한의 습격으로 인해 미군 6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후일 이 사건을 조사했던 유엔군 사령부는 이 사건이 남한군의 북한군 타격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결론지었고, 주한미국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은 더 이상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1967년 남북 간의 교전은 1966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한반도는 1968년의 안보위기로 빠져들어 갔다. 6자 회담이 곧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의 회담에서는 한반도에서 영구히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중요한 논의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이 지금까지 되풀이 되어 왔던 안보 딜레마 현상에 의해서 또 다시 더 큰 위기로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기회는 어느 한 순간 절대절명의 위기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고 결코 안심해서는 안된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던 1994년 클린턴 행정부는 한국 정부와의 사전 협의도 없이 북한의 핵시설에 대해 폭격을 계획했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길 위에서는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