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 사형 집행 신중했다 심재우(중세2분과) 형벌과 국가권력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양초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와 공개적으로 사죄를 할 것. 이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긴 후,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하고, 그의 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하였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후 유황 불로 태울 것. 이어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릴 것.”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가운데 하나인 미셸 푸코(1926-1984)의 유명한 저작 『감시와 처벌』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위의 무시무시한 구절은 지금부터 200여년 전에 프랑스에서 국왕 시해 미수범에게 내려진 판결문이다. 판결문에 나오는 잔혹한 장면은 실제로 1757년에 수많은 구경꾼을 앞에 두고 연출되었는데, 비극의 주인공은 병사 출신의 시종 무관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후 체포된 다미엥이란 인물이었다. 푸코는 책에서 다미엥이 사형에 처해지는 장면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엽기적이고 잔인한 것, 혹은 남의 불행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의 책의 해당 부분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사실 형벌은 권력자의 중요한 정치적 행사이자 불경스런 백성에 대한 경고 메세지이다. 권력자는 형벌을 통해 가능한 최대의 통치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에 새롭고도 특이한 형벌이 개발되고 사용되었다. 우리가 전근대사회의 형벌하면 잔혹한 광경이 떠오르는 것은 바로 형벌이 갖는 이 같은 기능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오해가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전통사회 형벌이 서양에 비해 훨씬 잔혹하고, 법이 미개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독일의 경우 중세의 가혹한 형사법을 제거할 목적으로 1532년에 「카롤리나 형사법전」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 법전 속을 들여다 보면 여전히 잔혹한 형벌이 존속하고 있었다. 수레로 찢어 죽이기(車裂)는 기본이고, 솥에 넣어 끓여 죽이기(烹刑), 꼬챙이로 쑤셔 죽이기(串刺刑), 불에 태워 죽이기(火刑), 물속에 넣어 죽이기(溺刑) 등이 버젓이 법전에 실려 있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법전에 함께 등장하는 손목 자르기(斷手刑), 손가락 자르기(斷指刑), 귀 베기(斷耳刑), 코 베기(斷鼻刑), 혀 베기(斷舌刑), 눈 도려내기(抉目刑)는 오히려 가벼운 형벌에 속했다.
독일의 예에서 보듯이 유럽사회가 이처럼 16세기까지 형법이 미개상태에 있었던 것에 비해 중국에서는 7세기에 마련된 당률(唐律)의 우수성이 돋보인다는 것이 일본의 유명한 법사학자 니이다 노부루(仁井田陞)의 지적이다. 당률에서는 중국 고대의 잔혹한 육형(肉刑), 예컨대 도둑질한 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먹으로 죄명을 몸에 새겨 넣는 묵형(墨刑), 음식을 훔친 자에게 음식 냄새를 맡는 코를 베는 의형(劓刑), 도망간 죄인이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강간이나 간통 등의 범죄를 저지른 자가 다시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남성을 잘라내는 궁형(宮刑) 등과 같은 형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형벌이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공권력의 상징이었음은 전통시대 동양과 서양 모두 마찬가지였다. 마치 서양은 우수한 법제도와 인권의식을 갖추고 있었고 동양은 그렇지 못했다는 식의 이해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편협한 인식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근대 동양의 형벌이 서양보다 좀더 인간적이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나 할까? 『심리록』에 나타난 18세기 조선의 죄와 벌 여기서 잠시 조선시대 형벌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조선시대 처벌의 주요 내용은 『대명률』에 규정한 이른바 ‘오형(五刑)’으로 표준화되어 나타난다. 오형이란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 등 다섯 가지 유형의 처벌을 말한다. 먼저 태형과 장형은 비교적 가벼운 죄를 범한 자에게 태와 장이라는 형장으로 볼기를 치는 처벌이다. 좀더 무거운 죄를 범한 자는 도형에 처해졌다. 도형은 장형을 집행한 후 1년에서 3년까지 일정 지역에서 노역에 종사하도록 하는 처벌이다. 유형은 무거운 죄를 지은 중죄인에 대한 처벌로 사형 바로 아래의 형벌이다. ‘귀양’이라는 용어로 잘 알려진 유형은 생활 근거지로부터 격리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생활을 해야 하는 종신형이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법정 최고 형벌은 사형이다. 사형은 집행 방법에 따라 목을 매는 교형(絞刑)과 목을 베는 참형(斬刑) 두 가지로 나뉘며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지금 우리의 관념으로는 어떻게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여길 수 있지만, 당시에는 같은 사형죄수라도 죄가 중한 경우 참형에 처했다. 흔히 알고 있는 ‘능지처참’은 교형, 참형과 다른 특별한 사형 집행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능지처참은 능지처사(凌遲處死)라고도 하는데, 역모를 꾸민 대역죄인, 주인 혹은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 등이 능지처참의 대상이었다. 죄인의 몸을 찢어 죽인다는 점에서 오늘날 참혹한 형벌의 대명사처럼 인식된 이 능지처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조선시대에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것만 가지고 조선의 형법과 형벌의 저급성을 운운하는 것은 위험하다.
조선의 법문화, 특히 18세기 범죄와 형벌의 사회사를 숨김없이 알려주는 자료가 『심리록(審理錄)』이다. 『심리록』은 국왕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던 1775년 12월부터 사망한 1800년 6월까지 직접 심리한 사형범죄자에 대한 사건 내용과 그 처리과정을 요약하여 기록한 일종의 형사판례집이다. 책에는 모두 1,112건의 범죄 기록이 나오는데, 조선 팔도에서 인구수에 견주어 살인 등 강력범죄가 가장 잦은 지역은 서울ㆍ황해도ㆍ경기도 등 수도권이었다. 서울의 범죄는 모두 161건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기록상 18만 9천여 명으로 전체의 2.6%에 그쳤으나 범죄 건수는 14.5%에 달해 다른 지역보다 범죄 비율이 5.7배나 됐다. 서울 인근 지역의 황해도, 경기도도 전국 평균치보다 범죄비율이 높았는데, 이처럼 수도권의 범죄 발생률이 높았다는 사실은 당시 도시화와 유민의 유입 등으로 적지 않은 도시 문제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행정구역상 5부였던 서울 안에서는 신흥 상공업 지대였던 서부(현재의 용산, 마포 일대)에서 가장 많은 69건의 범죄가 발생하였다. 지방 도시별로는 전주(21건)와 평양(20건), 해주(18건), 봉산(17건), 공주(16건), 순천(14건), 충주(13건), 대구ㆍ광주ㆍ재령(12건) 등이 범죄 다발지였다. (도판5) 『흠휼전칙』이라는 책자에 나오는 조선후기의 각종 형구. 목에 씌우는 칼의 무게가 죄의 경중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 흥미롭다. 『심리록』에 실린 범죄 유형은 살인 등 인명 범죄가 1,004건(90.3%)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 경제 범죄(6.7%), 관권 침해 범죄(1.9%), 사회풍속 범죄(1.2%) 순이었다. 특히 공문서 위조, 왕실 및 관용물품 절도 같은 경제 범죄의 경우 서울 지역에서 전체 건수 74건 가운데 절반이 넘는 50건이 일어났다. 이는 조선후기 서울에서 도시화, 상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사회적 갈등ㆍ일탈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주는 통계이다. 한편 인명 범죄 가운데 16.1%를 차지하는 162건이 가족, 친족간의 살인 사건이었다. 혈연으로 맺어진 매우 가까운 사람들 간에도 살인으로 표출된 극단적 갈등이 많았던 셈이다. 가족과 친족 사이에 발생한 살인 사건은 남성이 여성을 살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부부 사이에 발생한 사건도 70건이나 되었다. 부부 사이의 살인은 모두 남편이 처, 첩을 살해한 것으로 여성들이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이는 조선후기 여성의 취약한 사회적 지위, 가족 내의 위상을 보여준다. 『심리록』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국왕 정조가 내린 판결의 내용이다. 정조는 1,112명의 중죄인 가운데 36명(3.2%)에게만 실제 사형 집행을 판결하고, 나머지 상당수는 감형(44%)하거나 석방(30.8%)시켰다. 당시 법률상으로 사형 처벌 조문이 매우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수 대부분의 생명을 보전케 한 정조의 이 같은 조처는 이전 어느 시기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너그러운 판결이었다.
현재의 사형제 폐지 논란을 바라보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시민단체와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사형제 폐지 운동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형은 국가에 의한 계획적인 법적 살인으로서 국가 테러리즘의 한 종류라고까지 말한다. 그들은 범죄인이라 할지라도 생명권을 함부로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점, 사형의 형벌이 기대하는 것만큼 흉악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을 그 이유로 들어 사형 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12월 30일에 사형집행 대기자 23명에 대해 대규모 사형집행을 한 뒤로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에서는 단 한 건의 사형 집행도 하지 않고 있다. 사형제 폐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형 제도는 그대로 두되 집행을 하지 않는 애매한 입장을 정부가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앞으로 2007년 말까지 사형집행을 하지 않을 경우 10년간 사형집행을 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도 국제적으로 사실상의 사형제 페지국으로 분류되게 된다. 조선시대의 죄와 벌을 공부한 필자는 현재의 사형제 폐지 논란에 의견을 개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사형 제도를 비롯한 현재의 형사사법제도 전반의 개혁 방향과 관련해서 조선시대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형수라 할지라도 사형에 처하는 대신 최대한의 관용적 판결을 내리고, 재판에 있어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횡포를 막아내고자 이른바 ‘억강부약(抑强扶弱)’을 실천한 정조의 법제도 개혁과 체제 정비 노력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것이 적지 않다. ※ 이 글은 남명학연구원에서 2005년에 간행한 『선비문화』 7호에 실린 필자의 원고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