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암행어사 이야기 ① - 마패와 유척

BoardLang.text_date 2007.09.26 작성자 심재우

암행어사 이야기 ① - 마패와 유척


심재우(중세사 2분과)


  1. 암행어사란?

  요즘 현대판 암행어사가 유행이다. 군 내무반의 악습을 감찰하기 위해 암행어사 제도를 도입한 부대가 뉴스의 화제가 되는가 하면, 작년 지방선거에서는 부정, 탈법선거 단속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선거판 암행어사인 비공개 선거부정감시단이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상대를 기죽이는 관복 대신 남루한 차림으로 전국을 누비며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는 친근한 인상의 아저씨! 우리의 이미지 속 조선의 암행어사는 부패 관리를 처벌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기 위해 파견된 희망의 메신저로서 각인되어 있다. 여기서는 설화나 소설 속의 암행어사와 잠시 거리를 둔 진짜 역사 속 암행어사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암행어사란 무엇인가? 암행어사를 말하기에 앞서 어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어사란 조선시대에 왕의 특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되던 임시 관리를 말한다. 어사는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선발했으므로 그 직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당하관이란 정3품 이하의 벼슬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같은 정3품이라도 통정대부 이상은 당상관(堂上官), 통훈대부 이하는 당하관으로 분류해 당상관은 중진대접을 했지만 당하관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승정원, 삼사(三司), 예문관 등 임금을 직접 모시는 시종신(侍從臣) 중에서 어사를 선발해 정3품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했다.

  어사는 그 임무에 따라 감진어사, 순무어사, 안핵어사 따위가 있다. 감진어사(監賑御史)는 기근이 들었을 때 해당 지방에 파견되어 기근의 실태를 조사하고 지방관들의 구제 활동을 감독했다. 다른 어사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당하관 중에서 선발했는데, 특별히 당상관이 선발될 경우에는 ‘사(史)’ 대신 ‘사(使)’를 썼다.

  순무어사(巡撫御史)는 지방에서 변란이 일거나 재해가 생겼을 때 해당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사건을 진정했고, 안핵어사(按覈御史)는 지방에서 발생하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어사다.

  그런데 이렇게 왕의 특명을 다 알 수 있는 일반 어사들과 달리 암행어사(暗行御史)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닌다는 암행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그 목적과 행선지, 자신의 정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맡은 일을 수행한 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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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박문수 초상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의 초상이다. 박문수는 조선 영조 때 활약하였으며, 초상화는 현재 박문수 묘소가 위치한 충남 천안의 고령박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에서 시행한 암행어사 제도는 사실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감찰 제도였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 일찍부터 절대 권력자인 황제가 자기의 측근을 어사로 임명해 지방을 살피도록 했지만, 조선의 암행어사처럼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암행 감찰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방방곡곡의 지방 관리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백성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국왕이 비밀리에 암행어사를 파견한 것은 효과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암행어사는 자칫 거리가 멀어서 도저히 미칠 것 같지 않은 산간벽지의 백성들에까지 왕의 성덕을 베풀어주고,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수 있는 자들이었다.
  2. 암행어사로 파견된다는 것은?

  조선 중종 임금부터 조선말기인 고종 임금까지 무려 400여 년간 암행어사 파견이 계속되었는데,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백성들에게 마른 땅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오죽하면 ‘어사우(御史雨)’ 즉 ‘어사 비’라는 말이 생겼을까?

  중국 당나라 때 백성들의 억울한 옥사가 쌓여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이 때 감찰어사 안진경이 옥사의 원한을 풀어주자 비가 내렸다. 어사우는 이 고사에서 시작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 초기 성종 임금은 가뭄이 심하게 들자 조정 대신들을 불러 무슨 일을 해결하지 못했기에 가뭄이 가시지 않는지 묻는다. 이에 좌참찬 성임(成任)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예전에 어사(御史)가 각 지방을 돌며 억울한 옥사(獄事)를 판결하자, 하늘에서 곧 비가 내렸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어사 비’라고 했으니, 곧 억울한 옥사를 심리해 사람들의 바라는 마음을 위로함이 마땅합니다.(『성종실록』 권143, 성종 13년 7월 4일)

  굳이 여러 가지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춘향전』의 이몽룡이 그랬듯이, 당시 부패한 관리를 징계하고 백성들의 원통함을 해결해주던 이들이 암행어사였다.

  그런데 어떤 관리가 암행어사로 파견된다는 것은 한편으로 고난의 길에 들어선 것이기도 했다. 탐관오리들의 혼백을 빼놓는 추상같은 암행어사도 때로 임무 수행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허다했다. 해진 도포와 망가진 갓으로 변변한 여비도 없이 암행 길에 올라 좁디좁은 주막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은 다반사였다.

  때로 암행어사는 임무 수행과정에서도 종종 사단이 생기곤 했다. 중종 34년(1539)에 강원도에 파견된 암행어사 송기수(宋麒壽)는 강릉에서 수령의 비리를 증명할 수 있는 불법문서를 적발하고도 이를 도난당하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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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황협의 암행어사 보고서 『수행기사(繡行紀事)』
1833년(순조 33) 충청우도(忠淸右道)에 파견된 암행어사 황협이 파견된 후 염탐한 내용, 지방관의 비리 등을 기록한 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심한 경우 파견된 암행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조 39년(1763) 실록을 보면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洪亮漢)이 태인현(泰仁縣)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중독(中毒)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홍양한은 출두를 앞두고 여관에서 음식을 먹다가 급사했다는데, 사건 발생 이후 유력한 용의자를 붙잡아 심문했지만 독살로 추정되는 홍 어사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3. 암행어사들이 소지하고 있던 물건은?

  어사들은 마패를 지니고 다녔다. 그럼 암행어사만 마패를 지닐 수 있었는가?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패는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증명서다. 당시 교통은 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말을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른 이동 방법이었기 때문에, 어사뿐 아니라 공무로 지방에 출장가는 관원들도 마패를 발급받아 역마를 이용했다.

  암행어사뿐 아니라 봉명사신(奉命使臣 :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도 공무상 마패를 소지하고 다녔기 때문에 암행어사만이 마패를 지닌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패가 암행어사의 증표이기는 하지만, 암행어사만이 마패를 소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사는 소지한 마패에 조각된 수량만큼 역마를 징발할 수 있었다. 예컨대 말이 세 마리 그려진 3마패의 경우 자신과 수행원이 타는 말과 짐을 싣는 말을 포함하여 모두 3필의 말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가 가지고 다니는 마패는 역마 이용권을 의미할 뿐 아니라 때로 암행어사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어사출도 시에 역졸이 마패를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도’라고 크게 외쳤으며, 암행어사가 출도(出道) 이후 인장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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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마패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마패 이미지이다. 조선시대 당대에 제작된 진품인지, 현대에 와서 만든 모조품인지는 실물을 확인해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 가지 더 유의할 것은 현재 전하는 마패 가운데 모조품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조선 초기에 마패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파손이 심해 세종 때 철로 제조했다가, 『경국대전』을 반포한 무렵부터는 구리로 만들어 사용되었다.

  원형으로 된 마패의 앞면에는 징발 가능한 말의 수를 표시하고, 뒷면은 발행처와 연호(年號), 마패를 제작한 날짜 등을 새겼다. 그리고 상부에 구멍이 난 돌출부를 두어 끈으로 허리에 찰 수 있도록 했다.

  암행어사에 관한 이야기가 유행하면서 조선시대 이후 일제, 해방 직후까지도 마패가 모조품이나 기념품으로 많이 만들어졌으므로 혹 개인이 소장한 마패가 있는 경우 그 진위 여부를 먼저 따져보는 것이 좋다.

  그런데 마패와 함께 암행어사가 유척(鍮尺)을 들고 다녔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를 말하는데, 암행어사에게는 대개 두 개의 유척을 지급했다고 한다. 하나는 죄인을 매질하는 태(笞)나 장(杖) 등의 형구 크기를 법전 규정대로 준수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량형을 통일해서 세금 징수를 고르게 하는데 쓰고자 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형구를 잴 때, 토지 측량할 때, 가정에서 의복을 제조할 때 등 각각의 용도에 쓰이는 자의 규격에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암행어사는 필요한 용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자를 가지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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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유척
조선시대 놋쇠로 만든 자. 파견된 암행어사들은 유척을 지니고 다녔다.


  한편 암행어사는 국왕으로부터 봉서(封書)와 사목(事目)을 받았다. 봉서는 일종의 어사 임명장과 같은 것으로 암행어사의 임명 취지, 감찰 대상 지역의 명칭, 임무에 대한 사항이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사목은 어사의 직무상의 준수 규칙과 염찰 목적 등이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봉서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마패와 유척, 봉서와 사목 등은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지녔던 것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소장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우리들이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활약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