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흠휼전칙』과 조선의 형구

BoardLang.text_date 2010.04.19 작성자 심재우

『흠휼전칙』과 조선의 형구


심재우(중세사2분과)



1. 수갑, 포승 그리고....


얼마전에 교도소에서 교도관들이 소란을 피우는 죄수에게 수갑을 몇 일 동안 착용하게 하여 그 죄수에게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힌 경우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입장이 기사화된 적이 있다. 필자가 아직까지 한 번도 차본 적이 없지만, 수갑에 채워졌을 때의 갑갑함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현재 우리나라 수용시설에서는 수갑 외에도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데, 이처럼 수형자가 도주, 폭행, 소요 또는 자살의 우려가 있을 때 이를 제압하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를 ‘계구(戒具)’라고 한다.

그럼 계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1950년 처음 제정된 행형법(行刑法)에 나오는 계구는 포승(捕繩), 수갑(手匣), 연쇄(連鎖), 방성구(防聲具) 등 모두 네 가지였다. 포승과 수갑은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연쇄와 방성구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발을 묶는 쇠사슬과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는 보호대를 각각 말한다. 1995년 1월 행형법이 개정되면서 연쇄는 ‘사슬’로, 방성구는 ‘안면 보호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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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계구 가운데 하나인 ‘사슬’


  한편, 2008년 12월에는 행형법 명칭이 반 세기 만에 완전히 사라지고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로 전부 개정되었는데, 이 때 계구도 ‘보호장비’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명칭만 바뀐 것이 아니라 보호장비의 종류도 달라졌는데, 인권단체 및 UN의 권고를 수용하여 기존의 사슬을 없애고 수갑, 머리보호장비, 발목보호장비, 보호대, 보호의자, 보호침대, 보호복, 포승 등 여덟 가지로 세분화되었다. 또한 보호장비의 남용을 막기 위해 교도관은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사용하도록 하는 조항도 조문화하였다.


이처럼 계구, 보호장비의 변천사를 살펴볼 때 오늘날 인권 존중 의식이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죄수들의 교도소 내 인권도 신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럼 조선시대는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감옥 내 풍경하면 떠오르는 것이 <춘향전>에 나오는 ‘목에 칼을 찬 춘향’의 모습이다. 그같은 소설 속 모습이 과연 사실을 얼마나 반영한 것일까? 또 목에 씌운 칼 외에 다른 형구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아래에서는 이같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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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안면보호구’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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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계구 장비의 시연 모습 (출처 : 연합뉴스)

 

2. 형구의 크기와 사용 범위를 명시한 책, 『흠휼전칙(欽恤典則)』

지금은 계구, 보호장비라 부르지만 조선시대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사용하던 도구는 옥구(獄具), 혹은 형구(刑具)라 통칭하였다. 이 형구에는 칼과 수갑과 같은 계구(戒具) 외에도 신체형을 집행하는 형장(刑杖)도 포함되었다. 아무튼 조선시대 형구는 지금의 계구처럼 죄수들의 도주 방지용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형구를 착용하게 함으로써 죄수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일종의 고문 도구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형구에 관해서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 아니다. 당연히 그림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한말의 풍속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이나 그 당시의 몇몇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형구의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왜곡이나 오해가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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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1866년 천주교 신자에게 교수형 집행할 때 쓰던 형구돌(서울 마포의 절두산 순교박물관 별관의 형구와 형틀 체험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앞 구멍에 머리를 대고 목에 밧줄을 건 뒤에 뒷구멍에서 잡아당겨 질식시켰다고 한다. 한편 체험관 안에는 조선의 여러 형구를 복원해 놓고 있다).

  그럼 조선의 형구와 관련하여 추가로 살펴볼 문헌은 없을까?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흠휼전칙』이다. 조선시대 형구의 규격, 사용 방법 등을 명확히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살펴볼 자료가 정조 임금이 즉위한 이듬해에 편찬한 『흠휼전칙』이다. 먼저 『흠휼전칙』이 어떤 책인지 부터 알아보자.

『흠휼전칙』은 정조가 즉위한 지 만 2년이 채 안된 1778년 정월에 왕명으로 편찬한 책자로, 한마디로 당시 사용하던 형구의 크기를 명시하고, 형구 남용을 막기 위해 각 형구의 사용 주체, 사용 범위 등을 명확히 제시한 책자이다.

정조는 서울이든 지방이든 할 것 없이 당시 관리들이 법에 정해져 있던 형구의 크기를 무시하여 지역별로 형구를 제각각 사용한다고 판단하였다. 백성들에 대한 교화 못지않게 관리의 형정(刑政)을 중시한 그로써는 이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즉위 직후의 산적한 현안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같은 노력으로 당시 사용되던 형구에 관해 상세히 규정한 조선시대 처음이자 마지막 책자인 『흠휼전칙』이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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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흠휼전칙』(해당 면은 『흠휼전칙』 앞부분에 실린 '형구이정윤음(刑具釐正綸音)'. 형구를 규격에 맞게 사용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다).


  『흠휼전칙』에 등장하는 형구는 태형과 장형을 집행할 때 쓰는 형장인 태(笞)와 장(杖), 그리고 고문할 때 쓰는 신장(訊杖), 군법을 집행하거나 도적에게 사용한 곤장(棍杖), 목에 씌우는 칼인 가(枷), 일종의 수갑인 추(杻), 그리고 목과 다리를 감는 쇠사슬인 철색(鐵索) 등이다. 이 가운데 추(杻)는 사전을 찾으면 ‘뉴’와 ‘축’으로도 읽히는데, 당시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일단은 ‘추’로 읽기로 하고 후일 정확한 고증을 기약하기로 한다.

아무튼 이들 중 오늘날의 계구에 해당하는 것은 가, 추, 철색이며, 태와 장, 신장, 곤장 등의 형장은 앞선 필자의 글에서 각각의 차이점이나 크기 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가, 추, 철색에 주목하고자 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서 조선에서 사용한 형장의 특징을 몇 가지 다시 상기시키고자 한다.

먼저, 형장의 재질이다. 『흠휼전칙』에 곤장의 재료가 버드나무로 나오는데, 『목민심서』와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통해 태와 장은 물푸레나무, 신장은 곤장과 마찬가지로 버드나무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형장으로 몸의 어느 곳을 타격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태와 장은 죄인의 볼기를 치도록 한 반면 신장은 종아리 부분을, 곤장은 볼기와 넓적다리를 번갈아 치는 것이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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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물푸레나무(탄력이 좋고 단단하여 태와 장 등 형구 재료로 쓰였다).


  마지막으로 신장과 곤장은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사용한 독특한 형장이라는 점이다. 물론 명나라의 『대명률』에도 고문할 때 쓰는 형장인 신장이 나오기는 하나 조선과는 차이가 많았다. 명나라의 신장은 태와 장과 같이 회초리 모양이었으나, 조선에서는 손잡이 부분이 둥글고 타격 부분은 넓적하게 만들었다. 타격 방법도 명의 신장은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번갈아 치도록 하였으나, 조선의 경우는 앞서 언급했듯이 종아리 부분을 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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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종로에서 치도곤을 치는 장면(치도곤은 곤장의 하나로 포도청 등에서 도적을 다스릴 때 집행하였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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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8> 한국민속촌의 동헌 앞 풍경

조선에서 쓴 태와 장, 신장, 곤장 등 형장의 크기와 사용처는 각각 달랐으나, 일반 사람들 중에는 이에 대해 명확히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진에 필자의 아들이 들고있는 형구는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다. 참고로 매맞는 아이도 필자의 아들이다.

  한편, 선조 연간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곤장은 명은 물론 조선전기에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우리가 흔히 곤장과 태, 장을 혼동하는데, 곤장은 태와 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고 위력적이었으며 곤장의 종류도 다섯 가지나 되었다. 그리고 규정상 작은 고을 수령의 경우 곤장을 사용할 권한도 없었다.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질 것 같아 일단 태와 장, 신장, 곤장 등 형장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줄이고자 하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앞선 필자의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아무튼 정조의 세심함 덕분에 우리는 『흠휼전칙』의 기록을 통해 당시 사용된 형장, 형구의 원형을 비교적 상세히 추적할 수 있게 된 셈이다.

3.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다양한 형구들

전통시대 우리나라는 중국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형구의 명칭이나 쓰임새도 중국과 유사한 것이 적지 않다. 따라서 조선의 형구를 살피기에 앞서 동 시기 중국에서 사용된 형구들부터 알아보면 중국과 조선 형구의 비교가 가능할 것 같다.

다행히 중국의 경우 관련 문헌 뿐 아니라 그림, 삽화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어 이를 검토하기가 용이하다. 특히 중국 명 시기에 간행된 『삼재도회(三才圖會)』와 원명청 시기의 희곡소설에는 당시 사용된 다양한 형구 관련 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들 서적을 중심으로 각 형구의 쓰임새를 보도록 하자.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가(枷), 장판(長板) 등 목에 씌우는 형구가 있었다. 목에 씌우는 칼인 가(枷)와 장판(長板) 모두 두 개의 나무판으로 되어 있는데, 각 판에는 반월형의 구멍이 있어 두 개를 합하면 원형이 되고 거기에 죄수의 목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림에서 보듯이 가의 경우 두 판의 크기가 같아 방형에 가까운 반면, 장판은 한 판이 다른 판보다 길이가 길었다. 이같은 칼을 목에 찬 죄수들은 도망을 가기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형구 무게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고통을 받았다. 당연히 죄의 등급에 따라 칼의 무게도 달랐는데, 사형수가 쓰는 칼이 제일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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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9> 목에 끼우는 형구인 가(枷), 장판(長板)(‘가’가 방형인 대신, ‘장판’은 한쪽이 다른쪽보다 길다. 『삼재도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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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0> 가(枷)를 차고 있는 죄수(1924년 북경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도설 중국혹형사』 79쪽 수록).

  그런데 목에 씌우는 칼에는 일반적인 가(枷) 외에도 용도에 따라 다른 것들도 있었는데, 연가(連枷), 입가(立枷)가 그것이다. 먼저 연가(連枷)는 여러 죄수를 한꺼번에 채우는 칼이며, 이 가운데 그림에서 보이는 세 명의 목을 동시에 채우는 칼은 특별히 삼련가(三連枷)라고 하였다. 이처럼 하나의 칼로 두, 세 죄인을 묶어둘 수 있으니 옥졸 입장에서는 하나의 도구로 두, 세 명의 죄수를 관리하는 일석이조의 편리한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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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1> 칼 차고도 정신 못차린 도박꾼(삼련가(三連枷)를 차고 있는 세 사람은 도박을 하다 체포되어 칼을 차고 조리돌림당하고 있는 모습니다. 그림을 잘 보면 칼 위에 도박 도구가 보이는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다. 『점석재화보』 1887년 2월 27일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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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2> 삼련가(三連枷)를 차고 있는 여죄수들(1907년 상해에서 촬영한 사진. 『도설 중국혹형사』 79쪽 수록).

  문제는 입가(立枷)인데, 일반적으로 목에 씌우는 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매우 가혹하고 잔인한 형구였다. 입가는 그림에서 보듯이 나무 바구니 모양을 하고 있어 죄수의 머리 부분을 위로 나오도록 한 형구이며, 모양을 본따 ‘참롱(站籠)’이라고도 불렀다. 목을 채우는 부분이 사람 키보다 높아서 입가에 갇히면, 죄수가 열흘을 버티기 힘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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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3> 관아 앞의 입가(立枷) 도구들(대부분의 입가는 비워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죄수가 한명 갇혀있다. 청말 『활지옥(活地獄)』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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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4> 사형 집행 후의 모습(입가(立枷)에 갇혀 고문당하다가 죽은 죄수들이 보이며, 이들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관을 들고 오고 있다. 청말 『노잔유기(老殘游記)』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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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5> 참롱형(站籠刑)에 처해져 죽은 죄수들(중화민국시대의 사진으로 입가, 즉 참롱(站籠) 속의 죄수들. 잘 보면 발바닥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는데, 이 경우 죄수가 하루를 버티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도설 중국혹형사』 90쪽 수록).

대개 입가 속에 죄수를 가둘 경우, 발밑에 두, 세 개의 벽돌을 넣어서 죄수의 목이 조여도 3, 4일은 버틸 수 있도록 하였으나, 뇌물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옥리(獄吏)들이 죄수의 발 밑에 넣은 벽돌을 빼서 하루도 못가 죽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입가는 고문을 위한 도구나 도망을 막는 계구 이상으로 사형집행의 도구로 쓰인 셈이다.

목에 씌우는 형구 다음으로 살펴볼 것이 손에 채우는 형구이다. 이를 추(杻)라고 하는데, 『삼재도회』에 나오는 수뉴(手紐)가 바로 이것이다. 가(枷)가 머리에 가하는 계구라면, 추(杻)는 손에 가하는 계구, 즉 수계(手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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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6> 손에 채우는 형구인 수뉴(手紐)(뒤에 살펴볼 조선의 추(杻)와는 달랐다. 『삼재도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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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7> 『삼국지』의 한 장면(조맹덕(曹孟德)이 길평(吉平)을 고문하는 장면. 누워있는 죄수 바로 위 좌측이 손에 채우는 ‘수뉴(手紐)’이며, 우측은 아래에서 살펴볼 발을 채우는 ‘각료(脚鐐)’이다. 맨 아래는 앞에서 살펴본 목에 씌우는 ‘장판’이다.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 수록(『중국법제사연구-형법』, 도판1))

  추, 수뉴는 그림에서 보듯이 마른 나무로 만들었으며, 양손을 넣을 원형의 두 구멍이 있어 한마디로 네모난 수갑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추, 수뉴는 사형 죄수 중에서도 남자들에게만 썼고, 여자에게는 어떤 경우라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자들의 경우 음식을 먹거나 용변을 보는 것을 남에게 맡길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나마 여자에 대한 배려가 재미있다.

다음, 손에 채우는 형구로 추, 수뉴가 있듯이 발을 채우는 형구도 있었으니 그것을 각료(脚鐐)라고 하였다. 각료는 나무로 된 것도 있지만, 명청 시기에는 규정상 금속으로 만들었다. 그림에 나오는 각료는 철제의 두 고리를 사슬로 이은 것인데, 양발을 묶어서 보행의 자유를 빼앗기 위한 형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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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8> 죄인의 양발을 채우는 형구, 각료(脚鐐)(『흠휼전칙』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재도회』 수록).

이밖에 죄인을 묶는 쇄(鎖)와 철색(鐵索), 죄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갑상(匣床), 죄수 호송용 수레인 수차(囚車)도 계구의 하나이다. 이 중 갑상은 그림에서 보듯이 죄수를 눕힌 채 신체의 자유를 빼앗는 평평한 상자 모양이며 뚜껑이 달렸다. 그런데 갑상은 상상 이상으로 엄중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죄수를 단순히 눕혀놓을 뿐 아니라 못과 사슬 등으로 죄수의 여기저기를 고정시키는 바람에 쥐가 물고 뱀이 휘감아도 꼼짝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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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9> 갑상(匣床)(『삼재도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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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0> 감옥 풍경(목에 칼을 찬 죄수 옆에 갑상(匣床)의 일부가 보인다. 명나라 『고금소설』 수록(『중국법제사연구-형법』, 도판4))

  마지막으로 수차는 함차(檻車)라고도 하는데, 바퀴가 네 개인 상자 모양의 차이다. 죄수를 호송할 때에는 이 수차에 태웠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 죄수의 머리는 상자 밖으로 내놓을 수 있도록 구멍이 파여 있었다. 샤를르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조선에서 공개 처형할 때 십자가를 세운 수레에 죄수를 태워 형장까지 이송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를 통해 모양은 약간 변형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참수형을 집행할 때 수차와 유사한 수레를 이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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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1> 수차(囚車)(『삼재도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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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2> 죄수호송용 수레(남원의 춘향테마파크 감옥 세트 안에 복원한 수레. 어떤 자료에 근거해 고증을 했는지 명확치 않다. 수레 안은 필자의 작은 아들).

4. 조선의 형구 이모저모

앞서 현대의 계구와 중국 전통시대 형구를 소개하였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조선에서 쓰인 것들, 특히 오늘날의 계구에 해당하는 형구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중국의 경우 여러 가지 다양한 형구가 쓰였는데, 조선에서는 『흠휼전칙』 기록을 통해 중국보다 단순한 세 종류의 형구가 쓰였으니 그것이 바로 가(枷), 추(杻), 철색(鐵索) 세 가지이다.

먼저 목에 씌우는 칼인 가(枷)에 대해서 알아보자. 마른 나무로 만든 가의 모양은 중국에서 쓰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조선의 경우 길이는 172cm 정도이고, 목을 넣는 부분의 둘레는 37cm 정도였다. 그런데 가는 무게에 따라 세 종류가 있어서, 사형 죄수가 차는 것의 무게는 약 1.4kg, 도형이나 유형 죄수는 약 1.1kg, 장형 죄수는 약 0.8kg 정도 되었다. 중죄수일수록 그만큼 더 무거운 칼을 채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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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3> 조선에서 사용한 가(枷)(가(枷)는 모두 세 종류이며, 죄의 경중에 따라 착용하는 가(枷)의 무게도 달랐다. 『흠휼전칙』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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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4> 가(枷)를 찬 죄수 모습(한국민속촌의 감옥 세트 안 모습).

  다음, 추(杻)는 손을 채우는 일종의 수갑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그것과 용도는 같다. 그러나 그림에서 보듯이 중국의 수뉴(手紐)와는 모양에 차이가 있으며, 착용 방법도 완전히 달라서 가(枷)에 고정시켜 사용하였다. 즉, 조선에서는 가(枷) 위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그 위에 추(杻)를 채워 못을 박는 방식이었다. 추의 길이는 약 50cm 정도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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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5> 추(杻)(손에 채우는 추(杻)는 중국과 차이가 컸으며, 오른손만 채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흠휼전칙』 수록).

조선의 추는 이처럼 오른손만 채우는 형구이지만, 간혹 두 손을 모두 채워서 문제가 되곤 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난에 가담한 죄수들을 잡아다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는데, 이 때 규정과 다르게 이들의 양 손을 추(杻)에 채웠던 사실이 이듬해 1월 10일 홍치중(洪致中)의 발언으로 밝혀졌다. 보고를 들은 영조는 앞으로는 규정대로 하여 이런 일이 다시 없도록 재차 지시하긴 하였지만, 아무튼 이 사건은 역모 가담자에게 가혹하게 추를 착용한 사례이다.

다음으로 철색(鐵索)은 말 그대로 죄수 포박에 쓰인 쇠사슬을 말한다. 철색은 용도에 따라서 죄인의 목을 감는 쇠사슬인 쇄항철색(鎖項鐵索), 발을 감는 쇠사슬은 쇄족철색(鎖足鐵索)으로 나뉘며, 앞에 것은 길이가 125cm 정도, 뒤의 것은 이보다 조금 더 긴 156cm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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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6> 철색(鐵索)(목을 채우는 쇄항철색, 발을 채우는 쇄족철색이 있었다. 『흠휼전칙』 수록).

이상이 조선에서 사용한 형구의 대강의 모양과 크기이다. 그런데 이들 형구의 착용 대상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즉, 『경국대전』 규정에 따르면 왕실의 가까운 친인척, 공신, 관리, 그리고 부녀자들의 경우는 설사 사형죄를 지었더라도 가(枷)와 추(杻)를 채우지 못하게 하였으며, 대신 몸을 포박하기 위해 쇄항철색, 내지 쇄족철색만을 쓰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가, 추 대신 감옥에서는 주로 철색, 즉 쇠사슬을 사용했으며, 왕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가와 추의 경우는 평천민, 그 중에서도 남자에게만 쓸 수 있었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가(枷)는 장형 이상의 죄를 지은 평천민 남자들에게 사용하고, 추(杻)도 평천민 남자에게만 착용하게 하되 조선전기에는 도형과 유형의 죄를 지은 자들에게도 사용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사형죄를 지은 경우로 범위가 제한되었다.

요컨대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춘향전>에서 남원 감옥에 갇힌 춘향이가 칼, 즉 가(枷)를 차고 있는 모습은 부녀자에는 칼을 씌우지 못하도록 한 당시 규정에는 맞지 않는 어색한 일이라는 점이다. 다만, 여성 죄수에게 불법적으로 가(枷)를 채우는 사례가 당시 종종 있었다는 것을 『수교정례(受敎定例)』의 1747년 영조의 수교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무래도 춘향이가 칼을 찬 장면은 소설에서 변학도가 불법을 저지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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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7> 춘향과 이도령 재회 장면(남원의 춘향테마파크에 재현되어 있다. 춘향의 칼 찬 모습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규정에는 여성의 경우 칼, 즉 가(枷)를 채우지 않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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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8> 한말 죄수 사진(남자 세 명은 목에 칼을 차고 있으나, 여자 한 명은 차지 않고 있다. 여자는 칼을 채우지 않는다는 사용 규정을 잘 준수하고 있는 모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생활과 풍속』(서문당) 수록).

한편, 고종 연간에 편찬한 법전인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중앙의 법집행 관청에서 쓰는 철착고(鐵着庫), 목착고(木着庫), 소쇄약(小鎖鑰) 세 가지 형구가 나오는데, 이는 정조 연간의 『흠휼전칙』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들 형구의 경우 명칭만 나와서 모양이나 정확한 용도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철, 혹은 나무로 만들어 손이나 발을 채우는 용도의 형구로서, 앞서 살펴본 중국의 수뉴(手紐), 각료(脚鐐) 등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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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9> 발목이 채워진 채 고문당하는 죄인(죄인의 발목을 채우는 도구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육전조례』에 나오는 ‘목착고’가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김윤보, 『형정도첩』 수록).

  이상 조선의 형구 규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는데, 대개 가, 추, 철색 등이 사용되다가 고종 연간 즈음해서 철착고, 목착고, 소쇄약 등의 형구도 쓰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형구 관련 삽화나 그림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흠휼전칙』과 관련 자료들을 조합해 볼 때 주요 형구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은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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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0> 복원된 조선의 각종 형구들(한국민속촌의 관아에 전시되어 있다. 언뜻 보아서는 많은 형구들을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복원한 것 같지만,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해서 틀린 부분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필자는 현재 우리 주변에 있는 박물관, 유적지 중에 조선시대의 감옥, 내지 형구를 재현해 놓은 곳에 대해 전체적인 재검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필자가 다녀온 곳 중에서 용인의 한국민속촌, 서울 양화대교 근처 절두산순교박물관, 남원의 춘향테마파크 등에는 비교적 고증을 충실히 한 형구 모형이 전시되어 있긴 하지만, 일부 잘못된 경우도 눈에 띠기 때문이다. TV사극에서 잘못 고증된 장면이 고쳐지지 않고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이들 전시관에 있는 모형 형구의 사소한 잘못이라도 방치할 경우 일반인들의 그와 관련한 오해, 편견은 단시간에 바로잡기 쉽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