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나라 법보다 무서운 마을 법

BoardLang.text_date 2011.06.21 작성자 심재우

나라 법보다 무서운 마을 법


심재우(중세사2분과)


1. 멍석말이, 동네볼기

  얼마전 SBS에서 방영되고 있는 주말드라마 <신기생뎐>에서 과거 조선시대에서나 있었음직한 ‘멍석말이’가 등장하여 화제다.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현대의 기생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에서 엉뚱한 설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던 터에, 기생들 간에 멍석말이까지 버젓이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문제의 장면은 이렇다. 드라마에서 기생집 부용각의 기생들은 개인 휴대폰의 소지나 손님과의 개별적인 데이트가 금지되어 있었는데, 한 기생이 개인 휴대폰을 사용하며 단골손님인 대기업 사장과 데이트를 즐긴 사실이 적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처벌을 받는 과정에서 그녀는 모포에 말린 채 건장한 남자들로부터 몽둥이로 매질을 당하였다. 이는 과거 민간에서 사사로이 가하던 린치, 멍석말이와 다름없으니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53fd1856144a909fa640247c5ab83556_1698397

<그림 1> 신기생뎐  SBS 주말드리마 ‘신기생뎐’의 포스터. 멍석말이 장면이 등장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잘 알려진 것처럼 멍석말이는 조선시대에 민간에서 행해지던 사사로운 체벌인사형(私刑)의 일종이다. 마을에서 불효하거나 못된 짓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권세가나 마을에서 회의를 거쳐 어른들이 보는 앞에서 멍석에 말아 매질을 함으로써버릇을 고쳐주던 풍속을 말한다. 엄연히 국법(國法)이 있으므로 무뢰한을 관청에 신고하여 처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고을에서 종종 이와 같은 처벌권을 행사하였으니 ‘멍석말이’는 일종의 관습법적인 형벌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풍습이 조선시대로 끝난 것은 아니다. 민속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멍석말이와 같은 관습법적 처벌의 전통은 해방 직후까지도 유습이 남아 있었다. 법사학자 전재경 박사의 경상북도 민속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울진, 상주, 안동 등지의 마을에서 멍석말이, 동네볼기해방 직후까지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c8620aeb9302d717da88acaa5cff33e4_1698397
<그림 2> 거적을 덮고 난타하는 장면  김윤보의 『형정도첩』 그림 중의 하나. 민간의 멍석말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울진군 평해읍 거일리 마을에서는 시부모에게 불효한 며느리가 동리의 어르신들 앞에 소환되었으며, 결국 소에 매달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다니는 수모를 겪게 한 뒤 마을 어머니들의 주먹세례를 받고 다시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확답을 하고 나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47년 상주군 모동면 용호리 마을에서도 1947년에 시아버지를 학대한 며느리에 대해 동회에서 ‘동네볼기’로 징벌할 것이 결정되어, 가마니에 몸을 감은 며느리를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회초리로 한 대씩 때렸다.

이와 같은 멍석말이는 동네볼기, 동리 매라는 이름으로 경상북도 다른 지역에서도 해방 직후까지 행해졌다고 하니, 조선시대 마을에서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체벌의 전통이 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21세기를 사는 지금, 드라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적인 린치를 가하는 장면을 설정한 것은 아무래도 좀 심했다 싶다.


2. 나라 법은 어겨도 마을 법은 어길 수 없다

좀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국가 출현 이전의 고대 원시사회에서는 사회적 침해, 범죄가 발생할 경우 그에 대한 반격으로서 피해자의 ‘복수(復讐)’가 용인되었다. 그러다가 국가권력이 출현하면서 사적인 복수를 국가의 공식적 형벌이 대신하였다. 이는 피의 복수가 또 다른 사적인 복수를 낳는 부작용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니, 국가가 사회를 관리하고 형벌을 독점하는 이같은 시스템을 어려운 말로 개념화한다면 공형벌주의(公刑罰主義)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사적인 형벌, 즉 사형(私刑)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는 없었으니, 명나라의 『대명률』에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사적인 처벌이 인정되었다.

먼저, 자신의 조부모나 부모가 피살당하는 현장에서 그 자손이 범인을 살해한 경우에는 자손을 처벌하지 않도록 규정하여 위험에 처한 존속 부모를 위해 자손이 사적인 처벌을 가하는 경우를 인정하였다. 두 번째로, 부모에 욕을 하거나 시부모를 구타하는 등의 패륜행위를 저지는 자손이나 처․첩에 대해 부모나 남편이 처벌하다가 죽게 한 경우도 이들의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였는데, 부모나 남편의 자손, 처에 대한 징계권을 인정한 셈이다. 마지막으로 교령(敎令)을 위반한 노비를 주인이 처벌하다가 우연히 노비가 죽은 경우에도 주인의 죄는 불문에 붙이도록 하여,노비에 대한 주인의 징계권도 인정하고 있다.

f48081bb8c389877c699680ddf19354c_1698397
<그림 3> 불효 자식을 산 채로 묻다  중국 강소성에서 아들과 며느리가 어머니를 학대하자 어머니가 자살하였다. 이를 안 마을 사람들이 관아에 보내는 대신 이들 둘을 산 속으로 데려가 묻어 죽였다. 중국에서도 마을에서 관습적으로 체벌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던 듯 한데,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법의 저촉을 받는 일이다. 1884년 8월 25일자 『점석재화보』 수록

a596c3ee54b4ac01c229ad80680d6d04_1698397
<그림 4> 불효자가 우물에 빠지다  중국 절강성에서 사람들이 술에 취해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버릇을 고쳐주려다 우물에 빠뜨려 사고로 죽게 되는 장면. 1892년 6월 28일자 『점석재화보』 수록

  당시 조선에서 『대명률』을 형법으로 사용한 만큼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일정한 범위에서 사적인 형벌을 인정하고 있었다. 국가 권력이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였지만, 그렇다고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잘못을 범한 노비․자손에 대한 주인․부모의 사적 처벌 같은 것을 완전히 막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법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것 이상으로 관습법적으로 사적인 체형이 행해지곤 했다는 점이다. 앞서 ‘멍석말이’ 이야기를 했지만, 조선시대에 마을의 관습 형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마을민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주기도 했다. ‘국가 법보다 마을 법이 가깝고, 더 무서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을 법, 동리 법으로 주목할 것이 바로 향약(鄕約)이다. 지방민의 교화와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16세기에 처음 시행되기 시작한 향약은 지방사회의 유력자, 즉 사족 양반들의 자치권에 관한 내용이 많이 담겨있었다. 각 지역의 유력 사족들이 향약을 매개로 백성들에 대한 재판권과 형벌권까지 행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8085325bf75bf6f0c04cdb6018562c61_1698397
<그림 5> 여주이씨 옥산파 종가마을의 동안(洞案)  동안은 동계에 참가하는 인원의 명부를 적은 책자이다. 조선시대 향약, 동계는 마을 자치를 실현하는 기구였으나, 때로 마을민에 대한 규제, 체벌 남용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출처 : 『바위틈에 핀 들꽃』(장서각, 명가의 고문서4)

잘 알려진 향약의 4대 덕목 중 하나인 과실상규(過失相規) 조항은 마을민들의 잘잘못을 가려내고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퇴계 이황이 경상도 예안지역에서 시행했던 예안향약의 규정을 보면 부모에게 불손하고, 형제들 간에 서로 싸우는 등의 큰 죄를 저지른 자들은 향약 계원의 자격을 정지시키거나, 모임에서 요즘의 ‘왕따’, ‘집단 따돌림’처럼 상대해주지 않는 처벌을 내리고 있다.

율곡 이이가 시행한 향약은 아예 체벌을 공식화하여 잘못을 저지는 자들을 매로 다스리기도 하였다. 이이가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시행한 서원향약에서는 향약 소속 양반들이 백성들의 소소한 분쟁이나 다툼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마을 법을 어긴 자들에게 태형(笞刑) 40대까지 집행할 수 있었다. 당시 지방관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처벌할 수 있는 형벌권이 이보다 불과 10대 많은 태형 50대인 점에 비추어보면 고을에서 향약의 권한이 막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처럼 행정력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했던 당시 사회에서, 고을의 관습법은 무시할 수 없었던 셈이다. 마을 양반, 사족들이 주도하는 마을 법이 백성들 입장에서 어찌 보면 나라 법보다 무서웠을 지도 모른다.

3.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내쫓고

앞서 향약의 자치법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더 심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지방 사족들이 국법을 무시하고 고을민에 대해 매우 가혹한 관습적 처벌을 가한 경우도 있었으니,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훼가출향(毁家出鄕)’이라는 것이었다.

훼가출향이란 불효, 간통 등 윤리상 용납하기 힘든 못된 짓을 한 자를 관가에 고해서 국법으로 처벌하는 대신, 지방 사족들이 직접 그 죄를 물어 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고을에서 영구히 쫓아내 버리는 풍습이었다. 이같은 사족들의 집단 행동이 조정에서 논란이 된 것은 선조 임금 때의 일이었다.

경상도 진주의 진사(進士) 하종악(河宗岳)이란 인물의 후처 이씨가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진주 유생들이 무력시위를 벌여 마침내 훼가출향, 즉 그녀가 사는 집을 불태워 없애버리고 그녀를 마을에서 몰아내 버린 사건을 말한다. 하종악의 전처는 남명 조식(曺植)의 조카딸이었고 후실인 이씨는 구암 이정(李楨)과 집안이 연결되어 있는 등 이 사건 관련 집안이 당대 그 지역의 대표적 명사들과 혼인관계로 얽혀 있어 더욱 논란이 되었다.

1220ec0296c943a63fefc812c6e7bb43_1698397
<그림 6> 경남 산청군의 산천재(山天齋)  남명 조식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서재. 당시 진주 등 경상우도 지역에서 조식의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렇다. 당시 진주목 서면 수곡리에 살았던 진사 하종악은 처가 죽자 후실로 문제의 함안이씨를 들였다. 그런데 하종악이 죽고 난 뒤, 후실인 이씨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며 행실이 부도덕하였다. 이에 하씨 집안을 비롯한 진주의 유생들이 관에 고하여 그녀의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을의 풍기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무리를 이끌고 그녀의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쫓아내 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하종악 후실 이씨, 또 그녀와 간통한 것으로 지목된 간부(奸夫) 집안 사람들이 옥에 갇혀 문초를 당했을 뿐 아니라, 하항(河沆) 등 훼가출향을 주도한 남명의 문인 일부도 지나친 일을 벌였다고 관에서 옥고를 치렀다. 특히 이 사건으로 인해 조식은 이정과 절교를 선언하는 등 당시 학자들 간에도 그 파장이 적지 않았다.

남녀 간의 문제야 지금도 진실을 알기 힘든 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하종악 후처의 행실이 도대체 어떠했는지 명확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고을에서 향권(鄕權)을 틀어쥔 양반들이 실행한 부녀자에게 훼가출향이라는 무거운 징벌을 가할 만큼 사족 등 마을 유지들의 힘이 컸던 것은 분명하다. 비슷한 시기의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을 보면 진주 인근 고을인 함양에서도 정인홍(鄭仁弘)을 비방한 인물을 이 지역 사족들이 훼가출향을 시키고 있는 것을 볼 때, 훼가출향이 여러 지역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b4d4f4684460439b3df5b5a3d415695a_1698397
<그림 7> ‘훼가출향’ 금지 규정  선조대 사족들의 훼가출향은 결국 관으로부터 무단행위로 지목되어 이후 금지되었다(좌측 맨 왼쪽 줄). 그러나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 관습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출처 : 『대전회통(大典會通)』 권5, 형전 「금제(禁制)」조

  지금 보통 사람들에게도 집은 재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으랴? 훼가출향을 통해 잘못을 저지른 자로 지목된 자가 삶의 유일한 터전인 집을 잃고 공동체에서 영원히 쫓겨난다는 것은 분명 상상하기 힘든 형벌이었을 것이다.

4. 체벌에서 자유롭지 못한 노비들

앞서 조선시대 마을 사족들이 향약 등 자치권을 매개로 마을민에게 관습적 징벌을 가했던 점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노비(奴婢)의 경우는 사정이 더욱 나빴다.잘 알려진 것처럼 노비는 조선시대에 사고 팔리는 존재였던 만큼 마을 법은 제쳐두고 주인가의 가법(家法)을 어기거나 심지어 사소한 잘못으로도 주인의 체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며, 죽이지는 않아서 법의 처벌을 받지는 않더라도 주인이 노비를 잔인하게 다룰 경우 도덕적으로 선비들의 지탄을 받을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죽지 않을 정도의 노비 체벌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심지어 체벌 과정에서 노비가 죽는 경우에도 주인이 받는 처벌은 상당히 가벼웠다.

3463acf7214b25d79826a97712b5fa50_1698397
<그림 8> 벼타작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등장하는 벼타작 장면. 주인은 편안한 자세로 감시하고, 노비들은 타작에 정신이 없다. 출처 : 『단원 김홍도』(국1990) 30쪽립중앙박물관

  즉, 『대명률』 규정에 따른 죄를 지은 노비를 주인이나 주인 친척이 함부로 때려죽인 경우 장형(杖刑) 100대의 형벌에 그쳤으며, 심지어 아무 죄도 없는 노비를 죽이더라도 장일백(杖一百) 도일년(徒一年)이라 하여 요즘으로 치면 매를 맞고 징역 1년 정도 살면 그만이었다.

집안에서 노비에게 체벌을 하더라도 제재하기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 또한 이러하였으니, 노비들은 사소한 잘못으로도 주인들로부터 체벌을 받기 일쑤였다. 따라서 지금 남아있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쓴 생활 일기를 보면 노비 체벌이 흔치 않게, 심지어 노골적으로 등장하곤 한다.

『쇄미록(瑣尾錄)』을 보면 오희문(吳希文) 집안의 노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체벌을 당했다. 예를 들어 밥 지을 때 쥐똥을 골라내지 않았다고 종아리를 얻어 맞았고, 거만하고 상전을 우습게 안다고 빰을 얻어맞기도 하였다. 『묵재일기(黙齋日記)』에서 이문건(李文楗)은 비 삼월(三月)과 윤개(尹介)가 자신이 부르는데 즉시 오지 않았다고, 속히 더운 물을 대령하지 않았다고 각각 매질하였다. 또한 노 야찰(也札)은 밤에 이유 없이 늦게 집에 돌아왔다는 이유로 매로 엉덩이 찜질을 당했다.

cb89aeb9f7991324fad9123041a077c1_1698397
<그림 9> 『쇄미록』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1613)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부터 34년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보물 제1096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물론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주인들도 적지 않았으니, 세종 임금 때의 재상 황희(黃喜)의 경우 노비에게 한 번도 매질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초려 이유태(李惟泰)처럼 현실적으로 체벌이 엉뚱하게 큰 화(禍)를 부를 수도 있다고 해서 함부로 상놈이나 노비에게 매를 들지 말 것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17세기 충청도의 대표적 산림(山林)의 하나로 꼽히는 초려 이유태(李惟泰)는 자손들에게 지켜야할 생활규범을 담은 「정훈(庭訓)」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거기서 그는 주변에 불량한 젊은이들이 많지만 그 집안에서 죄를 다스리도록 참아야지 절대 자신이 직접 손을 대지 말 것을 당부한다. 만에 하나 매 맞은 자가 다른 병으로 죽어버리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이유태는 선친인 이서(李曙)가 겪은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있는데, 하루는 선친께서 길을 가다 말을 타고 가는 마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손으로 성의 없이 인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화가 난 선친의 마부(馬夫)가 버릇을 고쳐주려고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체벌하려고 하던 것을 선친이 만류했는데, 그날 밤 마침 말을 타고 가던 그 자가 갑자기 죽어 버렸다. 당시 선친이 그에게 행여 손이라도 댔으면 그 자의 죽음에 연루되어 어쩔 뻔 했겠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화를 피하기 위해, 혹은 온화한 품성을 지녀서 노비에게 함부로 매를 대지 않는 양반들도 있었던 반면, 체벌의 도가 지나친 주인들도 적지 않았다. 성종 임금 때 세력가였던 유하(柳河)의 아들 중에 유효손(柳孝孫)이란 자가 그 하나였다.

그는 비 효양(孝養)이 자신과의 동침을 거부하고 도망갔다는 이유로 그녀를 붙잡아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졌으며, 심지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발뒤꿈치에 구멍을 뚫어 끈에 꿰어 묶어놓기까지 하였다.

3b0779a655f46abd018e517d591f934d_1698397
<그림 10> 코에 잿물 먹이는 장면  김윤보의 『형정도첩』 그림 중의 하나. 거꾸로 매달아놓고 잿물을 주입하려는 장면이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하다.

이보다 한참 뒤인 1740년(영조 16)에 영조 임금은 형벌 남용을 금지하는 법령인「남형금단사목(濫刑禁斷事目)」을 발표하는데, 그 사목을 보면 못된 주인들이 노비를 잔혹하게 고문하고 체벌하는 사례가 여전히 등장한다. 거기에 보면 도망갔다는 이유로, 또는 도둑질했다는 이유로 노비들에게 주인이 화승(火繩)을 발가락 사이에 끼우고 불사르거나, 거꾸로 매달아놓고 콧구멍에 잿물(灰水)을 붇거나, 다리를 목화의 씨를 뽑아내는 기계인 거핵기(去核機)에 끼워 고문하는 등등의 가혹행위를 했으니 그 징벌 방법도 다양하였다.

조선후기 영조는 양반들이 개인집에서 노비들에게 함부로 사형(私刑)을 가하는 것을 강력히 금지시키고 체벌이나 형벌 남용을 경계하였지만 오랫동안 있어온 관습적 체형을 완전히 없애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구타 금지’라는 표어가 지금도 군대에서 잘 안 지켜지는 것처럼 조선시대 관습법적 처벌, 사적인 린치는 꽤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