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왕권이냐, 신권이냐? - 1398년 1차 왕자의 난 -

BoardLang.text_date 2006.11.29 작성자 신병주

왕권이냐, 신권이냐? - 1398년 1차 왕자의 난 -


신병주(중세2분과)


 1398년 8월 조선왕조 건국의 최고 주역 정도전이 피습되었다. 가해자는 바로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후의 태종)이었다. 조선건국의 최고 주역이면서도 이성계의 신임에 따라 엇갈린 위치에 있었던 두 사람.


 둘의 악연은 선제공격을 취한 이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역사적으로는 1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방원은 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죽여야만 했던 것일까?


 1. 불행의 씨앗을 잉태한 세자 책봉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을 당시 이성계는 58세의 노인이었다. 무신으로서는 최고의 활약을 보인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국가를 경영할 비전이나 정치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선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자신처럼 능력 있는 신하가 조선을 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도전이 재상 중심의 건국이념 지표들을 설정해 나간 것도 이 때문이다.


 정도전의 이러한 구상에 가장 강력히 반발한 인물이 바로 이방원이었다. 태조의 아들 중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할 만큼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정몽주의 격살에서도 보이듯 과감성까지 갖추었던 인물 이방원. 이들의 갈등은 이미 태조의 후계자인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태조의 첫째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는 조선 건국 전인 1391년에 55세의 나이로 이미 사망했지만 그녀와 태조 사이에는 장성한 아들 6명(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이 있었다.


 그리고 둘째 부인인 계비 신덕왕후 강씨(?~1396) 사이에서도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방번과 방석이 그들이다. 계비 강씨는 나이는 어렸지만 당찬 여걸이었다.


1392년 4월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했다는 보고를 받고 태조가 당황해 하자 '공이 언제나 대장군으로 자처하시더니 어찌 이렇게 당황해 하십니까'라는 핀잔을 줄 정도였다. 강씨의 영향력은 무엇보다 조선 건국 한 달 후 인 8월 20일 전격적으로 그녀의 소생인 11세의 방석을 세자로 책봉시킨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방석의 세자 책봉은 조선 왕실의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는 싹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본처의 아들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리라고 믿었던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아버지와 계모의 처사에 분개했다. 원래 정치에 뜻이 없었던 장남 방우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다가 1393년 사망했고, 실질적인 장남이 된 방과와 방원 등은 똘똘 뭉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2. 신권과 왕권의 충돌


 조선왕조는 건국 후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으며, 각종 궁궐과 관청의 정비에 착수하였다. 태조의 신임 속에 이러한 사업을 총지휘한 인물이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이라는 책을 통하여 조선 건국의 이념적 지표들을 설정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은 신하의 권력을 강조한 부분이다.


 '국왕의 자질에는 어리석음도 있고 현명함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재상은 국왕의 좋은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 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는 일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고 한 것이나, '국왕의 직책은 한 재상을 선택하는데 있다'고 한 것, '국왕의 직책은 재상과 의논하는 데 있다'고 한 것 등은 재상, 즉 신하의 역할을 특히 강조한 것이다.


 조선은 이성계가 왕이 된 이씨 왕조의 국가였다. 따라서 왕권이라는 것은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었다. 그러나 건국의 이념을 제시한 정도전의 머리 속에는 자신과 같은 재상의 권력이 언제든 왕권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자질이 일정하지 않는 국왕이 세습되어 전권을 행사하는 왕권중심주의 보다는 천하의 인재 가운데 선발된 재상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펴는 신권중심주의를 주장한 정도전은 방석의 세자 책봉을 오히려 기회로 여겼다.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는 방원과 같은 버거운 상대 보다는 어린 세자 방석이 즉위하면 자신의 입지가 보다 커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자로 책봉된 방석은 어머니 강씨와 정도전, 남은 등 개국공신의 후원에 힘입어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혀갔다.


 정도전은 특히 왕자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의 혁파를 단행하는 조치를 취하여 경쟁 관계에 있었던 방원 등의 무력 기반을 해체하고자 했다. 자신에게 서서히 가해지는 정치적 압박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방원에게 기회가 왔다. 1396년 계비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세자로 책봉된 방석의 입지가 점차로 위축되었다.


 방원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전부터 단결하고 있던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방원의 주도로 1398년 경복궁 남문에 쿠테타군을 배치한 후 우선 최대의 정적인 정도전의 제거에 나섰다.


 정도전은 자신의 자택(현재의 종로구청 자리)에서 가까운 남은의 첩 집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환담을 하던 중 불의의 일격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몇 년 전에 방영된 대하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정도전이 자결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정도전과 같은 혁명아라면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이 방원의 군대에게 쫓겨 도망을 쳤다가 결국에는 체포된 후 이방원에게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한 기사기 나온다. 실록 역시 역사의 승리자의 기록임을 감안하면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증오는 그의 수진방 자택을 몰수하여 말을 먹이는 사복시(司僕寺)로 사용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정도전을 제거한 후에는 세자 방석을 유배시킨 후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이방원이 실질적인 권력가로 나선 순간이자, 왕으로 나아가는 수순이기도 했다.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으로 어린 세자 위에 군림하면서 재상이 주도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던 정도전의 꿈도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방원과 정도전의 갈등은 1398년의 왕자의 난 성공으로 정도전이 제거되면서 이방원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정도전의 신권중심주의가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후 강력한 왕권중심주의를 펼쳤던 배경에는 이러한 정치적 갈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독재정권', '제왕적 대통령', '문민정부', '참여정부' 등 권력의 특징을 둘러싼 여러 용어들이 난무하는 현대의 정치처럼 조선의 정치권력 또한 그 시작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건국 후 6년 만에 터져 나온 1398년의 '왕자의 난'은 조선시대 정치사의 운명을 축소판처럼 보여주었다.


 ※ 태종과 신덕왕후 강씨의 악연


 이방원과 세자로 책봉된 방석의 생모 강씨와의 갈등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였다. 태조를 조종하고 정도전 등의 힘을 빌어 방석을 세자에 앉힌 강씨에 대한 방원의 분노는 생전에는 물론이고 그녀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계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그녀에게 신덕왕후라는 존호를 내리고, 왕릉도 궁궐에서 잘 보이는 곳에 만들고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태조는 궁궐에서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 정도로 계비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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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 (출처 : encyber.com)


  그러나 왕위에 오른 방원은 태조가 죽자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던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 1409년(태종 9) 마침내 정릉은 도성 밖 양주 지방, 현재의 정릉(서울 성북동) 자리로 옮겨졌다.


 이어 태종은 원래 정릉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으니, 강씨에 대한 태종의 증오가 어떠했는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태종은 정릉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도록 했으나, 현종대에 송시열 등의 건의에 의해 정릉은 복구되어 왕비릉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정릉을 봉(封)하고 제사를 베풀던 날에 소낙비가 정릉 일대에 쏟아졌는데 백성들은 신덕왕후의 원혼을 씻는 비라고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현재에도 원래 정릉이 있었던 자리는 정동(貞洞)으로 불리면서 희미하게나마 신덕왕후의 자취가 남아있음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