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최고의 선택, 신병주(중세2분과) 1. 14년 세자 자리를 박탈당하다 조선왕조의 왕의 계승은 장자 세습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태종 때까지 이 원칙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태조는 계비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가 본처 소생인 이방원 등의 반격을 받는 ‘왕자의 난’이라는 비극을 맛보았다.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2대 정종은 태종의 두 번째 아들이었으며, 정종을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다섯 번 째 아들이었다. 이처럼 피를 보는 왕위 계승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태종은 누구보다도 적장자가 왕위에 올라 조선의 기틀이 잡혀나가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그의 기대대로 원경왕후는 1394년 장자 양녕대군 제(褆:1394~1462)를 낳았고, 1404년 8월 태종은 양녕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418년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양녕대군이 폐위되어 경기도 광주로 추방되었다. 11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된 지 14년만의 일이다. 황희 등 조정의 원로대신들 중 일부가 반대했지만 오히려 이들은 태종에 의해 유배를 당하였다. 14년 동안 왕세자의 신분에 있었던 양녕대군이 폐위된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양녕대군은 부왕인 태종과 성격이 맞지 않았다. 치밀하고 엄격한 성격의 태종에 비해 양녕은 호방하면서도 풍류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글공부 보다는 사냥이나 풍류에 관심이 많았다. 글공부를 게을리 하여 주변의 사람들도 곤란을 겪었다. 1405년 10월 태종은 세자가 학업을 게을리 한다며 세자를 대신하여 환관들에게 태(笞;매)를 치기도 했으며,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선생님들도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양녕대군과 스승인 이래(李來)에 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래가 궁궐에 당도하자 세자가 매 부르는 소리를 하므로 이래가 “저하께서 매를 부르는 소리를 하시니 이것은 해야 할 바가 아옵니다. 학문에 독실한 뜻을 두시고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마소서” 하니 양녕은 놀라는 체 하며 “내가 평생에 매를 보지 못했는데 어찌 매소리를 하겠는가”하였다. 이래가 여러 말로 지극히 잘못을 간하므로 양녕이 원수같이 여겼다. 어느 날은 옆 사람에게 “이래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며 그가 꿈에 보이면 그 날은 반드시 감기가 든다”고 하였다.’ 양녕의 학문에 대한 싫증은 이처럼 심각하였다. 심지어 궁궐에 건달패나 기생들을 들인다는 소문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태종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다. 달밤에 궁궐 담을 넘어 무뢰배들과 비파를 타기도 하고 기생들을 궁궐에 불러들여 밤새도록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잡희(雜戱)를 즐겼다. 정종의 애첩이었던 기생과 사통하는가 하면, 중추부사 곽정의 첩 어리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도적질하여 궁궐에 들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행들이 계속되자 마침내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는 절차를 취하여 1418년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2. 충녕 지명은 태종의 작품 태종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폐위를 결정한 것에는 양녕의 기행(奇行)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셋째 아들 충녕에 대한 믿음이 큰 작용을 했다. 항상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학문에 열중하는 충녕의 됨됨이를 알고 있던 태종은 자신의 후계자로 충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풍류생활에 빠진 양녕이나 불교에 심취했던 둘째 효령에 비해 셋째 충녕은 태종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국왕의 자리는 장자세습이라는 원칙보다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이제 겨우 반석에 올려놓은 조선왕조가 굳건한 뿌리를 내리려면 충녕과 같은 능력 있는 왕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태종은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잔의 진통을 치루면서 무엇보다 조선은 왕권이 안정되어야 제대로 기틀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재상의 권위를 강조한 정도전을 제거한 것이나 민무구나 민무질 등 처남들을 가차 없이 처단한 것도 다 이러한 신념에서였다. 육조직계제를 실시하여 왕명이 바로 6부의 장관들에게 하달하도록 한 것이나, 호패법과 오가작통법 등 백성들을 국가가 확실히 파악하는 정책을 쓴 것은 모두 왕권 강화책의 일환이었으며,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아가려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이러한 밑그림을 완성할 역량있는 후계자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전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있으면서 창경궁의 전신이 되었던 수강궁(壽康宮)에 거처하면서 세종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세종 초년 권력을 믿고 방자하게 행동했던 세종의 장인 심온을 처형하고 그의 부인(세종의 장모)을 관노비로 삼은 것이나,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여 국방을 안정시킨 것도 태종의 작품이었다.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가 마음껏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장애가 되는 요소는 모두 제거하려는 뜻이 담긴 것이었다. 3. 명예로운 퇴진 양녕 또한 충녕에게 마음이 가 있는 부왕의 이러한 심중을 어느 정도 헤아리고 선선히 왕세자의 자리에 물러났다. 능력이 출중한 동생을 위한 명예로운 은퇴였다고나 할까?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효령대군 보(補)는 일찍이 부처를 좋아하였는데, 양녕이 미친체 하고 방황하니 효령대군이 그가 폐위될 것을 짐작하고 글공부에 전념하자 양녕이 지나다가 발로 차면서 “어리석도다 네가 충녕이 제왕의 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였더니 효령은 크게 깨닫고 곧 뒷문으로 나가 절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만약 양녕이 왕세자의 자리를 계속 고집했다면 왕자의 난처럼 피를 보는 왕실의 비극이 재현되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의 조선 역사에서 소현세자, 사도세자와 같이 부왕과 갈등을 빚은 세자는 거의가 불운한 죽음을 당했다는 점은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하고 있다. 왕이라는 자리 다음에 위치한 권력의 2인자 세자의 자리는 그만큼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자리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양녕은 나름대로 자신의 분수를 지킨 혜안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 또한 폐위된 후에도 기행을 일삼는 양녕에 대한 신하들의 거듭된 탄핵에도 불구하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우애를 끝까지 보여주었다. 『세종실록』에는 ‘형이 나이가 이미 많았으니 반드시 소년 기습(少年氣習)이 없어졌을 것이라 하여, 서울 집으로 불러 돌아오게 하여 날마다 친히 대접하되, 조금도 혐의하거나 간격이 없어 하니, 여러 신하들이 비록 옳지 않음을 고집하여도, 왕이 모두 듣지 않고 두 형을 섬기되, 반드시 인정과 예절을 다하였다.’고 평하여 세종의 따뜻한 형제애와 온화한 인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양녕은 서울을 벗어나 관악산 연주대 등지에서 풍류생활을 하면서 6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양녕이 동생인 세종 보다 오히려 12년이나 장수한 것은 정치에 대한 모든 미련을 훌훌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간 덕분은 아닐까? 양녕의 ‘조용한 퇴위’는 후대 왕들에 의해서도 기념되었다. 숙종 때 양녕을 모신 사당을 만들고 ‘지덕사(至德祠)라 하였으며, 영조는 지덕사에 대한 제사를 강조하고 봉사손(奉祀孫)들의 서용(敍用)도 명하였다. 정조 때에는 ‘지덕사’라는 현판을 사액하였고, 1876년 후손 극선 등에 의해 『지덕지(至德誌)』가 편찬되었다.
4. 가문의 영광, 국가의 영광? 현대사에서도 최고집권자의 후계자 선택 문제는 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안이란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박정희의 경우 권력욕과 더불어 후계자에 대한 불안한 믿음이 결국에는 장기독재로 치닫게 하였다. 전두환은 12. 12쿠테타 동지 노태우를 철저히 관리해주고, 노태우 역시 끝까지 은인자중하는 태도를 취한 끝에 어렵사리 전두환의 후계자가 되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노태우의 취임은 ‘가문의 영광’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한국 현대정치사에 있어서는 여러 측면에서 퇴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만큼 한 나라를 책임질 후계자의 선택은 중요하다. 600년 전 왕조 국가에서 태종은 ‘원칙’ 보다는 ‘능력’을 택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의 자리를 박차고 후견인의 위치에 서서 아들 세종을 지원하였다. 태종의 선택은 ‘세종’이라는 조선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군을 배출함으로써, 권력 쟁취에 따랐던 부정적 이미지까지 희석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