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넘을 수 없는 장벽 훈구파, 남이의 옥사 (1468년)

BoardLang.text_date 2007.01.23 작성자 신병주

넘을 수 없는 장벽 훈구파, 남이의 옥사 (1468년)


신병주(중세2분과)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뒷세상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


위의 시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남이 장군의 시로, 젊은 장군의 호방한 기개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남이가 역심(逆心)을 품고 있었다는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되어, 28세의 짧은 나이로 그의 생을 마감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이수광 또한 ‘말 뜻이 발호하여 평온한 기상이 없으니 화를 면하기가 어려웠다’고 평하여 남이의 죽음과 이 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평하였다.

 

 1. 예종의 즉위와 남이의 위기

  남이(南怡:1441~1468)는 아버지 남빈(彬)과 어머니 홍여공의 딸 사이에 태어났으며, 태종의 외손이 된다. 어릴적 부터 용맹이 뛰어났으며,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지방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대장으로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일등에 책봉되고, 파죽지세로 승진하여 병권(兵權)을 장악하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정국은 한명회로 대표되는 원로 훈구파와 구성군(龜城君)으로 대표되는 종친 세력, 그리고 이시애의 난 진압 후 입지가 커진 남이와 같은 신흥 무장세력들 간에 권력 투쟁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세조는 이들 정치세력간의 화해와 균형을 유지시키고자 했지만 정국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 채 사망하고 뒤를 이어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예종 즉위 후 신숙주, 한명회 등 원로대신들은 구성군, 강순, 남이 등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 새로운 주류세력으로 떠오른 인물들의 견제에 나섰다. 특히 젊은 나이로 병권을 장악한 남이가 중심 타켓이었다.

  예종 역시 남이처럼 세조의 총애를 받은 장군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남이는 결국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는 탄핵을 받고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한직인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한직에서 밀려난 그가 어느 날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는 징조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함으로써 국문 끝에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연려실기술』에는 ‘남이의 옥사(獄事)’라고 기록하고 있다.

 2. 훈구대신과 신흥 무인세력의 갈등

  그런데 남이의 옥사는 유자광의 고변에 의한 단순한 사건으로 치부하기는 힘든 측면이 많다. 이 사건의 이면에는 예종의 즉위 후 추진한 일련의 왕권강화책과 이에 대한 원로 훈구파의 반발이 숨어 있었다.

  예종은 세조의 승하로 빚어진 강력한 정치적 권위의 공백을 극복하고자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즉위와 더불어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선전관을 재상가(宰相家)에 보내어 불시에 분경(奔競)을 적발하도록 한 것이다. 분경은 원래 ‘분추경리’(奔趨競利:분주하게 다니면서 이권을 경쟁한다)에서 비롯된 말로, 정치권의 실세들을 찾아 다니며 관직을 부탁하는 인사청탁으로 볼 수 있다.

  1468년 10월 19일 예종은 당시 3정승과 이조·병조판서, 왕의 종친가에 까지 불시 단속을 하여 왕의 사촌인 구성군을 비롯하여 원로대신 신숙주, 우의정 김질, 이조판서 등의 집에서 인사청탁을 하던 분경범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정작 분경의 당사자들은 처벌하지 못하였다. 예종은 이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대간(臺諫)이 이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고 하여 대간들을 힐책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훈구대신들은 긴장했다. 특히 무장세력으로 새롭게 권력의 중심에 떠오른 남이가 기존의 훈구세력이나 종친세력에 불만이 많음을 알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남이는 세조 말년에 구성군을 중용하지 말 것을 건의하는 등 당시의 정국에 상당한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종에 의한 분경금지법이 강화되면서 훈구대신들과 종친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곧이어 남이의 옥사가 발생한 점에서 남이의 죽음은 정치적 파위 게임의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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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 남이 장군 묘.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소재
  세조의 절대 총애를 받았던 남이는 예종에 의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자 기득권 세력인 훈구세력에게 강한 불만을 표시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훈구대신들의 선제공격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격의 빌미는 조선전기의 ‘검증된 간신’ 유자광이 제공하였다.

 『예종실록』에는 『연려실기술』의 기록과 달리 유자광이 고발한 내용에 대해, ‘남이는 지금 왕이 분경을 엄히 단속할 적에 일을 꾸며 김국광, 노사신 등을 처단하고자 했으며 아울러 한명회를 제거하려 하였다’고 기록하여 훈구파에 대한 남이의 도전을 직설적으로 언급하였다. 남이 역시 권력 투쟁에서 만만치 않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 넘을 수 없었던 훈구대신들의 벽

  이처럼 남이 옥사의 발단은 신숙주, 한명회로 대표되는 세조대의 훈신들과, 이시애의 난 이후 새로 대두된 무인들 간의 정치적 반목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종의 즉위와 더불어 분경금지법을 통해 훈신들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엄격히 실시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다는 점에서는 신흥무인세력에 대한 보수 훈신세력의 반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남이를 비롯한 강순, 정숭로 등 이시애 난을 평정한 후 적개공신에 책봉되었던 무인들이 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세조대 훈신들의 정치적 승리로 끝을 맺었다. 옥사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던 한명회가 영의정으로 복귀한 점도 이러한 사실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

  결국 예종은 즉위 후 의욕적인 왕권 강화책으로 세조대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훈신들을 견제하려 했지만, 훈신 세력의 깊은 벽을 뚫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던 젊은 장군 남이가 옥사를 당하는 결과를 빗고 말았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무장의 기개만으로는 이미 권력의 포스트를 차지한 훈구대신들을 압도할 수 없었다.

  1469년 예종이 14개월의 짧은 왕위를 마치고 승하하였다. 예종에게는 안순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4세의 아들 제안대군과 요절한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맏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왕위는 의경세자의 차남인 13세의 잘산군(乽山君)으로 결정되었다.

  왕이 죽은 그 날 바로 다음 왕을 결정하는 파격적인 이 조처의 주인공은 당시 왕실의 최고어른이었던 세조의 비 정현왕후 윤씨였다. 훗날 성종의 묘호를 받게 되는 잘산군. 그가 이처럼 전격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세조 때부터 구축해 온 장인 한명회의 정치적 파워가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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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2) 정선의 「압구정」 : 한명회는 한강변에 별장을 짓고 명나라 사신 예겸에게 그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예겸은 ‘갈매기와 가까이 사귀는 정자’라는 뜻으로 압구정이란  이름을 지었다. 겸재 정선이 한양 주변을 그린 그림 중의 하나이다.
4. 한명회의 작품, 성종의 즉위

  사실 세조 사후 예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부터 왕실은 다음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세조의 맏아들은 의경세자였다. 세조가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은 후에 18세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년간 병으로 앓다가 사망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세조가 어린 조카를 죽인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맏아들이 죽자 자연히 왕세자의 자리는 차남인 해양대군(예종)의 차지가 되었다. 1457년 형의 죽음으로 8세에 세자로 책봉된 예종은 세조의 사후인 1468년 9월 19세의 나이로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곧바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다 하여 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조 때 막강한 권력을 형성한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 훈구대신들의 정치적 간섭도 만만치 않았다.

  예종은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 동안이었지만 남이의 옥사 처리를 통하여 왕권 강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대비의 수렴청정과 원상(院相)으로 확고한 세력기반을 갖춘 훈구대신들의 장벽 속에서 별다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을 하였다.

  예종이 왕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종 사후 왕위 계승권도 자연히 대비인 정희왕후와 훈구대신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한명회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자신의 사위 잘산군을 적극적으로 왕으로 추대하면서 대비의 동의를 얻어냈다.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대군에게 마음이 가 있었을 가능성이 컸지만 훈구대신으로 조정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한명회의 입김을 물리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13세 왕의 후견인은 표면상 정희왕후였지만 실질적인 후견인은 한명회였다. 예종에게 딸을 시집보내고도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요절하는 바람에 왕의 장인이라는 프리미엄을 마음껏 누려보지 못했던 한명회. 그러나 다시 한 번 사위 성종을 왕위에 올리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함으로써 세조 때부터 승승장구한 그의 이력에는 왕의 장인이라는 큰 영예가 더해졌다. 그야말로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한명회 시대를 연출해나간 것이다.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즉위한 후에도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를 중심으로 한 세조대의 훈신들은 여전히 국가의 원로로 자리하면서 기득권을 유지시켜 나가면서 ‘훈구파’라는 역사적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그 굳건해 보였던 훈구파도 이제 지방 세력을 무대로 서서히 성장하는 사림파라는 호적수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피할 수 없는 역사적 대결의 바탕에는 사림파라는 ‘젊은 피’를 수혈하여 훈구파를 견제하려는 성종의 정치적 승부수가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