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와 사림파의 첫 충돌: 1498년 무오사화 1498년 7월 사림파의 핵심인물이자 사관으로 활동한 김일손(1464~1498)이 의금부 낭청에 의해 체포된 후 국왕인 연산군 앞에 섰다. 연산군이 분노한 모습으로 캐물은 것은 세조의 행적을 비판적으로 사초에 실은 경위였다. 문제가 된 사초는 김일손의 스승이자 사림파의 영수였던 김종직(1431~1492)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초나라 항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의제를 조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수양대군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대한 저항감을 표시한 내용이었다. 1. 갈등의 쟁점, 사초 사건 사림파의 기본적인 인식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부정이었다. 의리와 충절이라는 성리학의 명분으로 무장한 사림파에게 있어서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성종 때 점차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힘을 얻어가는 사림파였지만 공개 석상에서 선왕인 세조를 비판할 만큼의 힘은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간접적인 비판의 방식을 취하였다. 영원히 역사로 기록될 사초에 세조의 행적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로 작정하였고 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때가 좋지 않았다. 언관직에 주로 진출한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싫증을 내고 있는 연산군 시대가 아니었던가? 여기에 더하여 자신들을 타도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림파에게 이를 갈고 있던 훈구파로서는 사림파 공격의 빌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시기였다. 조선의 역사에서 15세기 후반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사상적 대립으로 요약된다. 성종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기존에 정치적, 사회적 특권에 대해 견제를 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이들은 언관이나 사관과 같이 조정의 훈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직책에 포진되어 훈구파의 기득권 비리에 서서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사림파 중에서도 김종직을 보스로 하는 영남사림파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고, 연산군대에 오면 김일손이 영남사림파의 중심인물로 김종직의 바통을 이어받게 된다. 성종대 사관으로 활약한 김일손은 역사 기록을 통해 세조와 훈구파의 잘못된 정치 형태를 고발하려 했다. 그의 이러한 역사의식은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의 비행을 적나하게 기록하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싣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비밀리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 원칙인 사초가 훈구파들에 의해 입수되어 연산군에게까지 보고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1498년의 무오사화로 비화되었다. 무오사화는 50년 가까이 지루하게 전개되는 사람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인 ‘사화’의 서막을 연 사건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2. 유자광과 이극돈 VS 김종직과 김일손 무오사화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사회,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사림파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정쟁이다. 그리고 이후 4번에 걸친 사화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 되기도 했다. 무오사화의 시작은 성종 사망 후 실록청의 구성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사망하면 바로 실록청을 구성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사초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 사초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미리 사초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극돈은 광주 이씨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권력을 누려온 전형적인 훈구파였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는 이극돈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정희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 때 불교중흥책을 편 세조의 눈에 띄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것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었다. 김일손의 위험한(?) 사초를 입수한 이극돈은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일손을 찾아가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일손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 때 유자광이 다시 한 번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경주부윤을 지낸 유규의 서자로 이시애의 난 정벌에 기여한 공으로 세조에 의해 발탁되었고 예종 대에는 남이의 역모를 고변한 공으로 무령군에까지 봉해지면서 승승장구했던 유자광. 이번에도 그의 활약은 시작된다. 이극돈은 ‘검증된 정치공작꾼’ 유자광을 찾았다. 유자광은 궁중에 자신과 연계하고 있던 노사신, 윤필상 등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여 김일손 등이 사초에 궁금비사(宮禁秘史)를 써서 조정을 비난했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려 연산군을 자극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연산군은 사초를 마침내 왕에게 올리게 하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다. 연산군 또한 이를 기회로 평소 언관과 사관직에 주로 포진하여 자신의 독재적인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사림파를 제거할 구실을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당시 김일손은 모친상으로 청도에 내려가 있었지만 바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도판 1) 인조무인사초(仁祖戊寅史草): 인조대 사관이 작성하여 집안에 보관했던 가장사초(家藏史草)의 원본이다. 37책으로 구성되었으며, 1636년 6월 13일부터 9월 17일까지의 사초를 날짜별로 1책씩 묶어 놓았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3. 끝나지 않는 세조의 망령 김일손의 사초에는 세조가 신임한 승려 학조(學祖)가 술법으로 궁액(宮掖)을 움직이고, 세조의 총신이자 훈구파인 권람(權擥)이 노산군의 후궁인 숙의 권씨의 노비와 전답을 취한 일 등 세조대의 불교 중흥책과 훈구파의 전횡을 비판한 글과, 황보인과 김종서의 죽음을(死節)로 기록하고 이개, 박팽년 등 절의파의 행적을 긍정적 입장에서 기술하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세조의 왕의 찬탈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 정책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사림파의 입장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진나라말 숙부 항우 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이 글은 바로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를 들어 비판한 글이었다. 훈구파들은 김일손의 불손한 언행이 스승 김종직의 영향 때문이라 주장하였고 사망한 김종직 마저 사화를 피해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죽은 김종직은 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고 다시 처형하는 최악의 형벌인 부관참시(副棺斬屍)를 당하였다. 유자광이 사화의 주모자가 된 데는 김종직과의 악연도 큰 작용을 했다. 김종직은 함양군수 시절 관내에 유자광이 쓴 시가 적힌 현판을 발견하고, 대번에 불태워 버리도록 지시를 했다. 유자광과 같은 소인배의 글이 자신이 관할하는 곳에 있는 것이 치욕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즉시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을 비롯하여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하고, 표연말, 정여창, 최부, 김굉필 등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거 유배시켰다. 이것이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로서 김종직으로 구성된 영남사림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후 유자광은 김종직의 문집과 친필 현판들을 찾아 남김없이 없애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20년 전에 당했던 모욕을 철저한 복수로 앙갚음한 셈이었다. 무오사화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사림파의 부정적인 인식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그들만의 ‘과거사 바로잡기’가 훈구파의 저항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확보한 훈구파들의 입장에서는 세조의 왕통을 부정하는 사림파들의 입장은 이제까지 승승장구한 그들의 존재 기반을 박탈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이에 훈구파들은 이극돈, 유자광 등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사림파들의 약점을 파헤쳤고, 혼주(昏主) 연산군 또한 자신의 전횡에 제동을 거는 사림파들의 제거에 적극 협력했던 것이다. 4. 김일손과 직필(直筆) 정신 1498년 김일손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을 흘렀다고 해서 ‘자계(紫溪: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그를 배향한 사당도 자계사가 되었다. 자계사는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구현된 선조대에 자계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661년(현종 2) ‘자계’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도판 2) 자계서원: 청조 지역 사림들이 김일손이 모신 사당을 세우고 자계사로 하였는데, 선조대에 자계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김일손의 조카인 김대유는 40세 때 청도의 사림들과 함께 자계사를 건립하였으며,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거듭 사직하고 숙부의 뜻을 받들며 처사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김대유는 41세 때는 김일손의 유고(遺稿)를 모아 자계사에서 판각(板刻)을 했으며, 70세 되던 해에는 숙부인 김일손의 연보를 편집하였다. 그만큼 숙부를 존경하고 그의 정신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김대유는 경상우도 사림의 종장의 되는 남명 조식이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김일손의 사림파 정신은 김대유를 거쳐 조식으로 이어지면서 영남사림파의 학맥에 큰 분수령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조식은 김일손에 대해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凌霜之節)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서 훈구파의 전횡에 맞섰던 김일손은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은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훈구파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상,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가 새로운 조선을 이끌어 가는 주역으로 부상하기까지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무오사화를 포함한 네 번의 사화는 힘든 역사의 여정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관의 직필(直筆)을 실천하면서 현실의 벽을 넘어서고자 했던 김일손과 같은 인물의 죽음을 넘어 16세기 조선의 역사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