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504년의 갑자사화 - 폐비 윤씨의 죽음과 후폭풍 -

BoardLang.text_date 2007.03.12 작성자 신병주

1504년의 갑자사화 - 폐비 윤씨의 죽음과 후폭풍 -


 

신병주(중세2분과)


   1504년 연산군은 임사홍의 보고를 받고 치를 떨었다. 자신이 몰랐던 생모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했다.

  일차적으로 어머니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성종의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이 끌려나와 격살을 당하고, 어머니의 사사 사건에 연루된 대신들이 줄줄이 처형을 당했다.

희대의 풍운아 한명회조차 부관참시라는 최악의 형벌을 당했고, 김굉필, 최부 등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오른 사림파의 핵심인물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연속으로 일으키며 ‘검증된 폭군’의 이미지를 굳혀갔다.

 1. 윤씨의 폐위와 죽음까지

 “왕비 윤씨는 후궁으로부터 드디어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내조하는 공은 없고, 도리어 투기하는 마음만 가지어, 지난 정유년(1473년)에는 몰래 독약을 품고서 궁인을 해치고자 하다가 음모가 분명히 드러났으므로, 내가 이를 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이 함께 청하여 개과천선하기를 바랐으며, 나도 폐출하는 것은 큰일이고 허물은 또한 고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 감히 결단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뉘우쳐 고칠 마음은 가지지 아니하고, 덕을 잃음이 더욱 심하여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결단코 위로는 종묘를 이어 받들고, 아래로는 국가에 모범이 될 수가 없으므로, 이에 성화15년(1479년) 6월 2일에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아아! 법에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는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있겠는가? 일은 반드시 여러 번 생각하는 것이니, 만세를 위해 염려해야 되기 때문이다.”

1479년 6월 13일 성종은 윤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퇴출시키는 파격적인 결정을 하고 이를 종묘에 고하였다. 교서에서는 투기죄와 궁인을 해치려 한 죄, 실덕(失德) 등이 언급되었지만 오래도록 성종과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와 갈등을 빚어온 것이 원인이었다.


  차기 대권을 이어갈 아들(연산군)을 낳은 왕비에게 이토록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왕실에서 윤씨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폐출된 왕비 윤씨는 누구인가? 성종의 첫 번째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였다. 한씨는 1467년 12세의 나이에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69년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지만 성종과의 사이에 후사를 낳지 못하고 1474년(성종 7)에 사망하였다.

  이 때 왕의 빈자리를 메운 사람이 후궁으로 들어왔던 제헌왕후 윤씨(~1482)였다. 윤기견의 딸로서 1473년 숙의에 봉해졌던 윤씨는 1474년 8월 9일 일약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이어 11월에 원자 연산군을 낳음으로써 그녀의 주가는 최고에 이르렀다.

  출생연도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종 보다는 연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실록의 기록에서 그녀의 성격이 매우 강했음을 고려하면, 나이나 성격 면에서 결코 성종에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더구나 어린 성종은 누님뻘인 왕비 보다는 후궁들을 좋아했다. 소용 정씨와 엄씨를 찾는 발길이 잦았고, 제헌왕후 윤씨는 이를 바라만 보고만 있지 않았다. 윤씨는 연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민간요법을 쓰기도 했고, 후궁들이 자신과 세자를 죽이려 한다는 투서를 올려 정소용과 엄소용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투서의 실질적인 작성자가 윤씨로 밝혀지고,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이 발견되자 성종은 왕비의 폐출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때마다 윤씨를 변호한 것은 ‘원자의 생모’, 즉 차기 왕위 계승자 연산군의 어머니라는 확실한 무기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성종과 윤씨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성종이 후궁을 찾은 것에 반발해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태가지 벌어지면서 두 사람의 파국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여기에 시어머니 인수대비 한씨가 가세하였다. 조신한 며느리 보다는 아들과 맞먹는 며느리의 이미지를 보이는 윤씨가 시어머니에게도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인수대비는 마침내 성종에게 윤씨를 폐위할 것을 요구했고, 1479년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비가 사가에 쫓겨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가에 폐출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482년 성종이 내려준 사약을 마시고 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7살의 왕자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을 까마득히 몰랐고, 1494년 성종은 죽으면서까지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일을 거론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지만 이는 불과 10년 동안도 지켜지지 않았다.

  성종의 뒤를 이어 ‘정상대로’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생모의 비극적인 죽음은 언젠가는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1504년 마침내 이 뇌관을 터뜨리는 자가 등장하게 된다.

  연산군의 측근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온갖 방법을 기획하고 있던 임사홍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계십니까?” 연산군에게 던진 임사홍의 이 한마디는 이후 수많은 선비들의 죽음과 귀양으로 점철되는 갑자사화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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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갑자사화의 주모자 임사홍

  성종의 장남인 연산군의 이름은 융으로 장남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정통성은 그에게는 큰 힘이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가 별다른 정치적 견제를 받지 않는 요인이기도 했다. 사실 조선은 왕위계승에 있어 장자상속 제도를 원칙으로 했지만 문종이나 단종을 비롯한 일부 왕을 제외하고는 그 원칙이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성종 등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왕은 모두 장남이 아닌 신분으로 왕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연산군의 프리미엄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것이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가속화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무오사화로 사림을 정계에서 몰아낸 후 연산군은 훈구대신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 시점에서 연산군의 측근세력 임사홍은 그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사건을 연산군에게 알려 새로운 사화를 기획하였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죽을 때 연산군은 7살의 어린 나이였고 조정에서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상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 연산군의 측근세력으로 권력욕에 불탔던 임사홍은 기회를 틈 타 연산군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정보를 흘렸다. 윤씨의 폐비 사건에 사림파들뿐만 아니라 훈구파들도 많이 관련되어 있었는데, 임사홍은 이것을 기회로 해서 사림파와 함께 일부 훈구파까지 제거하려 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연산군의 분노는 폭발했고, 어머니 윤씨를 폐출하는 ‘폐비정청’에 참여한 인사들 대부분을 잡아들이게 했다. 윤필상, 이극균, 성준 등 성종 시대의 대신들이 처형을 당했고, 희대의 풍운아 한명회는 이미 사망했지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영암사림파의 중심인물 김굉필과 ≪표해록≫의 저자 최부 등은 유배지에서 처형을 당했고, 이미 죽은 정여창, 남효온에게도 추가로 죄가 가해졌다.

이 사건이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로서 성종대의 훈구공신을 비롯하여 사림파의 씨를 말릴 정도로 대규모의 정치적 살육이 전개되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생모를 폐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에 대한 광적인 복수극으로서, 이 사건으로 사림파는 다시 한 번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갑자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춰지지만 실제적으로는 전형적인 독재 군주인 연산군이 그의 정치적 행위(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을 포함하여)에 반대하는 세력(사림파이건 훈구파이건)에게 가차 없는 처벌이 가해진다는 사실을 학습하게 함으로써 추호도 비판세력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실제 갑자사화 이후 언론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지고, 국가를 사용화(私用化)하는 연산군의 ‘흥청망청’의 정치는 피크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향락과 퇴폐가 극에 치달으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 사회는 독재 군주 연산군의 폭정과 방탕을 오래도록 방치할 만큼 그렇게 허약하지는 않았다.

3. 아버지와 아들

  한편 갑자사화의 주모자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는 아버지와는 달리 사림파의 길을 걸었다.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아버지와는 정치인식에 있어서 많은 견해차를 보였다.

  무오사화 때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이유로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을 갔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어느날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왔는데, 병풍에 ‘요, 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라는 글귀를 보고 자신을 비판한 것임을 직감하고 누가 이 글을 썼는지를 묻자 임사홍은 사실대로 아들 임희재가 쓴 것임을 실토하였다.

  연산군은 크게 노하였고 결국 임희재는 갑자사화로 귀양을 갔다가 처형을 당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임사홍이 고의로 아들을 참소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고도 전하는데, 권력은 부자의 정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잔인했던 것일까?

  연산군대 최고의 정치 모략가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가 사림파의 정신을 계승하여 연산군의 실정에 대항한 모습은 80년대의 정치상황을 떠올리게도 한다. 5공화국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집권 여당의 자녀들 중에서도 전두환 정권에 맞선 운동권 학생이 많았다. 임사홍과 임희재는 조선시대판 정치권력가 아버지와 운동권 아들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