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5년 동인과 서인의 분당 신병주(중세사 2분과) 2007년은 한국 정당사에 있어서 명분 없는 분당과 합당으로 얼룩진 시대로 기억이 될 듯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을 쪼개고, 또 하나로 뭉치는 묘한 현상들이 정신없이 연출되었다. 당적을 가진 국회의원조차 자기가 열린우리당인지, 통합신당인지, 민주신당인지, 대통합민주당인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당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정당의 이념이나 원칙은 뒷전이고 목표는 오직 하나. 바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가장 유리한 형태의 정당을 만들어 보려는 것이었다. 현대인을 정신없게 만드는 정당의 분열. 그 시초는 조선시대 선조 8년 1575년의 동서분당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도 최초의 분당인 동서분당은 지금에 비하면 긍정적인 모습도 있다. 당시 정치의 최대 현안인 척신(외척) 정치의 청산을 둘러싸고 당이 갈려졌으니까. 1. 선조의 즉위와 외척정치의 청산 문제 대두 4번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정치적, 사상적으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사림파는 적지 않는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사림파들은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그들의 입지를 계속 확산시켜 나갔고, 1565년 문정왕후 사망 후 외척정치가 거의 종식되면서 본격적으로 사림정치가 전개되었다. 명종의 뒤를 이어 왕실의 방계에서 최초로 국왕의 자리에 오른 선조는 일찍부터 사림들과 교감을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 출신 7남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서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가 요절한 후 왕실에 후사가 없자 명종의 뒤를 이어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국왕이 총명하다 하여 곧 수렴청정을 거두고 선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선조는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사림들을 가까이하고 공신과 왕실의 외척들을 배척해 나갔다. 따라서 선조의 즉위는 본격적인 사림정치의 시도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 이후 정치적, 사상적으로 큰 탄압을 받았던 사림들이 서서히 정계에 진출했고, 을사사화 때 죄인의 누명을 썼던 노수신, 유희춘 등 사림파의 주역들은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다. 이제 역사 속에서 훈구파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일부 훈구파는 사림파로 전향하기도 하였다. 선조의 즉위 이후 사림파는 이제 재야 정치가의 입지에서 벗어나 중앙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집권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내부 간에 분열이 일어났다. 외척정치를 비판하는 비판자의 위치에서는 사림파가 한 목소리를 냈지만 이제 정치 주도층이 되면서 학파의 성향이나 지역적 기반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굳이 현대사에 비유한다면 박정희의 유신정치, 전두환의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세상에서는 야당으로 뭉쳐 나갔던(물론 때로는 분립하기도 했지만) 김영삼과 김대중 세력이 군부독재가 사라진 이후 서로 대통령이 되고 정치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당을 달리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한 것과도 유사하다고나 할까? 2.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분열 사림파 내부 분열의 조짐은 특히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이은 영남학파와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간에 나타났다. 1572년 노련한 정치인 이준경은 죽기 직전 조정에 붕당이 일어날 것을 경고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적중했다.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마찰을 계기로 완전히 당을 달리하는 분당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572년 이황과 조식에게 학문을 배운 영남학파의 학자 오건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다. 김효원 역시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 출입한 학자로 1565년 문과에는 장원급제한 인재였다. 그런데 당시 인순왕후의 아우였던 외척 심의겸은 오건의 추천을 거부했다. 심의겸은 윤원형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윤원형의 집을 방문한 김효원을 기억하고 그를 권신의 집에 드나드는 소인배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 잠시 들른 것을 우연히 심의겸이 목격한 것이지 윤원형에 줄을 대고 있던 식객이 아닌 것이 판명되면서 김효원은 심의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474년 마침내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전랑은 조선시대 관리들의 인사권을 담당하던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통칭하는데 직급은 낮았지만 관리들의 인사문제를 결정하는 요직이라는 점에서 청요직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관직이었다. 특히 전랑직은 자신의 후임을 직접 추천하는 자천권(自薦權)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후 김효원이 어렵게 이조전랑직에 임명되고 후임 천거가 논의되자, 그 후임자로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역전되면서 이번에는 김효원의 역공이 시작되었다. 김효원은 심의겸이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의 아우인 점을 들어 이조전랑과 같은 청요직을 외척에게는 절대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당론이 나뉘게 되었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심의겸이 비록 척신이긴 하지만 명종 후반 이량(李樑)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들을 탄압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한 점을 들어 심의겸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심의겸의 지지 세력들은 주로 서울과 경기지역에 기반을 둔 기호학파의 학자들이었다. 한편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심의겸 또한 척신으로서 이제 본격적인 사림정치가 구현된 시점에 심의겸과 같은 외척의 등용은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의 중추는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이은 영남학파들이었다. 김효원 역시 이황과 조식 모두에게서 학문을 배운 인물로 영남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도판 1) 김효원의 문집인 『성암유고』 당시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인 건천동(지금의 동대문시장 근처)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릉(지금의 정동)에 있다 하여 동인과 서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정치인이 거주하는 동네 이름을 붙여, 김대중 대통령의 사람들을 ‘동교동계’, 김영삼 대통령의 사람들을 ‘상도동계’라고 부른 것과도 흡사하다. 동인이 외척정치에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면 서인은 외척 중에서도 일부 양심 있는 외척은 수용하자는 입장의 온건론이었다. 동인들은 선배 사림에 속하는 허엽을 영수로 추대했지만 그 중심을 이룬 인물은 유성룡, 우성전, 김성일, 이산해, 김우옹, 정인홍, 허봉, 이원익 등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소장파 인사들이었던 반면, 서인들은 박순을 영수로 하여 정철, 신응시, 정엽, 송익필, 조헌 등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허엽과 박순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함께 학문을 배웠는데 동서분당기에는 각기 다른 당파의 수장으로 추대된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만큼 학파가 곧 정파임을 완전히 규정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붕당정치 시기 이이의 역할 1575년 동인과 서인이 분당한 이래 점차 당쟁이 기승을 부리면서 상대당을 마치 원수처럼 인식하는 정국에서 국가의 안위와 민생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시기 붕당의 조정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인물로 율곡 이이(李珥:1536~1584)를 들 수 있다. 이이는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과 국방 강화책을 정치의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류들의 보합(保合)과 중재에 힘을 기울였지만, 그의 뜻대로 정치는 운영되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후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가 위기사태를 맞이하자 그제서야 조정에서는 이이가 제시했던 개혁 정책들에 대해 주목하였지만 이미 강을 건넌 상태였다.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그의 졸기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을 지녔던 학자이자 정치가 이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이가 죽은 후에 편당(偏黨)이 크게 기세를 부려 한 쪽을 제거시키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들 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이 생겨 사분오열이 되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는데, 이이가 평소 염려하여 먼저 말했던 것이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편의책(便宜策)들이 추후에 다시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백성들의 말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이이는 경장(更張)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살면서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본분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역적 기반과 교유 범위는 그를 서인 당인으로 고착화시켜 나갔다. 특히 그의 학문을 계승한 김장생, 조헌, 이귀, 황신 등이 후대에 서인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면서, 조선후기 정치, 사상사에서 이이는 서인의 학문적, 정치적 영수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1575년 동서분당으로 붕당정치의 서막이 열렸으며,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는 등 정치적 사건이나, 사상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당파의 분열은 지속되었다. 일제의 관학자들은 식민사관의 논리를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조선의 당쟁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했다. 幣原坦(시데하라 히로시)는 『韓國政爭志』에서, ‘조선인의 오늘날 작태를 이해하려면 그 원인을 과거의 역사에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의 근원으로 고질적인 것은 당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라고 하여 당쟁을 한국인의 고질적인 병폐임을 강조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자들 역시 당쟁 또는 붕당정치에 비판적이었다. 18세기의 실학자 이익은 관직의 수는 적은데, 관직을 차지하는 사람은 많은 것이(官職小 而應調多)이 당쟁의 기본적인 원인이라고 파악하였다. (도판 2) 성호 이익의 묘소, 경기도 안산시 소재 그러나 붕당정치에는 현대의 정당정치처럼 특정 세력의 독주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긍정적인 요소도 발견된다. 그리고 각 붕당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산시키기 위해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붕당정치가 식민사관의 논리처럼 꼭 국력을 낭비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정치 형태가 아니라는 점도 강조될 수 있다. 조선 중, 후기 정치사의 주된 흐름이었던 붕당정치에 대한 다양한 방면의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