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583년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그 진실공방

BoardLang.text_date 2007.10.09 작성자 신병주

1583년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그 진실공방


신병주(중세사 2분과)


  일본에게 패배한 임진왜란 초반의 참담함을 떠올릴 때 자주 언급되곤 했던 것이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다. 이이가 예견한 것처럼 일본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십만의 군사를 길렀다면, 허무하게 패전을 거듭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후대인들의 믿음은, 현실에서 십만양병설이 실천되지 못함으로써 더욱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데 정작 ‘십만양병설’에 대한 언급은 『선조실록』의 기록이나 이이의 문집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선조수정실록』이나 문인인 김장생이 이이 사후에 엮은 행장의 기록 등에만 전해진다는 점에서 구구한 진실 공방이 있어 왔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둘러싼 여러 기록이 담고 있는 실체는 무엇일까?   

  1. 최후까지 국방을 걱정한 학자

  이이(1536~1584)는 1536년 강릉의 외가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당 신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를 잉태할 때 사임당의 꿈에 용이 보였다 하여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로 불렸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그의 성장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경사(經史)에 통하고 시문, 서화에 뛰어난 사임당은 그의 초기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51년 어머니가 별세하자 3년상을 치른 이이는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교에 귀의했다. 금강산에서 불교의 선학(禪學)을 수행하면서 이이는 학문의 시야를 넓혔는데, 성리학의 심오한 형이상학 체계가 원래 불교의 교리에서 자극받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학문적 입지를 오로지 성리학에 두기 위해 1년 만에 하산을 했고, 23세가 되던 1558년에는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신혼살림은 선대부터 거주했던 고향인 파주 밤골에 차려졌고 율곡이라는 호도 이곳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 해에 이이는 성주 목사로 있는 장인에게 들렀다가 이웃한 예안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던 퇴계 이황을 만났다. 이이는 이황의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물며 학문을 묻고 시를 지었고, 이황은 35세나 아래인 이 젊은 선비의 재능과 학문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면서, “젊은 사람이 밝고 쾌활하며 기억하고 본 것이 많고, 자못 학문에 뜻이 있으니 가히 후생이 두려울 만하다.”고 하였다.

  율곡이 돌아간 뒤로도,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노학자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의 기본 개념인 이와 기에 대해 토론을 하였고, 이들의 토론은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이가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29세 때인 156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였다. 그는 이때 ‘천도책(天道策)’이라는 시제(詩題)를 받고, 그 답안에서 ‘천인합일설’을 강조했다. 이때까지 그는 각종 과거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호조좌랑으로 시작한 벼슬살이는 명종대 사간원 정언(30세), 사헌부 지평(33세), 홍문관 부교리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68년 선조가 즉위한 이듬해에는 독서당에서 사가독서 하면서 당시의 정치 현실을 문답식으로 정리한 『동호문답』을 저술하여 16세의 어린 왕에게 바쳤다. 이이는 자신이 살아간 시대를 중쇠기(中衰期:왕조의 중간 쇠미기)로 인식하고 대개혁의 경장(更張)이 필요한 시기임을 강조하였다.

  1574년에는 『만언봉사』를 올려 시대상황에 적합한 제도와 법을 만들어 백성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1575년에는 수기치인 등 제왕학의 조선적 이론서인 『성학집요』를, 1577년에는 『소학』의 이론을 보다 심화시킨 성리학 교과서 『격몽요결』을 저술하였다.

  42세 때 이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에서 은병정사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은병정사는 해주 석담 부근의 다섯 번 째 물굽이에 지은 학사(學舍)로서 조선 성리학의 이상을 향촌사회에 실현하려 한 이이의 대동사회에 대한 꿈이 담겨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이의 뛰어난 경륜과 능력은 더 이상 그를 은병정사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조정에 불려나온 이이는 이조, 형조, 병조판서의 관직을 두루 거쳤고, 사망 한 해전인 1583년 2월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시무(時務) 6조를 올렸는데,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를 등용할 것,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재용(財用)을 충족할 것, 번방(藩邦)을 굳건히 할 것, 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교화를 밝힐 것 등 모두가 국방에 관한 내용이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 1월, 이이의 졸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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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이의 영정

2. 『율곡집』 행장에 기록된 「십만양병설」

위에서 이이의 행적을 간단하게 소개해 보았지만, 그의 비범함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십만양병설’이다. ‘십만양병설’은 1583년 경연에서 주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율곡 자신이 쓴 글을 모은 『율곡집』이나, 이이 사후에 편찬된 공식 기록인 『선조실록』에 ‘십만양병설’이 기록되지 않는 점을 들어 이것이 지니는 의미를 축소하거나, 아예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럼 먼저 ‘십만양병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이이의 문인 김장생이 쓴 『율곡집』 행장을 찾아보자.

 “한 번은 경연에서, ‘미리 10만 명을 양성하여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대비하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10년을 지나지 아니하여 토담이 무너지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정승 유성룡이 말하기를, ‘일이 없이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회근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때에 난리가 없은 지가 오래되어 편안한 것만 좋아하여서 경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선생이 잘못한 것이다.’ 하니, 선생이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나라 형세의 위태하기가 달걀을 쌓아 놓은 것 같은데, 시속(時俗)의 선비는 이 때 어떻게 할 것을 모르니, 다른 사람이야 진실로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가 또한 이러한 말을 하는가.’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 유정승이 조정에서 누구에게 말하기를, ‘지금 와서 보면 문성공(이이)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약 그 말대로 하였으면 나라 일이 어지 이렇게 되었겠는가. 또 그가 전후로 계획한 것이 어떤 사람은 잘못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모두 꼭꼭 들어맞아서 참으로 따라갈 수가 없으니, 만약 율곡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능히 오늘날을 타개할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1백 년을 기다리지 않고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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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율곡집』 「행장」에 기록된 ‘10만양병설’ 부분

김장생의 율곡 행장에서 처음 기록된 십만양병설은 김장생의 제자인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가의 기세가 부진한 것이 극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땅이 붕괴하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군사들에게 호세(戶稅)를 면해 주고 무예를 단련케 하고, 6개월에 나누어 번갈아 도성을 수비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는 10만을 합하여 지키게 하는 등 완급의 대비를 삼아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하루 아침에 사변이 일어나 백성들을 몰아내어 싸우게 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큰 일이 실패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유성룡은 불가하다면서 ‘무사한 때에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기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경연의 신하들도 모두 선생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송시열의 「율곡연보」는 김장생의 「행장」 기록을 거의 따르면서, 10만 양병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송시열은 10만양병성을 주장한 시기를 1583년 4월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10년 전의 기록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이이의 선견지명을 매우 구체화시키고 있다.     

  3. 10만 양병설 진실 공방의 주범: 동인과 서인의 당쟁

  그러나 정작 국가의 공식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선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선조수정실록』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흥미를 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송시열의 「율곡연보」와는 달리, 1582년(선조 15) 9월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유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이이는 늘 탄식하기를 ‘유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의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국사를 담당하여 군무(軍務)를 요리하게 되었는데, 그는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근(忠勤)한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5년 9월 1일)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10만양병설’에 대한 기록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바로 동인과 서인의 치열한 당쟁에서 찾을 수 있다. 이이가 사망할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극에 달하였다. 1575년 동인과 서인이 분당한 이래 당쟁은 점차 심화되었고 마침내 상대 당파를 원수처럼 인식하는 강경한 정국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국에서  이이는 한 시대를 구제함과 국방 강화책을 정치의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류들의 보합(保合)과 중재에 힘을 기울였지만, 그의 뜻대로 정치는 운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이는 동인들에 의해 서인의 영수로 지목받았고 그만큼 이이에 대한 동인들의 반감은 컸다.

  이이 사후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고 선조 시대를 정리하는 『선조실록』이 편찬되었다. 실록은 전임 왕에 관한 기록이므로 후대의 왕 시절 누가 집권세력이 되는가가 서술에 큰 변수가 된다. 광해군대의 집권세력인 북인들은 동인 중에서도 강경파였다. 북인의 주도하에서 편찬한 『선조실록』은 반대당인 서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면모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인의 영수로 활약했던 이이와 정철에 관한 ‘졸기(卒記)’의 기록을 보면 북인들의 『선조실록』 편찬의 일단을 볼 수가 있다. 즉 『선조실록』에는 이이의 죽음에 대해 ‘李珥卒’이라는 단 세 글자로 기록하여 아무런 의미도 표현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여 서인들에 의해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이가 죽은 날 그의 인품, 학문적 성취, 교유 및 사승관계 등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자 이이의 죽음에 관한 기록조차 ‘이이졸’이라고 표현한 북인들이, 이이가 제시했던 주요한 방책들을 흔쾌히 수록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물론 서인측에서는 좀더 과장해서 ‘10만양병설’을 강조하였을 것이고...     

  인조 원년 경연에서 서인들이 중심이 되어 『선조실록』과 광해군대의 시정기를 수정하자고 제의했던 것은 이러한 인식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실록을 없애고 새로 실록을 쓴다는 것은 전례도 없거니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의한 편찬이라는 비난을 살 것이 분명했다. 이에 기존의 『선조실록』은 그대로 두고 『선조실록』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 형태의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어 두 가지 형태의 실록을 후대에 그대로 보존하게 하였던 것이다.

  서인들이 주도한 『선조수정실록』은 우여곡절 끝에 효종대에 완성을 볼 수 있었다. 이 즈음에는 이미 김장생의 행장에 기록된 ‘십만양병설’이 공공연하게 유포되고 있었고, 서인들이 집권한 때였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당연히(?) ‘십만양병설’이 기록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이이의 졸기 또한 『선조실록』의 단 석자의 기록과는 확연히 다르다. 『선조수정실록』에서 이이는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을 지녔던 학자이자 정치가의 모습으로 그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이이가 죽은 후에 편당(偏黨)이 크게 기세를 부려 한 쪽을 제거시키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들 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이 생겨 사분오열이 되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는데, 이이가 평소 염려하여 먼저 말했던 것이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편의책(便宜策)들이 추후에 다시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백성들의 말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이이는 줄곧 국방 강화를 주장한 학자였다. 1584년 이조판서였던 이이가 병석에 누워서까지 변방에 대한 방어를 역설한 것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잘 드러난다. 이이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생긴 병 때문에 자리에 누웠다.

  선조는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는 한편,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어사로 관북에 가게 되자 이이를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되지 않으니 응하지 말 것을 청했지만 이이는 ‘나의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만약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역시 운명이다.’하고,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육조(六條)의 방책을 불러주었고, 서익이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정치가로서, 학자로서 최후까지 자신의 책무를 다하였던 이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위의 사례들을 볼 때 이이는 평소에도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구체적인 대책까지 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장생은 스승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고, 이것이 행장에까지 수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 ‘십만양병설’은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 노론세력이 조선후기 정치의 주도세력이 되면서,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한 이이의 탁월한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널리 선전되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양이 필요하였고, 동인의 영수 유성룡은 이이의 탁견을 무시한 무능한 정치인으로 격화되었다.

  결국 ‘십만양병설’은 구체적인 진실공방을 떠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서인들의 ‘동인 때리기’로 유효하게 활용되었던 점은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