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9년 정여립 역모사건 신병주(중세사 2분과)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요.’ 성리학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시대. 이러한 위험한 발언을 거침없이 했던 인물이 있었다. 정여립. 그는 16세기 후반기에 이미 왕정을 부정하고 오늘날의 공화정과 유사한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었다.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죽음으로만 그치지 않고 수많은 선비들을 죽게 한 정여립 역모사건의 장본인이다. 군주세습제 보다는 중국의 요·순·우가 선양을 한 것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정여립. 그러나 그의 사상은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급진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 혁명을 꿈꾸었지만 그 혁명은 착수하기도 전에 실패로 끝났고, 정여립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은 후 반대파에 의해 기록된 각종의 문헌들에 그는 대표적인 역적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논리와 보수적인 체제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분명 있었다. 당시에는 그를 시대의 반항아로 낙인찍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변화와 개혁을 꾀한 혁명아의 모습이 다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정여립 그는 반역자인가? 혁명아인가? 1. 정여립은 누구인가? 정여립(1546~1589)의 본관은 동래, 전주 출신. 첨정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로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다. 정여립은 어려서부터 무예나 활쏘기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도 두루 능통하였다. 문무를 두루 겸비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포악하고 잔인했다는 내용이 많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악행을 고자질한 여종의 배를 갈라 죽였다고 했을 정도이다. 15세 때는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을 일을 맡아보았는데 당시 아전들은 그의 부친보다 정여립이 업무를 처리할 때 훨씬 부담을 느꼈다고 했을 정도라고 하니 강한 기질의 소유자였음은 분명하다. 『연려실기술』에는 ‘여립이 기백이 굉장하고 말솜씨가 좋아서 입을 열기만 하면 시비를 불문하고 좌중들이 칭찬하고 탄복하였다’고 기록하여 그의 기백과 언변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정여립은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157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좌랑, 홍문과 수찬 등의 요직을 거쳤는데 정여립의 순탄한 관로에는 그의 자질을 일찍부터 주목한 이이와 성혼 등 서인(西人)들의 후원이 컸다. 정여립이 정계에 진출한 시기 조선의 정국은 서서히 붕당의 조짐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1575년(선조 8) 마침내 동인 김효원과 서인 심의겸을 수장으로 하는 동서분당이 이루어졌다. 기호학파의 학자들은 서인, 영남학파의 학자들은 주로 동인이 되었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좋든 싫든 한 당파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정여립에 대해 ‘총명하고 논변을 잘하여 오로지 널리 이치를 정리하는 것을 힘썼으며, 특히 『시경』의 훈고와 물명(物名)의 해석으로 자부하였다. 성혼과 이이 두 사람이 불시에 만나고 간혹 그와 논평하였는데, 그의 박학하고 언변이 뛰어남을 좋아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고 초기에는 성혼과 이이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정여립은 서인의 후원 속에 관직에 진출했으나,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는 이발·이길 형제 등 동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동인의 입장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강한 기질과 직선적인 정치 성향은 동인의 돌격장 역할을 맡기에 적합했다. 특히 서인의 영수 이이 사후에는 이이를 비판하는데 앞장서 서인들로부터 정치적 변절자로 인식되었다. 선조는 이러한 정여립을 배은망덕한자로 혹평하고 시골로 쫓아내 버렸다. 정쟁의 와중에서 정여립은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잠시 활동을 접었지만, 탁월한 학문 능력과 조직 장악력은 호남 일대에서 그의 명성을 모르는 자가 없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2. 카리스마와 지성을 겸비한 행동파 직선적이고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응하는 기질, 무예와 병법에 능한 활동가, 학문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 당시 지방사회에서 이만큼의 교양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카리스마형 인물은 흔치 않았다. 문무를 겸비한 정여립의 능력이 크게 빛을 발한 것은 1589년 전주부윤 남언경의 부탁으로 왜적을 물리쳤을 때이다. 남언경은 호남 지역에 왜구가 출몰해 위기에 처하자 지역사회에서 명망이 있던 정여립을 찾았다. 이때의 정황은 실록에 나타나 있다. 정여립은 잡술에 두루 통하여 감여(堪輿:풍수지리)와 성기(星紀:천문학) 등에 관한 서적을 중국에서 사다가 무리들과 토론하였고, 국가에 장차 임진왜변이 있을 것을 알고 배를 타고 갑자기 일어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 천민 중 용맹한 사람 등과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매월 15일 한 곳에 모여 활쏘기를 겨루었다. ... 정해년(1587)에 여러 고을에서 군사를 뽑아 올렸는데 전주부윤 남언경이 미숙하여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립을 청하여 군대를 나누게 하였더니 여립이 사양하지 않고 담당하여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군병이 모였는데 부서를 나누어 파견하는데 있어 하루가 못되어 마무리되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2년 10월 을해) 위의 기록에서 정여립이 병법과 무예, 인원 동원에 뛰어난 자질이 있었음이 나타나며, 무사나 공사 천민의 무리들을 이끌었다는 기록에서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그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여립의 이러한 자질은 반대세력에게 있어서는 주요한 공격거리가 되었다. 1589년 역모에 대한 고변이 있었을 때, 대동계 조직, 무장활동 등의 경력은 반대파들에게 정여립이 실제 역모를 꾀한 인물이었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정여립은 역모 혐의를 받은 직후 자결함으로써 기축옥사의 완전한 진실은 여전히 역사 속에 묻혀있지만, 그의 사후 정여립은 최고의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그가 자결했던 진안의 죽도나, 대동계를 조직했던 전라도 원평 등지에서는 모반자가 아닌 문무를 겸비한 영웅으로 이해하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고 한다. 과연 정여립 역모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사진 1)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전북 진안의 죽도 전경 3. 정여립 역모 사건, 그 진실게임 1589년(선조 22) 10월 2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연명으로 황해도 관찰사 한준에게 올린 보고서 한 장. 이 보고서는 이후 천여명의 선비가 역모에 관련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를 당하게 하는 정여립 역모사건과 그 후폭풍인 기축옥사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 밤 조정에서는 삼정승과 육승지·의금부 당상관 등이 참여한 비상시국 대책회의가 열렸다.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이 즉시 떨어졌고 의금부 도사가 체포의 밀명을 띠고 황급히 역모의 진원지인 황해도와 전라도에 급파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 사실을 감지하고 있던 정여립은 자신의 활동지인 전라도 진안의 죽도로 달아났다가 이곳에서 스스로 칼을 거꾸로 꽂은 채 목을 찔러 자살했다. 역모의 주모자인 정여립의 자살. 그러나 그것은 조선중기 사림 사회를 회오리 속으로 몰아가는 폭풍 정국의 시작일 뿐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1589년 10월 안악군수 박충간 등의 보고를 받고 황해감사 한준이 조정에 올린 비밀장계를 비롯한 정여립의 역모 사건 관련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정여립은 관직에 물러난 후 전주와 진안 등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체제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을 점차 규합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꿈꾸었다. 이른바 대동(大同)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여러 경로를 통해 그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알고 일거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기축년(1589년) 겨울 서쪽으로는 황해도, 남쪽으로는 전라도에서 일시에 병사를 일으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성을 직접 쳐들어가 무기고를 불사르고 조운 창고를 약탈하며 심복을 도성 요소에 배치한다는 것이 역모의 기본 시나리오였다. 이어 자객을 나누어 보내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거짓으로 교지를 꾸며 인근의 수령과 병사(兵使), 수사(水使)를 죽이며 언관(言官)을 사주하여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직시키고 그 틈을 타서 일제히 궐기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사진 2) 『선조수정실록』에서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한 부분 『연려실기술』의 기록처럼 정여립이 군사를 동원하여 서울을 점령하여 역모를 꾀한 것이 사실이었을까? 이것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있었을까? 정여립이 역모에 대한 고변이 들어온 직후 자살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당시에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정여립이라는 인물이 지니는 강한 캐릭터와 행적은 역모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우선 그의 학문과 사상에서는 당시의 국시인 주자성리학의 의리론에만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이를 적극 실천하였음이 나타난다. ‘잡술(雜術)에 널리 통했다’거나 ‘박람강기(博覽强記: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음)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 스스로가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요’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다. 나아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요’라는 중국 성현 유하혜의 말을 인용하여 세습되는 절대군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들 또한 ‘선생의 이러한 의논은 고금의 유현(儒賢)들이 아직까지 말하지 못하였던 것이다’고 하여 정여립의 사상이 보편적인 유학자들의 그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정여립은 사상적으로 당시의 주류적 흐름에서 이탈해 있었고, 국왕에 의해 낙향한 만큼 시국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 불만세력을 조직화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하층민과 무사들을 거느리고 대동계를 조직했다거나, 민간에서 ‘뽕나무에 말갈기가 나면 그 집 주인은 왕이 된다’는 말을 유포시키는 등 다양한 민심 선동책을 쓴 것은 이러한 그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서분당이 격화되면서 반대파인 서인 쪽에서 정여립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그의 선동가적인 면모를 보다 부각시켰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