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바다의 전설’이 되다.
의병의 항쟁과 함께 이순신을 대표로 하는 수군의 승리라는 국난 극복의 주요한 힘이었다. 1591년 4월 ‘준비된 장군’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다. 부임 직후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하여 각종 군기와 군사시설을 점검하고 해전에 능한 병사 및 선박을 확보하였다. 특히 왜란 직전에는 거북선 건조에도 힘을 기울여 4월 11일경 제작을 끝내고 선상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시험 발사하는 등 왜란 전부터 만일에 있을 전투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1. 바다에서 반격의 물꼬를 트다. 평양까지 한달음에 쳐들어왔던 일본군 제1군의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본의 수군 10여만 명이 또 서해로부터 옵니다. 대왕의 행차는 여기서 어디로 가시렵니까?” 그러나 기다리던 일본의 10만 대군은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가 없었다. 일본의 10만 대군이 서해를 돌아 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섬이 많아 다도해라고 불리는 남해! 이 넓지도 않은 바다에는 총 2,300여 개의 섬들이 촘촘하게 모여 있었으며, 해안의 굴곡마저 심했다. 방어하는 조선 수군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요새였던 것이다. 전라 좌수영 함대를 이끌던 이순신은 이 복잡한 바닷길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었다. 5월 4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어선) 46척을 이끌고 이순신 함대는 1차 출동에 올랐고, 5월 7일 옥포 앞 바다에서 30여 척의 일본 함대를 발견하고 26척을 격침시켰다. 조선 수군은 단 1명만 다친 완벽한 승리였다. 옥포해전은 패전만 거듭하던 조선군에게 처음으로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어 5월 29일에서 6월 10일까지 전개된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활용하여 대승을 거두고, 당항포 해전에서 연이어 승전보를 올렸다. 이순신 함대의 출동으로 바닷길을 통한 군수물자의 보급이 어려워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을 독려했다. 하루빨리 공을 세우려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마음이 급했다. 결국 다른 일본 함대들을 기다리지 않고 하루먼저 출발했다. 7월 7일 야스하루의 70여 척 함대는 견내량에 도착했다. 때마침 이순신 함대는 3차 출동을 나온 터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바깥 바다에 머무르며 지형을 살폈다. 포구가 좁아 판옥선이 서로 부딪칠 위험이 있고, 적이 육지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한산도 앞 바다로 일본군 함대를 끌어내기로 결정했다. (사진 1) 『이충무공전서』의 표지 2. 아!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이순신은 판옥선 5척을 견내량으로 보냈다. 나머지 배들은 견내량 입구 넓은 바다에서 기다렸다. 판옥선을 뒤쫓아 일본함대는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해왔고, 기다리던 이순신 함대는 학의 날개형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전투대형을 짰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즐겨 사용하던 학익진(鶴翼陣) 전술이다. 적의 함대가 날개 안으로 들어오면, 양쪽 날개를 오므리면서 적을 둘러싸고 총포를 쏘아 댔다. 화포의 명중률이 낮기 때문에 최대 효과를 거두기 위한 전술이었다. 바로 이때, 칼송곳으로 무장한 거북선 2척이 적의 함대를 뚫고 돌진해나갔다. 거북선이 사방에서 총포를 쏘아대자 적의 함대는 불길에 휩싸였고, 거북선과 부딪칠 때마다 적의 함대는 수없이 부서져 나갔다. 이어서 판옥선들은 적의 배를 들이받으며 공격을 펼쳤다. 이날 일본 함대는 73척 중 66척이 침몰되고 붙잡혔으나, 조선 수군의 군함은 단 1척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 전투가 바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이다. 이순신은 거북선과 함께 조선 수군의 주력선으로 쓰인 판옥선(板屋船)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한산도대첩에서 ‘학익진’을 구사하는 등 전술과 전략에 있어서도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승전을 거듭하였다. 유성룡은 그의 저서 『징비록』에서 한산도 대첩을 평가하면서 ‘일본은 본시 수륙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처내려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한번의 해전에 의하여 마침내 그 한 팔이 끊어져 버린 것과 다름이 없이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전라, 충청도를 보전하였고 나아가 황해도, 평안도의 연해지역가지 보전할 수 있었으며, 군량을 조달하고 호령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 것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과 같은 뛰어난 장군의 활약 이외에 조선 수군이 승리를 거듭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해전에 강한 해안 토착민이 조선 수군의 주력을 형성하였다는 점, 판옥선, 거북선 등 조선 군선(軍船)의 우위가 큰 몫을 하였던 것이다. (사진 2) 『이충무공전서』의 첫면 : 표지 디자인이 화려한 점이 눈에 띈다. 3. 조선 수군의 주력, 판옥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설적인 전함, 거북선. 거북선은 임진왜란 직전에 제작되었으며, 주로 돌격의 임무를 맡았다. “별도로 만든 거북선은 앞에 용머리를 만들어놓아 그 입에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송곳을 박았다.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다. 비록 적선 수백 척이 떼지어 있더라도 그 가운데로 돌진해서 대포를 쏠 수 있다.” 이순신의 말처럼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거북 등 모양의 지붕을 씌운 배로, 지붕 위에는 두께 2∼3mm 정도의 철갑을 덮었으며, 송곳을 위로 솟게 꽂아 적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노를 젓는 군사나 전투하는 군사 모두 안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판옥선보다 대포를 많이 설치하여 전후좌후 사방에서 포를 쏠 수 있었다. 용머리에서는 유황이나 염초를 태워 연기를 뿜어 적의 대열을 혼란시켰고, 포를 쏘기도 했다. 대략 150명 정도의 병사가 거북선에 타서 노를 젓고 공격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거북선이 훌륭한 군함인 것은 틀림없지만,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 수군이 보유한 거북선은 단 3척에 불과했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은 ‘판자로 만든 집’이라는 뜻이다. 판옥선은 1550년 을묘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개발되었다. 왜구들은 주로 배에 기어올라 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왜구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옥선의 갑판은 2층으로 만들어졌고 적들이 뛰어들기 어려웠다. 노를 젓는 병사들은 1층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으며, 전투하는 병사들은 2층 갑판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총포와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갑판 가운데에는 높은 장대가 있어 장수가 이곳에서 지휘할 수 있었다. 판옥선에는 모두 164명의 수군이 배에 탔으며, 총사령관이 타는 지휘선인 판옥대선은 크기가 더 크고 수군들도 194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깃발이 꽂혀 있어 각 배들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배에서 사용된 무기 성능의 차이 또한 영국 간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주요 요소였다. 조선의 판옥선과 거북선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고 견고했다. 당시의 대포는 발사 할 때 엄청난 반동이 생겼다. 육지에서는 반동을 땅이 흡수해주지만 배 위에서는 대포의 반동이 그대로 배의 몸체에 전해졌다. 그래서 배의 몸체가 약하면 대포의 반동으로도 부서질 위험이 있었다. 판옥선과 거북선은 두꺼운 목재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판옥선에는 대포 10문을 장착했고, 거북선에는 14문에서 최고 24문까지 대포를 장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함들은 가벼운 목재로 만들어져 대포를 장착할 수 없었고, 때문에 조총만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사진 3)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전라좌수영 거북선’ 4. 이순신, 바다의 전설로 남다.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일본군은 2,000여 척의 군함을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 수군 함대와 비교해보면 군함 수에서는 10대 1로 일본 수군이 크게 앞선 상태였다. 게다가 일본 수군은 왜구로 노략질을 할 때부터 항시 칼을 휴대하고 다녔다. 그래서 조선 함대에 올라타면 칼 한 자루만 갖고도 일 대 일 싸움을 벌여 순식간에 조선군 병사를 눌러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해상의 지리에 밝은 바다의 용사들이었다. 통일신라 때 바다의 왕자 장보고가 이끌던 1만 명의 수군의 주축이 전라도 사람들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수군은 이들의 후예였다. 일본 수군이 만만하게 볼 상대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은 기본 전술부터 달랐다. 조선 수군의 임무는 나라의 영토와 인접한 바다를 지키는 것이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섬이 많은 남해는 천혜의 바다 요새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먼바다에 나가 싸우지 않고 반드시 적을 꾀어내어 육지 가까운 섬들 사이의 좁은 바다에서 싸우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에 비해 일본 수군은 다른 나라의 영해까지 쳐들어가 싸우는 전술을 사용했다. 때문에 일본의 군함은 먼 거리 항해를 위해 가볍고 날렵하게 만들어져 속도가 빨랐지만, 배와 배가 부딪히는 전면 수중전에서는 불리하였다. 조선 수군이 일본 함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군은 창이나 활과 같은 고전적인 무기 외에도 대포, 박격포와 같은 화력이 강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이런 대포를 쏘아 일본 군함을 격파했고, 불화살을 쏘아 군함을 불태워 격침시켰다. 반면에 일본군은 재래식 무기 외에는 조총과 같은 가벼운 무기를 주로 사용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조총은 총열이 길고 가늠쇠와 개머리판이 달려있어 현대적 소총의 구본구조와 비슷했다. 최대사거리는 200 미터로, 임진왜란 당시 육지 전에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조총은 두꺼운 판자로 만들어진 조선 군함을 관통하거나 파괴시킬만한 위력을 갖지 못했다. 이처럼 조선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바다에서의 완전 승리로 패배에서 승리의 길로 도약할 수 있었다. ‘준비된 장군’ 이순신의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 지리에 밝은 전라도 인근 수군들의 헌신적인 활약, 판옥선과 같은 주력선의 우수성, 판옥선에 배치한 뛰어난 해상 무기, 이런 요소들이 함께 하면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때 ‘완벽한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전란 초기 육지에서의 참패로 최대의 위기에 몰렸지만 ‘바다’라는 공간과 그 바다를 수놓은 이순신의 명성으로 조선은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축복이었다고 해석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1597년 강화 협상이 깨지면서 전쟁은 다시 일어났다. 이른바 정유재란의 시작이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15098년 8월 일본의 지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 소식은 왜적을 크게 동요시켰다. 패주하는 일본군을 맞아 이순신은 노량 앞 바다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왜적을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던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끝끝내 지켰던 바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최후를 맞이하면서 영원한 바다의 전설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