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빛과 그림자
신병주(중세사 2분과)
광해군이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동남(東南)에 주력하여 회복을 도모해야 할 것이요 스스로 지킬 계책만을 세울 수는 없다.’하고 평안도에서 강원도로 나와 이천(伊川) 지방에 머물면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원근의 인사를 불러 모았습니다. 이에 산곡에 도망가 숨은 백성들이 그 부름에 응하여 구름처럼 모여들면서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하였는데, 열흘도 못되어 그 성세가 크게 떨쳤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하나의 보장(保障)이 되어 영남 이북을 장악하고 경기 지역을 통하며 황해의 인후(咽喉)를 막음으로써 충청ㆍ전라ㆍ경상도 사이에 호령이 막히지 않게 했으며, 소재처의 군민이 의병을 규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목숨을 바쳐 적을 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결국 나라가 재건된 것은 실로 여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선조실록』 권116, 선조 32년 8월 丁酉)위의 기록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백성들과 함께 적진을 누비면서 두터운 신망을 얻는 모습이다. 전란이 끝난 후 광해군이 어려운 후계자 지명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기반은 직접 전쟁터를 누빈 공이 매우 컸다.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며 의병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정인홍 등의 대북 세력은 목숨을 걸고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대북을 등에 업고 즉위한 광해군! 그러나 대북은 당시 정국에서 소수자였다. 조선시대 역사상 최초로 마이너러티의 위치에서 정권을 잡은 북인은 광해군의 취약한 왕통을 강화하고 기존의 정치판을 뒤엎는 개혁에 모든 승부수를 걸었다.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전란의 후유증 수습과 함께 북방에 흥기한 여진족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의 강구가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었던 시대, 광해군이 펼쳐나간 정책들.. 그 빛과 그림자를 살펴본다. 1. 광해군의 내치
『계축일기』와 같이 광해군에 의해 서궁에 유폐된 인목왕후의 궁에 출입한 궁녀들이 묘사한 광해군은 매우 부도덕하고 패륜적인 인물이다.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린 인조반정 후 아들 영창대군을 잃은 복수심에 치를 떨던 인목대비의 주변에 있던 궁녀가 서술했으니 당연히 그러한 입장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연 광해군의 인물됨을 반정을 성공시킨 세력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은 광해군의 죄악상을 무엇보다 ‘폐모살제(廢母殺弟)’에 맞추었다. 어머니를 유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이다. 또한 광해군이 주도한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는 전통적인 우방국인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저버린 비인륜적인 정책으로 ‘폐모살제’와 함께 광해군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키는 논리가 되었다. 그리고 광해군 후반에 추진된 궁궐 건축 사업이 백성들의 부담을 늘렸다는 것도 광해군의 죄상에 덧붙여졌다.
그러나 광해군에 대한 평가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많은 않다. 광해군은 패륜아로 낙인찍힌 그림자와 함께 전란의 상처를 회복한 빛이 존재하는 왕이기 때문이다.
영창대군의 출생 후 힘겨운 왕의 계승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렵게 왕위에 즉위한 광해군에게 놓은 가장 큰 현안은 전란의 상처 회복이었다. 광해군은 먼저 전쟁 중에 피폐된 토지의 회복과 민생의 부담을 덜어주는데 공을 들였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전쟁 상태로 회복하는데 주력하는가 하면 대동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16세기 이후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문제시되었던 공납제(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제도)를 개혁한 대동법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기득권층인 양반지주들의 부담은 증가한 반면 일반 서민들의 부담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기존에 호별로 부과하던 세금을 토지에 부과함으로써 땅이 많은 양반 지주들의 부담은 늘어난 반면 서민들의 부담은 훨씬 줄어든 것이다. 오늘날에 비유하면 부동산 등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 부담을 늘리게 하는 것과도 비슷한 방식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이 지주였던 양반 관료들의 저항이 거셌지만 광해군은 대동법 실시를 강행하였다.
이외에도 전란과 기근으로 질병이 만연하여 인명손실이 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세출의 의학자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여 이를 보급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허준은 선조가 임종할 당시 어의(御醫)의 직책에 있었던 관계로 한 때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광해군의 각별한 신임 속에 『동의보감』 집필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1613년경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동의보감』은 구체적인 질병의 치료방법 이외에 정신 수양과 섭생(攝生)까지 기록하여 병의 근원을 치료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동의보감』은 이후 중국과 일본, 베트남 등지에도 전파되어 조선인의 의학 기술의 수준 높음을 세계에 알렸다.
(그림 1) 동의보감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광해군은 전쟁후의 문화 복구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책들이 유실되자, 광해군은 『동국여지승람』, 『경국대전』, 『악학궤범』, 『삼강행실도』 등 조선초기에 간행되었던 서적들을 재간행하여 국가의 통치 자료로 활용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교화에 주력하였다. 특히 전란 후 전주사고만을 제외하고 지방에 설치한 외사고들이 모두 소실되자 사고(史庫)의 재건 작업에 착수하여 전라도 무주에 적산산성을 수축하고 이곳에 실록각을 새로 설치하였다.(그림 2) 1872년 무주부 지도에 그려진 적상산사고
(그림 3) 현재 복원된 적상산 사고『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등 국가의 주요 기록물들을 다시 산간 지역의 사고에 보관되기 시작하는 기반을 마련됨으로써 조선시대의 많은 기록 유산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2. 광해군의 실리 외교
광해군의 능력을 보다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외교정책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시기 북방의 국제정세는 변화의 조짐이 농후했다. 전통의 강국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내온 것이 부담이 되어 국력이 한층 약화되었으며, 이 틈을 비집고 압록강 북쪽의 여진족 내부에서는 누르하치가 중심이 되어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616년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누르하치는 ‘왕’이라 칭하였다. 역대로 중국을 위협하던 북방족이 현실의 강국으로 자리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종군한 경험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전통적 우방 명과 신흥 강국 후금 어느 한 쪽에도 기울이지 않는 외교정책이 전후 복구가 필요한 조선사회의 최선의 방책임을 절감했다.
1619년 광해군의 외교 노선은 시험대에 올랐다. 후금의 압박에 시달리던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빚도 있고 하여,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병을 결정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왕의 통역관으로서 신임이 두터웠던 강홍립을 따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도원수의 직책을 부여했다. 전쟁 상황을 보아 후금에 투항해도 좋다는 밀지와 함께였다.
광해군의 심중을 헤아린 강홍립은 명의 원군으로 전투에 잠시 참여하다가 곧바로 후금군에 투항한 후 ‘후금과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취지의 광해군 밀지를 전했다. 조정에서는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보지도 않은 채 오랑캐에게 바로 항복한 강홍립을 처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광해군은 끝내 강홍립을 보호하였다. 후에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은 강홍립을 일컬어 ‘강오랑캐’라 멸시했지만, 강홍립은 광해군의 국제 인식을 충실히 수행한 장군으로서 앞으로도 재조명되어야 할 인물이다.
조선이 자신들과 친교의 뜻이 있음을 확인한 후금은 조선 침공은 유보한 채 명나라 공격에 주력군을 파견함으로써 광해군대에는 국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후금과의 일촉즉발의 전쟁의 위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냉철하게 현실을 인식한 광해군의 외교적 안목이 큰 몫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내정과 외교에 걸쳐 광해군은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광해군과 그를 지원하고 있던 대북정권을 무너뜨린 서인 세력에게 그는 한낱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킨 패륜적인 국왕, 전통적인 국제적 신의를 저버린 인물, 자신의 탐욕에 눈이 멀어 무리한 궁궐 공사로 백성들을 고역에 빠지게 하고 종묘사직을 무너뜨린 군주로 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특히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고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 세력이 폐모살제와 함께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행위로 매도함으로써 광해군의 실리 외교는 조선시대 내내 그 빛을 보지 못하였다.
3. 소수 정권의 불운
광해군 정권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물러난 노무현 정권이 광해군 정권과 유사하다는 점이 많다는 견해가 제기되면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소수로서 권력을 잡은 점, 개혁을 국정의 최대 과제로 삼았다는 점, 실리 외교 노선 추구, 수도 천도(遷都) 시도, 과거사 바로잡기 등 실제 광해군대의 정국과 노무현 정권이 비견되는 사안은 많다. 특히 ‘코드 인사’로 대표되는 지나친 자파세력 중심의 정치 운영은 광해군대 ‘북인의 비극’을 언뜻 연상시키기도 한다.
내정과 외교에 걸쳐 광해군은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광해군 정권은 결국 보수세력이 결집한 ‘인조반정’에 의해 무너졌다. 광해군을 지지했던 북인 정권은 그 대표주자 정인홍과 이이첨이 처형되고, 정치세력으로서의 북인의 이름이 역사에서 지워질 정도로 혹독한 댓가를 치루었다.
광해군과 그를 지원하고 있던 대북정권을 무너뜨린 서인 세력에게 그는 한낱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킨 패륜적인 국왕, 전통적인 국제적 신의를 저버린 인물, 자신의 탐욕에 눈이 멀어 무리한 궁궐 공사로 백성들을 고역에 빠지게 하고, 종묘사직을 무너뜨린 군주로 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특히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고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 세력이 폐모살제와 함께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행위로 매도함으로써 광해군의 실리 외교는 조선시대 내내 그 빛을 보지 못하였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조(祖)’와 ‘종(宗)’으로 칭해지는 조선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군’이라는 왕자 시절의 호칭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의 묘도 ‘릉’이라고 칭해지는 다른 왕들의 화려한 무덤과는 달리 ‘광해군묘’로, ‘묘’라는 이름에 걸맞는 쓸쓸한 모습으로 거의 찾는 이 없이 방치된 상태로 남아있다. 연산군이야 검증된 폭군이므로 그리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광해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가 수행했던 강력한 전란 복구정책이라든가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통하여 조선이 불바다가 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했던 놀라운 국제 감각은 오늘날에도 재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계열강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현재에도 과거 광해군이 보여 주었던 능동적인 실리외교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