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병자호란(1636년)의 상처와 『박씨전』의 유행

BoardLang.text_date 2008.12.30 작성자 신병주

병자호란(1636년)의 상처와 『박씨전』의 유행


신병주(중세사 2분과)


  1627년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는 치욕을 당했지만 조선 조정의 강경 분위기는 여전히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러한 강경론에 기름을 끼얹듯이 청나라는 군신관계를 요구해왔고 조선 조정은 분노를 더 이상 감추지 않았다. 일전불사의 항전태세. 그러나 그것은 병력배치와 군사시설 확보라는 ‘실제’없이 오랑캐는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환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환상과 현실의 싸움, 그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1. 승산 없는 전쟁의 강행

1636년(인조 14) 4월 국세를 확장한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수도를 심양에 정하였다. 본격적인 중원 장악의 틀을 마련한 것이다. 야심에 찬 인물, 태종 홍타이지 역시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차근차근 중원 지배의 야망을 현실화시켜 나갔다. 명나라에 대한 총력전이 요구되던 시점, 청은 그 전 단계로서 조선에 군신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역사적으로 북방의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목표로 하던 시절 한반도의 국가는 대부분 중국과 우호적이었고, 중국 침략에 총력을 다 할 경우 한반도의 국가의 역습을 당할 상황이 여러 차례 재현되었기 때문이었다.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이 모두 이러한 경험을 거친 민족이었다. 청 역시 이러한 국제관계를 인식했기에 우호 협력을 맺든 강경책을 쓰든 조선을 일차적으로 회유 또는, 진압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군신관계 요구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청의 군신과계 요구는 조정을 격분시켰다. 전통적으로 오랑캐라 멸시한 나라에 대해 이미 형제관계는 맺었지만 이것도 무효로 할 판에 그들을 군주로 사대(事大)하라는 요구는 당시 조선의 정서에 결코 맞지 않았다. 그러나 감정 따로 현실 따로 인 법.. 힘과 국력이 문제였다. 이제 후금은 오랑캐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명을 대신할 수 있는 중원과 북방의 최고 강자로 성장한 나라였다. 함부로 그들의 요구를 물리친다면 ‘승산 없는 전쟁’의 재현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조정에서도 그 대책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오고 갔다. 대표적으로 김상헌을 중심으로 하는 척화파와 최명길을 중심으로 하는 주화파로 국론이 갈리게 되었다. 국서에 ‘청’을 쓰자고 했던 최명길은 윤집, 오달제 등 척화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이제 현실주의적인 주화파의 입장보다 목소리가 큰 척화론이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 또한 피할 수 없는 길이 되었다.

 2. 아! 남한산성

1636년 11월말 청 태종은 팔기의 군사가 집결한 심양에서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할 것은 선언했다. 총병력 12만 8천 여명 가운데는 몽고인 3만과, 한족 2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12월 2일 청군은 심양을 출발하였다. 선봉부대의 장수는 용골대였고, 기마병은 마부대가 이끌었다. 조선인 포로는 안내자겸 통역으로 활용하였다. 1636년 12월 8일 마부대가 이끄는 기병 6천여 명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조선의 국경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기마병을 중심으로 질풍같이 쳐들어 온 청군은 압록강을 넘은 지 5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별다른 방어 없이 우왕좌왕하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다. 그러나 청군의 선발대가 양화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강화도로 통하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강화도의 피난길도 끊어져 버렸다. 서둘러 피난간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청의 대군에 포위당한 조선 조정은 의병들의 참전을 기대했지만 그나마 용이하지 않았다. 강화도 피난길이 막혀 우왕좌왕하던 당시의 모습은 실록의 기록에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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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남한산성 지도

「대가(大駕)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화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 왔다. 양서가 아뢰기를,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오로지 변방을 굳게 지키고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적병이 강을 건넌 뒤로 어느 한 곳도 막아내지 못한 채 적을 깊이 들어오도록 버려둠으로써 종묘와 사직이 파월(播越)하고 거가(車駕)가 창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국가의 큰 변란이요, 신민의 지극한 고통이니,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인조실록』 인조 14년 12월 15일)


찬 바람이 유난히도 매서웠던 1636년 12월 15일, 청의 12만 대군에게 남한산성은 완전히 포위된 형세가 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을 둘러싼 청군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성안에는 1만 4천여 명의 인원이 약 50 여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다. 이후 조선과 청군 사이에는 여러 차례의 협상이 오고 갔다. 특히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그 곳에 있던 왕족과 신하들이 포로가 되면서 청과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 지게 되었지만 김상헌,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은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하면서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결국 최명길이 총대를 메고 국왕이 성을 나와 항복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지 옆에 있던 김상헌은 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찢어진 국서를 최명길이 다시 모아 붙이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마침내 항복 문서가 작성되었다.

  조선 역사의 최대 라이벌로 평가받고 있는 최명길김상헌. 최명길은 김상헌이 찢은 국서를 다시 붙이면서 “대감의 나라를 위한 충성은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나 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이 국서를 또 찢으시면 나는 다시 붙이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위기의 시기역사의 길목에서 서로 다른 정치 노선을 걸었지만 나라를 위한 충정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보인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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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3. 치유할 수 없는 상처들

1637년 1월 30일 아침, 산성에서의 격론 끝에 인조는 항복을 주장하는 주화파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한삼성을 내려왔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는 조선 국왕 인조가 빨리 성밖으로 나올 것을 재촉했다. 참담하고도 비통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한 채로 인조는 삼전도(지금의 잠실 석촌호수 부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청 태종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곧이어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 행해졌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군사의 호령에 따라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의 항복 의식을 마쳤다. 야사의 기록에는 당시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흥건히 맺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에 조선의 온 백성은 치를 떨고 분노했다.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항복을 한 삼전도의 치욕... 1636년 12월의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피난을 갔던 조선 국왕이 45일만에, 그것도 이전까지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이었기에 국왕, 신하, 백성 모두가 참담한 패배의식에 빠졌다. 전쟁의 여파로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청나라 노예시장에 팔려가는 등 패전국의 아픔을 톡톡히 겪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역사상 아니 우리 역사 전체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정치적, 경제적 손해는 물론이고, 백성들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패배의식과 함께 민족적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남겨 주었다. 청에게 포로로 이끌려 노예시장에 팔려 갔다가 겨우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還鄕女) 즉 ‘화냥년’이라는 치욕스러운 이름만 덧붙이게 되었다. 일부 양반들은 환향녀와의 이혼 요구를 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이들을 회절강(回節江 : 절개를 회복하는 강)에 목욕시키는 촌극도 벌어졌다.

최근에도 일제시대 정신대에 끌려가 일본군의 노리개가 된 정신대 할머니의 아픈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지만, 고려시대 몽고 침입 시기에는 어린 공녀(貢女)들이 몽고에 끌려갔고, 병자호란에도 많은 여성들이 끌려가 ‘화냥녀’라는 치욕을 받았다. 이처럼 전쟁의 패배는 여성들에게 더욱 큰 상처를 입힌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4. 『박씨전』 탄생의 배경

  조선 역사상 최대의 치욕을 겪은 이후 민간에는 병자호란을 시대배경으로 한 소설 『박씨전』이 널리 전파되었다. 국왕, 정치가 모두가 무기력하게 당했던 호란의 치욕적 패배에 죄절하고 있던 당시. 여성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박씨전』이 유행하면서, 현실에서 패한 전쟁은 가상의 공간에서나마 승리한 전쟁으로 미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 주었다.

『박씨전』은 전생의 업보로 인하여 추녀가 된 박씨가 허물을 벗는 이야기로 구성된 전반부와, 병자호란을 당한 후 영웅으로 크게 활약하는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박씨전』의 후반부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침입과 이에 대한 박씨의 활약이 주류를 이룬다.

  호시탐탐 조선침략을 꾀하던 호왕(胡王=청나라 왕)은 조선 침공에 앞서 박씨의 남편인 이시백과 명장 임경업을 제거하기 위하여 기룡대라는 여성을 첩자로 보내 이시백에게 접근시킨다. 박씨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기룡대를 쫓아버리자, 호왕은 용골대 형제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조선을 침략하게 한다. 신통력으로 역시 이 사실을 안 박씨는 조정에 이에 대한 대비를 건의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끝에 항복을 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큰 희생을 당했으나 박씨의 도움으로 그녀가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해 만든 거처인 피화당(避禍堂)에 모인 부녀자들만 무사하였다. 이를 안 적장 용홀대가 재차 피회당 침입을 시도하지만 박씨는 오히려 그를 죽이고, 복수하러 온 동생 용골대 마저 격퇴시킨 후 마침내 그의 항복을 받는다.

  용골대가 마지막으로 그의 형 용홀대의 머리를 고국에 보내 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나도 옛날 일을 생각하건대 용홀대 머리를 옻칠하여 남한산성에 패한 분을 만분의 일이나 풀리라. 너의 정성은 지극하나 각기 그 임금 섬기기는 일반이라 아무리 애걸해도 그는 못 하리라’ 하여 남한산성의 치욕을 반드시 갚고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현실적으로 패배한 전쟁 병자호란은 소설 『박씨전』을 통해 승리한 전쟁이 되었다. 조선의 장수들과 국왕까지 마음껏 짓눌렀던 청나라 장수들이 조선의 여걸 박씨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게 함으로써 현실의 전쟁에서 당한 치욕과 분노를 대신 풀어준 것이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나 조선이 당한 자존심을 통쾌하게 씻어 주고자 했던 조선인들의 열망, 이 열망은 추녀에서 절세미인으로, 평범한 여인에서 영웅여걸로 마음껏 변신하는 신비의 여인 박씨를 통해 조선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