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645년 4월, 소현세자는 독살되었는가?

BoardLang.text_date 2009.04.18 작성자 신병주

1645년 4월, 소현세자는 독살되었는가?


신병주(중세사 2분과)


1637년 삼전도 굴욕의 항복의 상징으로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세자가 8년 만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국가의 공식 기록인 실록의 기록에서 조차 독살의 의심이 갈 정도였고, 세자의 사후에 인조가 취한 조처들을 보면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들은 무척이나 많아 보였다.

 1. 귀국 후 두 달, 의문의 죽음

 1646년 4월 26일의 『인조실록』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세자가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죽었다. 세자는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 일찍이 정묘호란 때 호남에서 군사를 무군(撫軍)할 적에 대궐에 진상하는 물품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려고 힘썼다. 또 병자호란 때에는 부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도적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세자를 인질로 삼겠다고 협박하자, 삼사가 극력 반대하였고 상도 차마 허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즉시 자청하기를,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신이 어찌 그곳에 가기를 꺼리겠습니까.”하였다. ... 그러나 세자가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는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하는 군마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와 구마(狗馬)나 애완(愛玩)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는 대체로 그때의 궁관(宮官) 무리 중에 혹 궁관답지 못한 자가 있어 보도하는 도리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세자의 향년은 34세인데, 3남 3녀를 두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세자의 심양 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세자의 졸기에 대한 기록치고는 이례적으로 비판적인 내용이 많다. 세자 사후 두 달 후에 치루어진 졸곡제에 대한 기록은 이러한 비판적인 내용과 밀접한 관련을 보이고 있다.

「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날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雘: 고운 빛깔의 빨간 흙)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모집하여 땅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으므로, 왕(인조)이 그 사실을 듣고 불만스러워 하였다. ...
  세자는 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붉은 피가 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이 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 인조 23년 6월 27일)

위의 기록에서는 소현세자가 청의 심양에 있을 당시 청나라 사람들과 무역을 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내용과 귀국 후 곧바로 죽은 사실을 기록함으로써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상당한 관여를 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실록에서조차 약물 중독을 언급할 정도로 독살설의 의혹이 제기되었다.

실제 인조는 세자의 장례도 서둘러 마쳤고, 가장 중요한 후계 문제에 있어서도 특별한 결정을 내린다.

  당시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지만 인조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결국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후의 효종)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왕위 계승의 원칙에 어긋나는 방식으로서 인조가 소현세자를 극도로 불신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후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게 한 영조조차도 왕위는 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물려준 것만 보아도 인조의 조처는 파격적임이 분명하다. 왜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일까? 그 비밀의 열쇠는 소현세자가 보낸 심양에서의 8년 간의 생활에서 그 단서가 찾아진다.

 2. 심양에서 새롭게 눈을 뜬 세자

1636년 12월의 병자호란과 이어진 1637년 1월 삼전도에서의 굴욕은 이후 조선후기 정국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먼저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심양에 끌려가고 남녀노소를 포함한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청으로 잡혀갔다. 청에 대해 끝까지 전쟁을 할 것을 주장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나라에까지 가서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모두 처형되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칭하고 이들의 충절을 기렸지만,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오랑캐라고 인식하였던 청나라에 최고의 치욕을 당했다는데서 민족적 자존심은 여지없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냉정히 인식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즉 청나라를 과거의 야만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치, 문화의 강국임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국제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논의의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소현세자였다. 인조의 뒤를 이어 차기 대권주자 1순위로 꼽히던 왕세자가 이처럼 전향적인 생각을 하였던 것은 무척이나 주목된다.

부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소현세자는 초기에는 반청 감정을 강하게 표시하였다. 1637년 4월 10일 소현세자는 심양에 도착하여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客館)인 동관에 머무르다가, 5월 7일 황제가 세자를 위해 새로 지은 관소인 신관(新館), 즉 심양관으로 옮겼고 세자는 이곳에서 8년을 머물렀다.

  심양관에는 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한 배종신(陪從臣), 수행 원역(員役) 및 부속된 종인(從人)들까지 포함하면 상주인원은 500명이 넘었다. 세자는 이곳에서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모집하여 땅을 경작했고, 무역 활동을 하기도 했다.

  부인인 강씨도 적극적으로 세자를 도왔다. 그러나『인조실록』에는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으므로, 왕(인조)이 그 사실을 듣고 불만스러워 하였다.’고 기록했듯이 세자의 심향 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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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소현세자 가례도감의궤』: 1628년 소현세자는 강석기의 딸과 혼례식을 올렸다. 중앙의 가마는 세자빈의 가마이다.

심양 생활을 통하여 소현세자는 무엇보다 청나라의 놀라운 발전에 큰 자극을 받았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신생대국으로 거침없이 뻗어가던 청나라의 군사적인 측면과 함께 문화대국으로 성장해가는 잠재력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는 아담샬과 같은 선교사를 통하여 천주교 뿐만 아니라 화포, 망원경과 같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아담샬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에도 이러한 서구의 과학문명이 필요함을 절감하였으며, 서구 문명 수용에 개방적인 청나라 조정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예수회 선교사 신부로서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명나라 조정에서 인정받았던 아담샬은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면서 청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소현세자는 북경 남문 남천주당에 머물고 있던 아담샬과 자주 만나면서 새로운 서양 문명과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조선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화포와 천리경 등을 가져온 것도 이러한 의식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였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청나라는 이제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했다. 그러나 1645년 소현세자가 8년 만의 오랜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왔을 때 그의 귀국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청나라의 호의적인 입장과 청나라의 세자에 대한 신뢰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성한 소현세자는 이제 인조의 아들이 아니라 차기 국왕 후보였고 소현세자가 왕이 되면 인조와 서인 정권이 추진한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이념이 퇴색될 것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정의 관료들 대부분은 남한산성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를 현실의 군사대국, 문화대국 청으로 보지 않고 여전히 오랑캐로 인식하는 분위기였고, 따라서 청의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세자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조는 무엇보다 청이 자신을 물러가게 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경계하였다. 정통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쿠테타로 집권한 왕으로서 본능적으로 왕위 유지에 집착하면서 아들까지도 경쟁자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념적 갈등이 매우 심각했고, 왕위 계승의 경쟁자라는 점 때문에 상당한 근거가 있어 보인다. 조선 왕실에서 언급되는 독살설 중 가장 그 가능성이 높게도 보인다.

  그러나 최근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을 기록한 『심양일기』에 소현세자가 병을 앓은 내용이 나타나고, 심양에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동안의 건강 문제 등이 겹쳐 병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높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심양일기』에 의하면 소현세자는 1638년부터 질병이 잦아져 감기, 소화불량, 안질, 마비증세, 불안 습종(濕腫) 등의 질환으로 고생했음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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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심양일기』: 소현세자 일행이 청의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한 상황을 세자시강원에서 기록한 일기이다.

  독살이건 그렇지 않았던 간에 인조측이 소현세자의 죽음을 호재로 활용한 측면만은 분명하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쳐두고 서둘러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이제 최대의 정적이 된 며느리 강빈을 사사(賜死)시킨 것이 이러한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3. 강씨의 죽음과 소현세자 가문의 몰락

소현세자와 그의 부인 강씨가 귀국했을 때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지나치게 냉담했고, 그후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왕통도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넘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인조와 소현세자가 갈등의 골이 무척이나 깊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야사의 기록에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물건을 가져와 인조에게 내 놓자 인조가 벼루를 던져 세자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이들 부자는 정적에 가까운 관계였다.

소현세자는 청의 문물 수용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이러한 부분을 적극 실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심양에 갔던 부인 강씨는 이곳에서 많은 재물을 모으는 등 나름대로 새 시대에 눈뜬 세자빈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귀국 후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나아가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한 현실에 부닥치자 격렬히 인조에게 저항했다.

  죽음을 각오한 강씨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인조의 침실로 달려가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통곡하는가 하면, 맏며느리로서 국왕에게 올리는 조석 문안도 한때 중지해 버렸다. 분노한 인조는 강씨를 유폐시켰고 궁중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갈등의 끝은 왕세자빈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갈등의 골이 깊었던 어느 날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에 독이 든 사실이 발견되고 이것을 강빈이 사주했다는 혐의를 받고 결국에는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명도 이곳에서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는 등 소현세자 일가는 그야말로 참혹한 화를 당했다. 『인조실록』은 강빈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그녀의 강한 기질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소현 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옛날의 집에서 사사하고 교명 죽책(敎命竹冊)·인(印)·장복(章服) 등을 거두어 불태웠다. 의금부 도사 오이규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강씨를 싣고 선인문(宣仁門)을 통해 나가니,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의 뜻을 거슬려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숙의(趙淑儀)에게 죄를 돌렸다.」 (『인조실록』, 인조 24년 3월 15일)

  심양에서 청의 신문물을 보며 북학의 기운을 조선에 심으려했던 소현세자와 이어진 세자빈 강씨의 죽음, 그리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역사. 이것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갖는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사상적으로 북벌과 북학의 갈림길에 선 시기였다. 그 갈림길에서 북학 의지가 컸던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봉림대군이 즉위하면서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北伐)’이 국시(國是)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의 인질 생활 속에서 습득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과학기술과 문명의 수용을 통한 부강한 조선 만들기의 꿈. 그러나 그 북학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