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거역할 수 없는 명분, 효종의 즉위와 북벌

BoardLang.text_date 2009.06.19 작성자 신병주

거역할 수 없는 명분, 효종의 즉위와 북벌


신병주(중세사 2분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하인사장(何人斯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을 마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군졸은 갑옷을 입지 않아 갑자기 적을 만나면 화살과 돌을 막기 어렵다. 나무 방패를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하자, 훈련 대장 이완이 아뢰기를,
“나무 방패는 가지고 다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군인들이 각기 하나의 큰 무명 자루를 소지하였다가 급박할 때에 임해서는 흙을 담아 쳐들어오는 형세를 방어한다면 나무 방패보다 못하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찍이 들으니 명나라 장수 장춘(張椿)의 군대가 무명 자루를 소지하였다가 넓은 들판에서 오랑캐의 기마병을 만나면 흙을 자루에다 넣어 보루(堡壘)를 만들었는데 오랑캐 군사가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고 한다.”
(『효종실록』 효종 7년 10월 4일)


1. 뜻하지 않았던 왕의 자리, 그리고 북벌

위의 글은 10년 재위 기간 동안 오로지 북벌에 매진했던 효종이 주강에서 했던 발언이다. 북벌을 그렇게 외쳤으면서도 의외로 실록에서는 북벌의 준비에 대한 언급을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위와 같이 행간에서 효종의 의지를 살필 수 있을 뿐이다. 소현세자가 귀국했을 때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지나치게 냉담했고, 그후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왕통도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인 봉림대군(효종)에게 넘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인조와 소현세자가 갈등의 골이 무척이나 깊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야사의 기록에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물건을 가져와 인조에게 내 놓자 인조가 벼루를 던져 세자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이들 부자는 정적에 가까운 관계였다.

심양에서 청의 신문물을 보며 북학의 기운을 조선에 심으려했던 소현세자의 죽음, 그리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역사. 이것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갖는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사상적으로 북벌과 북학의 갈림길에 선 시기였다. 그 갈림길에서 북학 의지가 컸던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봉림대군이 즉위하면서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北伐)’이 국시(國是)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북학의 전도사 역할을 하려 했던 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부왕에 의해 생각지도 않던 왕의 자리에 오른 봉림대군, 그는 자신이 왕이 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왕으로 밀어준 선왕의 치욕을 대신 갚아야 한다는 것, 바로 복수설치(復讐雪恥:복수하여 치욕을 씻음)를 위한 북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효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 형인 소현세자와 인조의 갈등, 바로 북학과 북벌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었음을 인식하고, 자신이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왕 인조와 집권 서인의 이념인 복수설치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논리, 즉 북벌 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효종은 심양 생활에서 조선인 포로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청 황제를 따라 수렵에 나서면서 중국의 사정과 지형도 면밀 관찰했다. 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이러한 경험들이 북벌의 든든한 자산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청과 공식적인 평화협정을 맺고 있었고, 조선 내의 산성 수축 등 군사적 준비는 허용되지 않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북벌을 내세우는 것은 청을 자극하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북벌을 준비한 왕 효종의 일대기를 기록한 『효종실록』에도 의외로 북벌에 대한 논의가 거의 기록되지 않은 것도 이러한 현실 때문이었다.

  실록의 행간이나 효종이 대화를 나누었던 주요 인물들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북벌 의지가 굳게 배어나는 효종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조선시대 국가의 방향을 결정할 중대한 시기에 즉위한 국왕 효종. 그가 표방한 북벌의 이념은 실전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2. 북벌 추진의 허와 실

효종은 즉위 후에 김자점 등 친청파를 제거하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반청 척화파를 등용하여 북벌을 국가의 주도 이념으로 설정하였다. 특히 대군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불러들여 북벌의 이념을 널리 전파할 북벌의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맡기려 하였다.

  이와 동시에 효종은 중앙 상비군인 훈련도감을 강화하고, 북벌 추진의 중심 기구로 어영청을 설치한 후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삼았다. 실제 효종과 코드를 맞추며 북벌을 추진한 유일한 인물은 이완이었다.

  이완은 이후에도 관례적으로 공신이나 왕실의 친인척이 임명되었던 야전사령관인 훈련대장에 전격 발탁되어 현종 때까지 16년 동안 훈련대장을 역임하였다. 효종은 병자호란 때 참전 경험이 있고 평안도,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내면서 보여 준 이완의 능력과 친명반청적인 그의 성향이 북벌 추진에 긴요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고 이완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이완은 효종의 북벌 정책을 실천한 거의 유일한 장수였으며, 자신이 죽으면 효종의 무덤 인근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유언하기도 하는 등 철저한 효종의 사람이었다. 현재 이완의 무덤은 효종이 묻혀진 경기도 여주의 영릉(寧陵) 인근에 묻혀져 있는데, 죽을 때까지 효종과 북벌의 뜻을 함께 한 상징물로 남아 있다.

  이외에 효종은 훈련도감과 남한산성의 수비대인 수어청에 대한 군비 증강 사업과, 군량미 확보 등을 통해 효종은 북벌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송시열이나 송준길과 같이 효종이 기대를 걸었던 산림들은 북벌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내수(內修)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북벌의 추진은 효종의 고독한 사업이 되고 말았다.

  효종이 즉위 5년경에 발표한 교서에서 “지금 씻기 어려운 수치심이 있는데도 모든 신하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나에게 수신(修身)만을 권하고 있으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수신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토로한 것도 그만큼 북벌을 뒷받침해 주는 정치세력이 부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에 지친 백성들이 북벌에 회의적이었던 점도 북벌 정책의 큰 걸림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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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효종대왕어필』표지(@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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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효종대왕어필』(@신병주)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경험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북벌 준비를 위한 정부의 군비 증강과 재정 부담에 크게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훈련도감군은 모두가 월급을 받는 급료병으로 그 증원에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었고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3. 이루지 못한 꿈, 북벌

이미 멸망한 명나라를 위한 복수는 하루하루 생활이 급급한 백성들에게는 그 명분에서도 그리 큰 호소력을 갖지 못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중국의 형세는 명나라 잔존세력을 완전히 뿌리치고 청나라가 확고하게 중원의 지배자로 자리잡아가는 국면이었다.

  청나라의 감시 체제도 북벌 준비의 장애 요소로 다가왔다. 청나라측은 수시로 조선을 시찰하면서 군사력 증대를 억제하였고, 산성 수축 등 군비 증강 사업을 어김없이 감시하였다. 1659년 3월 효종은 승지와 사관을 모두 물리치고 송시열과 단독으로 면담하였다. 북벌을 어떻게든 실천하고자 위함이었다.

「송시열이 또 아뢰기를, “송효종(宋孝宗)이 당초에 큰일을 하려는 뜻을 품고 장남헌(張南軒)을 불 때에, 만일 전상(殿上)에서 만나 보면 혹시 엿듣는 자가 있을까 싶어서 뜰 가운데다 장막을 설치하고 그를 보았는데 좌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가 이와 같아야만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경의 병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서로 만나 보지 못해 늘 매우 답답하였다. 오늘은 자못 조용한 듯하니 경은 나가지 말라.”하였다. 상이 승지 이경억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승지가 먼저 물러가라.”하고, 또 사관과 환관에게 모두 물러가라고 분부했다. 그러고 나서 송시열 혼자 입시하였는데, 외조(外朝)에 있는 신하들은 송시열이 어떤 일을 말씀드렸는지 몰랐다.」 (『효종실록』 효종 10년 3월 11일)


당시 실록에서는 독대한 상황만 기록했지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만 송시열의 문집에서는 이날 북벌에 대한 긴밀한 논의가 이루어졌음을 증언하고 있다.

 「저 오랑캐들은 이미 망할 형세에 있다. 10년을 기한으로 군사훈련과 군장비, 군량을 비축하여 조선과 국민들이 일치단결하고 군사 10만 명을 양성하여 틈을 타서 명과 내통하여 기습하고자 한다.」 (『송자대전』 송서습유, 권7, 「악대설화(幄對說話」)

효종은 송시열에게 오랑캐가 반드시 망할 형편이라며 정예 포병 10만을 길러 공격을 시작할 작정이고, 세자는 이런 어렵고 위태로운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자신의 기력이 쇠하지 않는 한 10년을 기한으로 삼아 북벌을 추진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송시열은 북벌을 위해서는 내수(內修)가 필요하고 내수를 위해서는 학문에 전념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 이외에 더 이상 효종을 후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효종은 자신이 즉위하게 된 명분이 된 북벌의 실천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게 된다. 청나라의 계속적인 군사력 축소 압박내수에 치중해야 한다는 송시열 등의 의견,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사대부와 백성들의 소극적인 입장 등이 맞물리면서 북벌은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한 채 꿈으로만 끝난 것이었다.

  효종은 북벌을 위한 준비기구로 어영청을 설치하여 이완 장군을 어영대장으로 삼고, 송시열, 송준길 등과 같은 인물을 등용하여 북벌 이념의 메신저로 삼았지만 북벌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북벌의 실천을 위해 즉위했고 왕위에 오른 10년 동안 북벌만을 위해 매진했던 왕 효종. 그의 죽음과 함께 "중원을 정벌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씻을 것이다"라는 북벌의 꿈도 현실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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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조선효종영릉재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

효종은 재위 기간 내내 북벌 계획에 혼신의 힘을 쏟다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사인은 종기가 주 원인이었다. 종기의 독이 계속 오르자 의관이 침을 놓았으나 이것이 혈맥을 찔러 버렸던 것이다. 야심찬 왕의 마지막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신)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하였다.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후가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淸心元)과 독삼탕(獨參湯)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三公)과 송시열과 송준길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ㆍ사관과 제신(諸臣)들도 뒤따라 들어가 어상(御床) 아래 부복하였는데, 상은 이미 승하하였고 왕세자가 영외(楹外)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하한 시간은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 사이였다.」 (『효종실록』, 효종 10년 5월 4일)


  그러나 효종의 승하 이후에도 북벌의 사상적 이념은 조선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조선을 명나라의 계승자로 자부하면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멸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숙종 대에는 궁궐의 후원 깊숙한 곳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신종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제 북벌의 논리는 중화 문화의 중심은 조선에 있다는 ‘소중화사상’, 나아가‘조선중화사상’이 이념화되었다. 북벌은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논리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북벌의 이념에서 해방되어 북학 사상이 만개하기까지는 또 100여 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