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충신을 기리는 왕의 노래: 도이장가(悼二將歌)

BoardLang.text_date 2010.07.15 작성자 채웅석

충신을 기리는 왕의 노래: 도이장가(悼二將歌)


 

채 웅 석 (중세1분과)


 




主乙完乎白乎  (님을 온전케 하온)
心聞際天乙及昆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魂是去賜矣  (넋이 가셨으되)
中三烏賜敎  (몸 세우고 하신 말씀)
職麻又欲望彌阿里刺乃彼  (직분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可二功臣良  (좋다. 두 공신이여)
久乃直隱  (오래오래 곧은)
跡烏隱現乎賜丁  (자취는 나타내신저)     - 번역은 김완진의 견해에 따름 -




  이 「도이장가」『평산신씨계보(平山申氏系譜)』의 장절공행장(壯節公行狀)에 전하는 것으로서, 향찰로 표기되어 향가인지, 고려가요인지 논쟁되고 있는 작품이다.


예종 15년(1120) 10월 서경(평양)에서 팔관회를 개최하였을 때 왕이 관람하다가태조공신인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의 우상(偶像)이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몸소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신승겸과 김락은 927년 태조 왕건이 견훤과 대구 공산에서 접전을 벌이다가 위기에 빠졌을 때 목숨을 바쳐 왕을 구한 장군들이다.

a656e74004c135eb9191b164a0a37c16_1698397
<그림 1>『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1617년 간행)에 실린 신숭겸 장절도

팔관회에 김락과 신숭겸의 우상이 참가하게 된 사정은, 원래 태조가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국가적 종교행사이자 제전으로서 팔관회를 설치하고 신하들과 함께 즐길 때 전사한 공신들이 함께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우상을 만들어 참석하게 하고 춤추며 즐기게 하였던 데에서 연유했다고 전한다. 이 조치는 이후에 관례화하여 팔관회와 연등회에는 건국기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역대공신들을 상징하는 우상들이 참가했다. 그밖에도 왕이 베푸는 잔치에서 선대공신으로 꾸민 배우들이 공연하는 일이 많았던 듯하다. 예종 5년 기록에는 현종 때 거란 침입을 막는 데 애쓰다가 거란에 억류되어 살해당한 하공진(河拱辰)으로 분장한 배우의 공연이 있었으며, 이때에도 예종이 시를 지어 그를 기린 일이 있다.


예종대를 전후로 한 시기는 고려사회가 변화하면서 국가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정치도 불안하여 부왕인 숙종은 이자의세력을 숙청하는 정변을 통하여 즉위하였고, 예종이 즉위한 뒤에도 7년과 12년에 일단의 무리들이 종실을 앞세워 모반을 도모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나라의 중흥·쇄신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를 옮기거나 새 궁궐을 짓고 왕이 옮겨가서 새로운 법령을 선포하는 등의 비상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예종은 공리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던 부왕의 뜻을 이어 즉위 초기에 국력을 기울여 여진 경략에 나섰으나, 결과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9성을 반환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 뒤 후유증을 극복하고 손상된 리더쉽을 회복하기 위하여 문예군주·제세군주(濟世君主)로서 국왕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런 예종의 의도에 부합하여 국왕 측근세력으로서 활동한 것이 한안인(韓安仁)세력이었다. 그 핵심에는 예종이 동궁시절부터 가깝게 지냈고 개혁적 성향을 지닌 신진관료들이 많았다. 그들은 수탈을 일삼는 권귀와 그들에 빌붙어 비리를 저지르는 관리들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그런데 예종은 즉위 4년째인 31세 때에 왕자를 낳아 6년 뒤에 태자로 책봉하고 외척 이자겸에게 보도를 맡겼다. 대표적 문벌출신으로서 조정의 중신이었던 최사추도 이자겸의 장인으로서 크게 우대받아 왕이 가족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이처럼 예종이 이자겸을 파격적으로 대우하면서 태자의 보위세력으로 키운 것은 장차 왕위계승분쟁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실제로 그가 재위 17년 만에 죽고 태자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었을 때 한안인세력이 중심이 되어 유약한 태자 대신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를 막아낸 것이 이자겸세력이었다. 외척세력인 이자겸세력이나 국왕측근세력인 한안인세력이나 다 같이 예종과의 특수관계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전자가 문벌기반에서 권귀로서의 행태를 보이게 되자 양자가 대립하였다. 예종도 그런 대립관계를 감지하였고 왕의 리더쉽이 작동하는 동안 정쟁으로까지 폭발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지배층의 분열이 걱정되고 개혁이 필요한 상황 속에서 왕조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서경은 왕건이 훈요10조에서 고려왕조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라고 강조한 이래 왕들이 순주하여 왕조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10월 팔관회를 개최하는 것이 관례였다. 예종도 15년에 서경에 행차하였다가 팔관회에 참석하였고 신숭겸과 김락 두 공신의 우상을 보고 감개하여 이 노래를 지었던 것이다.

22094cb97bea101e3376728f71febfb3_1698397
<그럼 2> 신숭겸장군유적지내 표충단(소재지: 대구시 동구 지묘동, 사진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예군주를 지향한 예종은 신하들과 자주 창화(唱和)하고 풍류미를 즐겼다. 그래서 경박한 인물들과 음풍농월을 즐긴다고 비판받기도 했지만, 노래를 지어 자신의 정치적 생각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자신이 여론을 청취하려고 언로를 열어놓았지만 말하는 신하들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벌곡조(伐谷鳥)」라는 가요도 지었다.

「도이장가」는 죽음으로써 태조를 보위한 두 공신의 충절을 기리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충신을 표상으로 삼아 충성을 다하도록 신하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왕의 심정을 담은 노래였다. 앞서 하공진을 기리는 시를 몸소 짓기도 했음을 보았거니와, 신하들과 함께 하는 연회에서 왕이 그런 시가들을 직접 지어 보임으로써 신하들의 각성을 촉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