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고려, 후삼국 통일의 교두보, 낙동강을 장악하라 (3)

BoardLang.text_date 2008.02.15 작성자 홍영의

고려, 후삼국 통일의 교두보, 낙동강을 장악하라 (3)


                                                                                                          홍영의(중세사 1분과)


고려 통일의 분기점, 고창과 일리천 전투


공산전투 이후 후백제는 고려의 경상도 진출경로였던 소백산맥 이동지역을 공략하여 고려의 천안-청주-보은-옥천으로 이어지는 추풍령로와 광주-이천-음성-문경으로 이어지는 조령 및 이와 인접한 계립령로마저 차단하였다. 결국 고려는 경상도로의 진출을 위해 동쪽으로 훨씬 우회하는 죽령로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은 명주(강릉)의 토착세력인 왕순식으로부터 군사적인 도움을 받는 등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견훤은 929년(태조 12) 7월에 갑병(甲兵)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공격하여 왕건의 휘하의 성주 홍술을 전사시켰다. 견훤은 공격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고창군(안동)으로 진격하였다. 고려군은 12월에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된 고창지역을 구원하기 위해 죽령을 넘어 풍기와 영주를 거쳐 봉화방면으로 진행하여 예안진(禮安津)에 이르렀다.

왕명을 받은 유금필이 먼저 고창 인근의 저수봉(안동시 와룡면 서지동의 서남쪽)을 공격하여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군이 고창군으로 들어가도록 길을 열었다. 이때 재암성(載岩城)의 신라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귀순하였고, 왕건은 930년 1월 21일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견훤과 일전을 겨루어 크게 이겼다. 1월 25일까지 나흘동안에 8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때 후일 ‘삼태사(三太師)’로 불리우는 고창군 성주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함께 왕건의 승리를 도왔다.

0da59e1e48ab362e7cece729eb6f8ee1_1698397
김선평, 권행, 장길의 위패를 모신 안동 태사묘 전경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서비스 사진자료)

한편 견훤이 직접 참여한 이 전투에서 후백제는 8천의 병력이 전사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향후 군사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에도 견훤은 수군을 동원하여 예성강 인근을 공격하여 여러 포구를 장악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 싸움으로 안동 인근의 30여 군현이 고려에 복속했고, 동부 연안지방에서는 강릉으로부터 울산에 이르기까지 110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고려는 이 고창전투에서의 승리로 말미암아 공산전투 이후 낙동강 유역의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고, 통일을 이루는 분기점을 마련하였다.

통일의 전세가 고려의 왕건쪽으로 기울자, 신라 정부는 931년 왕건을 초청한다. 왕건이 불과 50기를 거느리고 경주를 방문하자, “옛날 견씨(甄氏)가 올 때에는 이리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오니 부모를 보는 듯하다”라며, 그를 치켜 세웠다. 경순왕 김부를 비롯한 신라세력들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져 갔다. 이후 935년(태조 18) 신라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해 왔다.

이렇게 고려가 유화책을 통하여 신라와 제휴하는 동안, 932년(태조 15) 왕건이 직접 일모산성(一牟山城 : 청원군 문의면)을 크게 격파하고 웅진 이북 30여 성을 접수하였다. 그런 사이 후백제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다. 935년 3월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을 신뢰하자, 신검 형제가 아버지 견훤을 쫓아내고 금산사에 가두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견훤이 왕건에게 귀순하여 신변을 보전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대고려 강경책을 견지하려는 내분이었다.

384760001566bb38dfd76f9b4b7b43bb_1698397
견훤의 울분이 서려있는 금산사 (ⓒ하일식)

그러나 3개월동안 금산사에 갇혀있던 견훤 나주로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부하자, 왕건은 유금필을 보내 나주로 보내 고려로 맞아들였다. 왕건은 축출된 견훤을 아버지격인 ‘상부(尙父)’로 부르며 극진하게 대우하였다. 태조는 견훤을 극진히 대우하여 민심을 모으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후백제의 내부 분열을 촉진시켰다. 936년(태조 19) 2월 순천에 있던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朴英規)가 고려에 항복해왔다. 박영규는 사람을 보내 태조가 후백제를 치게 되면 내응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936년 6월에 견훤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왕건은 후백제 신검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다. 우선 태자 무(武 :혜종)와 장군 술희(術希)를 시켜 보병과 기병 1만을 천안군으로 보내고, 9월에는 친히 3군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가서 병력을 통합하여 일선군(一善郡 : 선산)으로 진군하였다.

고려군 4만 3천명과 명주의 왕순식이 지휘하는 마군 2만과 유금필이 지휘하는 북방계 9천 9백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연합군 4만 4천명 등 8만 7천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일선군의 일리천(一利川)에서 후백제와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고려의 대군이 북을 울리며 전진하자, 후백제의 효봉·덕술·경술·명길 등이 고려의 군세(軍勢)가 굉장한 것을 보고 사기가 떨어져 투구를 벗고 창을 던져 버린 다음 왕건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이 싸움에서 후백제의 장군들을 비롯하여 3천 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고려군은 계속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황산군(논산)에까지 이르렀다. 일리천 전투(一利川戰鬪)에서 대패한 신검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닳고 아우 양검·용검과 관료를 내리고 나와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렇게 약 50년에 걸친 후삼국시대가 종막을 고함으로써 고려는 완전한 민족 통합을 이루는 통일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