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의 꿈은 사라지고... 후백제 멸망의 원인
김갑동(중세사 1분과)
후백제는 900년부터 936년까지 36년 동안 유지된 국가이다. 후백제 견훤 정권은 사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신라의 공식적인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외교적인 전략 면에서도 고려의 왕건을 앞질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역사 속에 사라져 버렸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견훤의 출신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백제 지역 출신이 아니고 신라 지역 출신이었다. 견훤은 본래 상주 가은현(지금의 경북 문경군 가은면)의 농민출신이었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광주 북촌 출신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것은 그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지역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퍼뜨린 설화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장성하면서 신라의 군대에 들어가 서남해안을 지키게 되었다. 여기서 실력을 키운 그는 무진주(광주)로 진출하였다. 이어 완산(전주)까지 진출한 그는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900년).
이렇듯 그는 원칙적으로 신라의 군인출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권력과 군사적 기반은 신라의 공병(公兵)들이었다. 거기에다 일부 지식인들과 광주, 전주 지역의 호족들도 참여하였다. 견훤 밑에서 주로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는 6두품 계열 최승우와 매곡성(충북 회인)의 성주 공직, 승주의 박영규 등이 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한계로 작용하였다. 견훤은 군인출신이었기 때문에 큰 개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원래 군대는 체제를 유지하고 옹호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도 무력은 갖고 있었지만 군인으로서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백제의 부흥을 표방했으면서도 실제로는 신라의 관등(官等)과 관부(官府)를 그대로 씀으로써 새로운 국가 건설을 바랬던 민중들의 요구에 부응치 못하였다. 이는 새로운 사회를 열망했던 민중들은 물론이고 6두품이나 호족들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견훤 및 금강과 그 아들 신검과의 대립과 갈등이 멸망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견훤의 큰 아들 신검을 비롯한 양검, 용검 등과 넷째 아들 금강이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권력쟁탈전을 벌이다가 결국은 멸망하였다. 이들 양파는 여러면에서 그 성격이 달랐다. 신검, 양검, 용검 등 신검계의 외척세력은 주로 광주(光州) 지방의 호족세력으로 견훤정권 전반기에 정권을 잡았고 대고려전(對高麗戰)에 있어 적극적, 주전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강계의 외척세력은 전주 지방의 세력가로 견훤 정권 후반기인 930년 이후 집권하였다. 그리고 대고려전에 있어서 소극적,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상호 이질적인 집단의 갈등과 대립이 후백제 멸망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태조 17년(934) 운주(홍성) 전투의 패배도 후백제 멸망의 한 요인이었다. 태조 13년(930) 고창군 전투의 패배로 타격을 입기는 했으나 견훤군은 건재하였다. 수군 공격으로 고려의 수도 개경 근처까지 쳐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태조 17년(934) 운주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후백제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내분이 일어나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 계열과 넷째 아들 금강 계열의 갈등․대립이 극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는데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군대지휘관 출신으로 태조 10년(927) 신라의 경애왕을 죽였던 것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신하로써 왕을 죽였다는 반역의 혐의를 쓰게 된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반역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되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기에 당대의 왕건이나 후대의 사가들도 그 점을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태조 10년(927) 공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후인 고창군(안동) 전투에서 패배한 요인도 거기에 있었다. 고창군 지역의 토착 호족들이 신라 왕을 죽인 견훤을 외면하고 신라를 구하려다 목숨까지 빼앗길 뻔한 왕건을 도와 주었던 것이다. 이 점이 후백제 멸망의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백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태조 18년(935) 6월 견훤의 고려 귀부에 있었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이 이곳을 탈출하여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하면서 상황은 극도로 반전하였다. 견훤이 귀부한 지 4개월 만에 신라의 경순왕이 귀순할 뜻을 밝혀왔고 다음 달에 신라를 들어 고려에 바쳤다. 이듬해인 태조 19년(936) 2월에는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귀순하여 유사시 내응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견훤은 신검을 토벌하자고 왕건에게 요청하였다.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왕건은 드디어 대군을 동원하여 일이천(一利川 : 경북 선산)에서 신검과 전투를 벌였다.
후삼국 쟁란기 최후의 승자 왕건 (개성 박물관에 소장된 왕건동상)
왕건은 노쇠한 견훤을 전장에 데리고 가 후백제의 몇몇 장수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또 이들로부터 신검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어 대승을 거두었다. 여기서 패한 신검은 박영규의 내응으로 수도로 가지 못하고 황산군(黃山郡 : 충남 논산군 연산면)으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패하여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견훤의 고려 귀부에 대한 영향 때문이었다.
신검을 토벌한 후 견훤은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로 가지 않았다. 개태사(開泰寺) 자리에 있던 사찰에서 머무르다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무덤은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이 보이는 은진현(恩津縣)에 쓰도록 유언하였다. 차마 죽어서도 출생지나 후백제의 수도로 갈 수 없었다. 자신이 건국한 후백제를 자신이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견훤릉으로 전해지는 무덤 (충남 논산에 위치)
그러자 왕건은 견훤이 죽은 절이 후백제 부흥의 정신적 중심지가 될 것을 염려하여 이를 허물고 새로이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그 때문에 개태사의 삼존불상은 거대하고 무사같은 모습을 띄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견훤의 무덤이 후백제 잔존 세력의 또 다른 중심지가 되자 광종은 은진현에 관촉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미륵상을 건립하였다. 후백제의 잔존세력을 위압적으로 무마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후삼국 시대 걸출한 영웅의 하나로 등장하였던 견훤은 비운의 최후를 맞이하였다. 35년에 이르는 집권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일종의 장기 집권이었다. 일찍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자신이 건국한 국가를 스스로 허물게 되었다.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