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이 쌍기를 만났을 때 한정수(중세사 1분과) 그들의 만남과 짧은 기록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때로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결과론적으로 필연이 되기도 한다. 만남은 서로를 변화시키며, 나아가 인생 자체를 바꾸기도 하고 그가 속한 사회에 파장을 주기도 한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광종(925-)과 쌍기의 만남은 956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쌍기는 후주(後周 ; 951-959) 사신단의 일원이었다. 당시 광종은 32살로 재위 7년째를 맞고 있는 때였다. 쌍기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광종과 비슷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이들의 첫 만남은 후주의 세종이 광종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 태사(檢校太師)로 책봉하기 위해 장작감(將作監) 설문우(薛文遇)를 보냈을 때 궁궐 안 책봉 의식이 치러지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몰랐다. 광종은 사신단의 일원에 대한 명단을 받았으나 그들 개개인에 대해서까지 파악하지는 않았다. 설문우 등 사신단은 후주로의 귀국길에 올랐으나 여기에 쌍기는 포함되지 않았다. 쌍기는 오랜 사신 여정 등으로 병에 걸렸던 것이다. 쌍기가 병에 걸리고 그러한 쌍기를 고려의 신료들이 찾아보고 하는 과정에서 쌍기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 조정에도 알려졌다. 광종 역시 사신단으로 왔던 후주의 신하가 돌아가지 못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병의 차도에 대한 관심과 들려오는 쌍기의 학식에 대한 호기심 등으로 마침내 그를 불러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이러한 광종과 쌍기와의 만남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비판적으로 그 상황을 그리고 있다. 광종 7년(956) 봉책사(封冊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와서 병으로 머무르다가 병이 나으매 광종이 그를 불러 대화하니 뜻이 맞았다. 광종이 그 재주를 사랑하여 후주에 표를 보내 신료로 삼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등용하게 되자 갑자기 원포(元浦)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순서를 넘어 옮기고 한 해도 안 되어서는 문병(文柄)을 잡게 하니 당시의 여론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다. 9년에 비로소 과거제도 설치하기를 건의하여 드디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시(詩)ㆍ부(賦)ㆍ송(頌)ㆍ책(策)으로써 진사(進士) 갑과(甲科)에 최섬(崔暹) 등 2인과 명경과(明經科)에 3인과 복업과(卜業科)에 2인을 뽑았다. 그 뒤 여러 번 공거(貢擧)를 맡아 후학(後學)을 권장하니 문풍(文風)이 비로소 일어났다. 그림 1) 『고려사』 열전에 기록된 쌍기의 활동, 그러나 한국사 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분량은 매우 적다. 쌍기와 관련한 열전의 기록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다만 쌍기의 아버지 쌍철이 광종 10년에 아들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 이외에는. 광종과 쌍기의 만남, 그 만남이 만들어낸 변화는 기록만큼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과거제의 시행은 'Culture Shock'라 할 만큼의 것이었고 하나의 관료제 등용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과거제라는 인재선발 방식의 시행을 이 둘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으로만 치부한다면 글의 서두에서 말한 필연성이라는 전제가 무색해진다. 그만한 쌍방의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조건만남’이라 하겠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광종의 글로벌 코리아 추구 태조는 즉위하면서 관직을 나누어 설치하고 여기에 유능한 인재를 근무토록 하고자 하였다. 또한 현명하고 어진 인재를 뽑아서는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태조대의 노력으로 고려왕조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신라의 귀부로 인한 무혈 통합과 그 여력을 바탕으로 후백제를 일리천전투에서 최후로 꺽으면서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그림 2ㆍ3) 현 개성에 남아 있는 성균관. 고려시대 국학이자 인재 교육의 산실이었다. (사진 : 정학수 제공) 통일을 이룩한 고려왕조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려왕조는 혈연과 친족에 기초한 골품제적인 신분질서를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왕조 운영을 통해 백성을 안정시켜야 했다. 정치ㆍ경제적 자립을 시도하면서 자위적 군사력을 갖춘 각 지역의 호족세력을 왕조질서로 끌어들여야 했다. 하지만 태조 사후 호족과 외척들의 준동으로 몇 차례 고비를 맞았다. ‘왕규의 난’이나 혜종에서 정종, 정종에서 광종으로 이어지는 왕위의 형제계승 등은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광종의 즉위 후 서경 및 충주 호족세력이 가졌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은 안정을 찾아갔다. 광종은 고려의 역사적 사명을 마음에 두면서 새로운 방식의 통치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중국의 상황은 어땠을까? 후량ㆍ후당ㆍ후진ㆍ후한ㆍ후주의 오대와 전촉ㆍ후촉ㆍ오ㆍ남당ㆍ민ㆍ초ㆍ형남ㆍ남한ㆍ오월ㆍ북한의 십국이 난립하고 있어 매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들 왕조들에 속해 있던 지식인층들은 매우 불안해하였다. 전란의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고 이들 중 일부는 보다 안정된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태조대 오월국의 문사인 추언규와 박암 등의 귀부가 이를 대표하며, 《송사》 고려전에서는 중국계 귀화인의 규모에 대해 고려의 왕성에 화인 수백이 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민인(閩人)이 많다고 하였다. 그만큼 고려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도피처가 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광종과 쌍기의 만남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광종은 즉위하면서 『정관정요』라는 당태종의 제왕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태조가 추구한 천명을 받아 백성을 위해 통치한다는 천명민본사상의 대의를 품고 있었다. 광종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추진력 즉 정치세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구성원을 얻는 데에는 단순히 충성도나 인품, 신분에 따른 관료 선발 기준으로는 어려웠다. 또한 태조대부터 최언위나 최응, 박유, 최지몽, 최은함 등 많은 문인지식인층들이 귀부하였으나 이들만으로는 통일 이후 왕조 운영을 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광종대에 주어진 정치 목표는 첫째 강력한 왕권의 기반을 닦고 둘째 합리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인재 교육과 선발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광종은 국내의 지식인층만이 아닌 국제적 안목을 갖춘 인재의 특채를 통해서라도 이를 이루고자 하였다. 높은 관직의 제수와 아름다운 부인, 그리고 저택을 내림으로써 고려 왕실에 필요한 인재를 부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른바 광종의 글로벌 코리아는 이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과거제 첫 시행을 시작으로 3회의 과거를 주재한 후주 출신 쌍기와 광종대부터 성종대까지 모두 11회의 과거를 주재하여 인재를 선발함으로써 과거제 운영을 안착시키는데 공헌을 세웠던 오월 출신의 왕융 등이 대표적 인재라 할 수 있다. 한편 쌍기는 왜 고려에 남아 광종의 정치를 도우고자 했을까? 쌍기는 광종의 간곡한 부탁을 받으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고려에 남는다면 그에게 이로운 점은 무엇일까? 앞날은 어떠할까? 이런 생각을 주로 하였을 것이다. 그의 입장을 볼 때 일단 고려에 남아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이로웠다. 후주의 정치적 상황은 앞날이 매우 불투명했고, 자신이 돌아간다고 한들 어떤 지위가 보장될지 몰랐다. 그런데 고려의 광종이 최상의 대우와 연봉, 저택, 부인 등등을 보장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고려에 남아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선택을 하였다. 이것은 훗날을 위해서도 그에게는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고려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명성을 얻으면 귀국하게 될 때 금의환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광종과의 만남 이후 광종 12년 지공거가 되어 진사 7명, 명경 1명을 뽑았다는 것이 『고려사』에서 전하는 쌍기 관련 마지막 기록이다. 그 후의 행적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런데 광종 12년 이후 쌍기의 행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기록이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보이고 있다. 즉, 고려의 과거제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치윤은 자신의 견해로, “고려의 경우는 광종 7년에 후주인 쌍기가 책사를 따라 나왔다가 9년간 머물러 있으면서 비로소 건의하여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고 하였다. 이 대목을 보면 그가 9년간 머물러 있다가 송의 건국 이후 귀국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림 4)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실려 있는 쌍기 관련 기록. ‘從冊使來 留九年’이라 한 기사가 분명히 보인다. 광종 7년 이래 9년간 머물렀다면 광종 16년이 된다. 특히 광종 16년 전 해인 15년에는 송에서 책명사절이 왔으며 12월부터 송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또한 『고려사』에서 광종 16년의 기사를 찾아보면 2월에는 왕태자 등을 책봉한 기록과 대승 내봉령 왕로(王輅)를 송에 보내 방물을 보냈으며, 송 태조가 왕로에게 작위를 내리는 부분이 있다. 만일 한치윤의 기록을 따른다면, 쌍기는 15년에 왔다가 돌아가고 있는 송의 책명사 일행을 따라 돌아갔던지 아니면 왕로를 수행하여 돌아갔을 가능성이 있게 된다. 물론 이 가능성 외에도 쌍기는 광종 말년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활동이 종식을 고했을지 모른다. 혹은 광종 사후 경종 초 구신들에 의한 복고적 정변에서 화를 입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국내 및 중국 정세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던 그가 정치적 희생을 당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한치윤의 설명대로 송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는 오월국 출신 왕융이 맡았던 것이다. 어쨌든 광종은 쌍기를 중심으로 한 중국계 투화인들을 적극 초빙함으로써 당시 국제적 감각을 익히고 왕조 운영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상징적인 것이 과거제의 시행이었다. 쌍기는 이렇게 얘기할지 모른다. 광종을 비롯한 고려 사람들이 이미 잘 차려놓은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만을 올려놓은 것에 불과하다라고. 하지만 이러한 만남이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영광의 만남 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글로벌 코리아의 어두운 면 사람들은 차별대우를 무진장 싫어한다. 물론 능력에 따라 대우를 달리할 수 있다. 이렇게 공감은 하면서도 일단은 거부감을 갖는다. 왜 특별 대접을 해야 하는 데라고. 그리고 되묻는다. 자신의 능력과 가치, 처지와 비교하면서 도대체 특별대접 받는 인간들, 얼마나 잘 났는지, 그리고 잘 하고 있는가라고. 글로벌 코리아를 추진한 광종의 중국계 초빙 정책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왜 꼭 중국계 투화인들이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또 그들을 위해 고려인들이 희생을 해 가면서까지 대접을 해야 하느냐, 진짜 광종의 글로벌 추진에 맞는 인물들인가, 제대로 일은 하는가 등등 회의적 비판이 있었다. 서필은 성종대 거란과의 외교담판으로 유명한 서희의 아버지였다. 그는 광종에게 중국계 투화인에 대해 광종이 신료의 저택 및 딸을 골라 주어 후대하자 자신의 처소 역시 가져가서 그들에게 줄 것을 청하였다. 이를 듣고 광종이 반성하였다고 『고려사』 열전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서필의 경우 광종의 이 한인투화책에 대해서는 그렇게 본질적인 비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왕권으로 신료의 제택을 빼앗아 주는 광종의 방식에 대해 비판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조정적평과 시무28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한 최승로는 달랐다. 이 당시의 정황에 대해 최승로는 오조정적평에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쌍기가 임용된 이래 무사를 숭중하여 은례가 지나쳤고 인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빨리 진급하여 2년도 채 안되어 경상(卿相)이 되는 일이 있었다 하였다. 지혜나 재주가 없는 중국계 인물들이 다투어 투화하여 이들을 대접하느라 국정이 제대로 이루어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고려사』 세가 광종편에서 역사를 기록한 사관의 평에도 이는 잘 나타난다. 즉, 광종이 즉위 초에는 신하를 예로 대하고 정사를 공명하게 하며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보아 살피고 선비들을 존중하며 밤낮으로 힘써 다스렸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중반 이후로는 참소를 믿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으며 불법을 지나치게 신봉하고 사치하여 절제함이 없었다고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종대의 역사에 대한 총평을 남긴 이제현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광종과 쌍기의 만남을 정리하였다. “광종이 쌍기를 등용함은 현명한 사람을 씀에 유(類)를 가리지 않았다 할 만한 것인가. 쌍기가 과연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어찌 임금을 능히 착한 길로 이끌지 못하고 참소를 믿고 형벌을 함부로 하지 않게 못하였을까.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를 취한 것은 광종이 고상하고 바른 문화로써 풍속을 교화하려던 뜻이 있었음을 볼 수 있으며, 쌍기가 또한 그 뜻을 따라 그 아름다운 일을 성취하게 하였으니 보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오직 곁만 화려한 문(文)을 내세워 후세에 큰 폐단을 남겼다.” 화려한 만남과 성취 뒤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그늘도 있는 법. 이제현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림 5) 광종의 헌릉 전경.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이다. 경사진 능선을 따라 조영되는 고려 특유의 왕릉 조성방식이 눈에 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