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거제도 속으로] 출세의 사다리인가? 배움의 가시밭길인가?

BoardLang.text_date 2013.10.10 작성자 박현순

조선의 과거제도 속으로 #1



출세의 사다리인가? 배움의 가시밭길인가?


박현순(중세2분과)


   중국 과거제를 연구한 한 학자는 과거를 ‘출세의 사다리’라고 일컬었다. 중국 전통 사회에서 과거가 사회 계층 이동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축약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반면 다른 학자는 과거를 ‘배움의 가시밭길’이라고 일컬었다. 극심한 경쟁을 뚫고 급제하기까지의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두 학자는 과거의 서로 다른 측면에 주목하였다. 이 두 측면을 통해 과거가 지닌 양면성이 잘 드러난다. 과거는 급제한 사람에게는 ‘출세의 사다리’가 되지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배움의 가시밭길’이었음에 틀림없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노년에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로 명성을 얻었고, 청년시절에도 전도유망한 청년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그는 노년에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했다.


 

“내가 과거에 응시하기는 하였으나 처음에는 붙고 떨어지는 데 연연하지 않았다. 스물네 살 때 연달아 세 차례나 떨어지고도 낙담하지 않았다. 하루는 집에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와서 ‘이서방(李書房)’이라고 불렀다. 나를 부르는 것이라고 여기고 천천히 누군지 살펴보니 늙은 종을 부르는 소리였다. 이에 탄식하여 ‘내가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서 이런 욕을 당하는 구나’ 하고 잠깐사이에 합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거 시험이 사람을 동요하게 하는 것은 매우 두려워할 만하니, 그대들은 경계하라.”[김성일,『학봉전집』학봉속집 권5「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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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퇴계 이황의 진사시 초시 합격 답안지. 부(賦)와 시(詩)에서 각각 이하(二下)와 삼하(三下)의 점수를 받아 일지일(一之一), 곧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한국국학진흥원 홈페이지 제공



노년의 이황은 주자성리학의 대가로 과거 공부보다는 자기 수양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여느 청년들처럼 매번 시험을 치고 떨어지는 과정을 되풀이하였고, 빨리 과거에 합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이황은 스물여덟 살에 진사가 되어 첫 번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서른넷에 문과에 급제하기까지 다시 육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의 수험 생활은 14-5년이나 계속되었다.


   조선의 과거 역사에서 가장 큰 영예를 안은 인물은 아홉 번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린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다. 이이는 스물아홉 살 때인 명종 19년(1564)에 생원`진사시와 문과를 한꺼번에 합격하였다. 게다가 이해에 치른 생원`진사시 초시와 회시, 문과 초시`회시`전시 등 일곱 번의 시험 중 여섯 번 장원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전무후무한 쾌거였다.


이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이른 나이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그 역시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다. 스물한 살 때는 식년시 문과 초시 한성시에서 대책(對策)으로 장원을 했지만 회시에서 떨어졌다. 스물세 살 때는 유명한 ‘대천도책(對天道策)’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을 하고도 전시에서 떨어졌다. 그는 스물아홉 살 때 생원`진사시와 문과를 한꺼번에 합격하기까지 계속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아홉 번 장원에 빛나는 이이지만 그에게도 과거 합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7세기 전반 김령(金坽, 1577-1641)의 일기인『계암일록』에는 스물일곱 살 때부터 서른여섯 살 때까지 과거에 응시한 기록이 남아 있다. 10년 동안 김령은 생원`진사시 일곱 번, 문과 일곱 번, 모두 열네 번 과거에 응시하여 서른여섯 살 때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반적으로 20세 전후부터 과거에 응시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는 급제할 때까지 대략 스무 번 가량의 시험에 응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급제할 때까지 생원 초시 두 번, 진사 초시 두 번, 별시 문과 초시 한번 등 총 다섯 번의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나 전시에서 번번이 낙방하였다. 초시 합격의 기쁨은 잠시였고, 낙방의 아픔은 되풀이 되었다.


   18세기 중반의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스물네 살 때부터 마흔여섯 살 때까지 23년 동안 적어도 스물일곱 차례 이상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는 서른하나에 진사가 되었으나 이후 15년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실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을 뿐 아니라 영조 45년(1769)에는 성균관 칠일제에서 2등을 하여 국왕을 알현하기도 하였다. 그에게 과거는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그는 마흔 여섯 살이 넘어 결국 과거 응시를 포기하였다.


   그의 부친 황전(黃㙻, 1704-1772)은 근 20년 동안 생원·진사시 초시에 여섯 번 합격하였으나 복시에서 모두 실패하였고, 결국 마흔 여섯에 이르러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았는지 쉰여덟에 다시 한 번 응시하였는데, 또다시 초시에만 합격하고 회시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수험 생활은 합격과 동시에 끝이 났다. 그러나 끝내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스스로 응시를 포기해야만 했다. 몇 살 때까지 과거를 보느냐 하는 것은 시대마다 달랐던 듯하다.


   상대적으로 급제 연령이 낮았던 조선전기에는 대략 40세쯤 되면 과거를 포기한 듯하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했던 조선후기에는 50세가 넘어서도 과거를 본 사례들이 많이 보인다. 18세기 전반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은 부모님께 50세까지만 과거를 보기로 허락받았다고 하는데, 이로 보면 오십이 넘어서도 과거를 보는 사람들도 많았던 듯하다.


   늦은 나이까지 과거를 보다보니 부자가 함께 과거에 응시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청대일기(淸臺日記)』나 황윤석의『이재난고』에는 저자가 부친과 함께 과거를 보러 가는 일이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간혹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급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17세기 전반 박한(朴, 1576-?)은 선조 36년(1603) 스물여덟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아버지 박선장(朴善長, 1555-1616)은 2년이 뒤에 쉰하나로 급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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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의 연령 분포  ⓒ박현순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의 평균연령은 36.4세 가량이다. 최연소 합격자는 15세로 이건창(李建昌, 1852-1898) 등이 있으며, 최고령 합격자는 90세로 양주에 사는 박화규(朴和圭)와 옥과에 사는 김재봉(金在琫)이 있었다. 그러나 20세 이전에 급제한 경우는 고종대를 제외하면 그 수가 많지 않았다. 또 70세 이상의 고령 급제자 가운데는 노인들을 위한 기로과(耆老科)에 급제하거나 고령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급제를 내린 경우가 많다.

   전체 문과급제자의 연령분포를 보면 31세-35세를 정점으로 26세에서 40세 사이에 보다 집중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50대, 60대, 70-80대까지 급제자들이 이어지고 있다. 개중에는 70-80대까지 응시자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영조대부터는 심심찮게 노인들을 위해 기로과(耆老科)를 시행하기도 하였고 특별히 왕명을 내려 고령 응시자를 급제시키고도 하였다. 그만큼 노인들의 응시가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노인에 대한 은사(恩賜)가 잦아지면서 노인들의 응시가 늘어나는 경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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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김홍도 그림 ‘새벽녘의 과장(科場) 풍경’  ⓒ국립국악원 발행『국악누리』2007.04 수록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정조 2년(1778) 무렵 새벽녘의 과장(科場) 풍경을 그린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그림에 발문을 썼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반평생 넘게 이러한 곤란함을 겪어본 자가 이 그림을 대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질 것이다.”
(정병모 역, 국립국악원 발행,『국악누리』2007.04 30쪽)



   강세황은 영조 52년(1776) 64세의 나이로 기로정시(耆老庭試)를 통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그림을 보았을 무렵에는 이미 문과에 급제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40여년이 걸렸다. 이 그림을 보고 코끝이 시큰해진 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70대 80대가 되어서도 과거에 응시하는 시절에 강세황의 발문은 큰 공감을 얻었을 듯하다.

   조선시대 생원ㆍ진사는 47,000여명으로 연평균 100명가량이며, 문과급제자는 14,600여명으로 연평균 30명 정도였다. 응시자는 숙종대에 이미 만 명에 육박하였고, 정조 21년(1797) 정시 초시에는 111,838명이 응시하였다. 문과 응시자가 가장 많았던 시험은 고종 16년(1879) 정시로 213,500명이 응시하였다. 이 관문을 뚫고 합격의 영광을 누린 사람은 표시도 나지 않을 만큼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몇 천 몇 만 명이 응시하여 불과 이삼십 명을 뽑는 시험에 이삼십년을 매달릴 필요가 있었을까?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누구나 관직 진출을 꿈꾸던 시절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과거가 그 꿈에 도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과거 급제는 집안을 일으키고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다 하더라도 한 집안의 자손이자 가장인 자는 그 길을 피할 수 없었다. 수십 년에 걸친 과거 응시는 그들의 숙명이자 꿈을 위한 끝없는 도전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자자손손 대물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