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서 만난 역사 #2 록빠는 티베트어로 친구
김성희(중세2분과) [그림 1] ‘록빠’는 티베트어로 친구를 뜻합니다 ⓒ김성희 산자락을 스쳐 간 인연, 향그러운 커피에 취해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봅니다. 불현듯 가야 할 길이 아득하여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합니다. 하나 잰걸음으로 언덕길을 오르는 사이에도 길가의 유다른 공간에 시선을 빼앗겨 분주한 발걸음이 자꾸만 잦아듭니다.[그림 2] 필운대 바위로 통하는 언덕길을 새롭게 채워가는 다양한 문화 공간들 ⓒ김성희
오 분이면 충분히 오를 언덕길을 두 시간이 넘게 걸었지만 그 시간이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산자락의 묘한 감성에 순순히 이끌리는 것이 인왕산을 걷는 옳은 방법인 것 같거든요. 비록 느린 걸음이나마 쉼 없이 내딛으니 결국 목적지인 배화여자대학교 정문에 가닿습니다.[그림 3] 배화여자대학교·여중·여고, ‘삼교三校’의 정문 ⓒ김성희 앞서 말씀드린 데로 조선 중기의 명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 선생의 집이 있었던 필운대는 ‘배나무 꽃 한 지붕 세 가족’ 중 둘째네 집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배화여자고등학교 별관 뒤편의 거대한 바위 근방이 바로 필운대이지요. 제가 필운대를 찾아간 날은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던 금요일이었기에 우선 경비실에 들러 방문의 목적을 밝힙니다. 혹자는 평일에는 미리 협조를 구해야 유적을 관람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제 경우에는 평일·주말을 막론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관람이 가능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경비 아저씨에게 무조건 공손할 필요는 있습니다. 가는 미소가 고우면 바위로 가는 발걸음도 편해지는 법이거든요.
[그림 4] 배화여자고등학교로 이어지는 돌계단과 계단 중턱에서 바라본 생활관 ⓒ김성희
정문을 통과하여 몇 걸음 걸으니 왼편 언덕으로 아담한 돌계단이 나타납니다. 반듯반듯한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다 보면 저 앞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창연한 고색의 건물이 하나 나타납니다. 서양식 건축양식에 팔작지붕을 곁들인 이 고풍스러운 건물은 원래 이 학교에 머물던 미국 선교사들의 관사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배화여고 생활관으로 쓰이고 있지요. [그림 5] 학교 창립자 조세핀 필 캠벨 여사의 사진과 흉상 (왼쪽 두 사진, 배화여고 홈페이지) 여학생들이 눈과 장난기를 버무려 곱게 화장해드렸네요 (오른쪽 사진) ⓒ김성희
1898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에 의해 세워진 배화여고(창립 당시의 명칭은 캐롤라이나 학당) 경내에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39호로 지정된 생활관 건물을 비롯하여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근대식 건물 세 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태가 인상 깊은 이 건물들은 필운대 자락을 거쳐 간 다채로운 인연들을 짐작게 하는 자취라 할 수 있겠네요.[그림 6] 1926년 ‘캠벨 기념관’으로 건립된 배화여고 본관 (배화여고 홈페이지)
정성스레 다듬어 만든 돌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며, 벽돌을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쌓아 건립한 아름다운 건물을 감상합니다.[그림 7] 1915년 2층으로 건립되었다가 후일 증축된 배화여고 과학관 (배화여고 홈페이지)
하얀 눈과도 잘 어우러지는 그 우아한 맵시를 즐기는 가운데 마지막 계단에 오르니, 저 앞으로 유난히 도드라지는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바로 제 걸음이 향하고 있는 배화여고 별관입니다.[그림 8] 배화여고 별관과 건물 뒤편의 샛길. 이 길을 통해 필운대 바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김성희
[그림 9] 바짝 얼어 벌서는 모습이 애처롭네요 ⓒ김성희무심한 손길로 지어낸 무심한 건물을 바라보매 심상이 흐트러집니다.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가두어버린 회색의 담장, 그 파괴의 현장을 대하며 마음이 좋을 수가 없네요.[그림 10] 겸재謙齋 정선鄭敾,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중 필운대 (간송미술관 소장)
겸재謙齋가 화폭에 담아낸 고즈넉한 풍경 속에 뜻밖의 불청객이 난입한 1960년대(별관 건물은 1969년도에 건립)는 비단 인왕산 자락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개발의 광풍이 일기 시작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소중한 것들을 수도 없이 앗아간 야만의 바람이 아직도 잦아들지 않고, 어쩌면 점점 더 강하게 불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채기 역시 인왕산 자락의 역사이며 바쁘게 달려온 우리 사회의 발자취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르며, 별관 왼편의 샛길을 따라 걸음을 이어갑니다.회색 담장 너머에는 수업 중인 학생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살얼음이 덮인 샛길에 넘어지지 않으려 살금살금 몇 걸음을 디디니 비로소 웅장한 바위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그림 11] 배화여자고등학교 별관 뒤편의 필운대 바위 ⓒ김성희
우리는 일반적으로 흙과 돌을 높게 쌓아 평평하게 한 축조물, 혹은 자연의 암반 또는 높은 산봉우리처럼 멀리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 ‘대臺’라는 이름을 붙입니다.인왕산 동남쪽 기슭, 도성 안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에 자리한 이 늠름한 바위는 ‘대’라는 명칭에 걸맞은 풍채를 지니고 있네요. 이 잘생긴 바위가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이곳이 바로 필운대입니다.역사를 되짚어 보니, 자신이 품고 있던 ‘인왕사仁王寺’라는 절에서 이름을 얻은 인왕산이 한동안 ‘필운산弼雲山’이라 불리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조선 중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공용경龔用卿이라는 사람이 인왕산을 일컬어 ‘오른쪽에서 임금을 보필한다’는 뜻으로 ‘필운弼雲’이라 칭한 데서 유래한 별칭이었지요.천사天使도 칭송해 마지않았던 늠름한 인왕산 자락에 어느 날 한 사내가 찾아와 새로 거처를 정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필운’이라 일컬었으며, 자기의 집 주변에 있는 바위에도 호기로운 필체로 ‘필운대’라 글씨를 새겨 넣었죠.그 바위 근방에는 원래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權慄(1537~1599) 장군의 집이 있었는데, 장군의 무남독녀에 장가를 든 인연으로 인왕산에서 살게 된 그 사내는 처가가 깃들어 있던 산자락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백 년의 가약을 통해 인왕산과 인연을 맺게 된 사내, 그 사내가 바로 이항복 선생입니다.[그림 12] 이항복 영정 (서울대 도서관)
이항복 선생은 백사白沙, 필운弼雲 등 여러 가지 호를 썼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를 일컬어 흔히 '오성대감'이라 불렀다고 하지요. 선생의 죽마고우였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의 일화를 모은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대중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기도 합니다.지체 높은 대감 댁 창문에 불쑥 팔을 디밀어 넣고서는 감 내놓으라며 호기를 부렸던 당돌한 소년이 훗날 그 대감 댁으로 장가를 간 후-오성과 한음의 여러 일화 중 하나에 등장하여 어린 이항복의 호기 어린 도전을 받아주었던 대감 권철權轍(1503~1578)이 바로 이항복의 장인 권율의 아버지입니다-처가 뜰에 늠름하게 서 있는 바위에다 호기롭게 글을 새겨 넣었던 모양입니다(실제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한경지략漢京識略』등의 기록은 ‘필운대’ 각자刻字를 백사의 진적眞蹟이라 적고 있습니다).어려서는 왈패들과 어울려 다니며 대장 노릇을 하였고, 말년에는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다 끝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을 정도로, 호기로우면서도 강직하였던 선생의 기운이 수백 년 풍상을 견뎌낸 글씨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그림 13] 바위에 새겨진 ‘필운대’(왼쪽 사진) 각자와 글씨가 새겨진 위치(오른쪽 사진) ⓒ김성희 바위에는 백사의 글씨 말고도 다른 글씨들이 여럿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는 선생의 후손으로서 고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각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873년(고종10) 필운대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더듬은 후 그 감상을 새긴 시구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림 14] 백사의 후손 이유원의 시를 새긴 각자 ⓒ김성희
우리 할아버지 거하시던 자리에 그 손이 찾았는데 我祖舊居後裔尋
창송 석벽은 흰 구름에 깊이 잠겼네 蒼松石壁白雲深남기신 기풍은 백 년이 지나도록 바래지지 않았고 遺風不盡百年久노인장들의 의관도 옛 모습 그대로구나 父老衣冠古亦今계유년 월성 이유원이 백사 선생의 필운대에 제하다 癸酉月城李裕元 題白沙先生弼雲臺 그의 저서『임하필기林下筆記』의 「춘명일사春明逸史」 편을 살피면 ‘필운대’라는 제목의 글이 눈에 듭니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어 조상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엿볼 수 있지요.
“인왕산 오른쪽의 육각현 아래에 누각동이 있고 그 안에 필운대가 있는데, 곧 백사 선생의 유지이다. 석벽에 ‘필운대’라는 세 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선생의 수필이니, 선생의 자 중의 하나가 필운이므로 대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지금 그 시대와의 거리가 거의 300년이나 되는데도 대지가 예전과 똑같고 탈이 없으며 석각도 그대로 있고 패이지 않았으니, 이따금 가서 바라보면 옛일이 서글퍼지는 심정을 누를 길이 없다.” 선조가 머물던 자리에 찬연히 서 있는 이 바위를 바라보며, 그 후손이 느꼈을 벅찬 감회를 가만히 짐작해 볼 뿐입니다. 이유원의 애틋한 감상이 각인된 그 오른편으로는 조선 후기의 여항閭巷 가객歌客으로서,『가곡원류歌曲源流』의 저자로도 유명한 박효관朴孝寬(1781~1880)과 몇몇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그들의 이름 앞에 ‘계유년에 공사를 감독하다[癸酉監董]’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유원의 시를 암벽에 새기는 공사에 관여했던 이들의 명단을 적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중인 신분이면서도 흥선대원군에게 호를 하사받을 정도로 상류층 인물들과 교분이 깊었던 박효관이 이유원과도 인연을 맺었겠거니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그림 15] 이유원의 시구 옆에 새겨진 공사 감독인 명단 ⓒ김성희실제로도 위에 언급한 이유원의 글에는 “임신년(1872, 고종9)에 동네 노인들[父老]이 내가 백사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동장洞長이라 칭하고 친목을 도모해 주기에 나 또한 기꺼이 허락하였으니, 대체로 300년 동안 처음 있는 아름다운 일이었다.”는 구절이 보입니다.
박효관이 필운대 근처에 ‘운애산방雲崖山房’을 차려 놓고 동료 가객들과 어울렸던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 글에서 이유원이 칭한 ‘동네 노인들’이란 바로 박효관과 그 친우들이었을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그림 16] 1876년 간행된 가곡집『가곡원류』 (규장각 소장)
겸재 정선이 그려낸 필운대의 한가한 정경을 가만히 살피면 바위 왼편으로 시내가 흐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바위 밑 오른편으로는 거듭 획을 가해 무언가 움푹 파인 듯한 지형을 묘사하려 한 흔적이 보이기도 하고요. 혹 바위 근처에서 발원하는 샘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입니다.[그림 17] 겸재 정선, 장동팔경첩 중 필운대 부분평소 필운대 바위를 찾았을 때에는 거대한 바위의 위용에 압도되어선지 고개를 들어 바위를 올려다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날따라 그전에는 별다르게 살피지 않았던 바위 아래로 자꾸 시선이 간다 싶더군요. 그 언저리에 파 놓은 옹달샘에 눈길이 가닿으려는 조화였나 봅니다. 멈춰서 천천히 바라볼 제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이 있는 법입니다.[그림 18] 필운대 바위 아래쪽의 옹달샘 ⓒ김성희윗샘에 고인 물이 아랫샘으로 자연스레 흐를 수 있도록 홈을 파 이어놓은 모습이 아기자기하고 예쁘네요. 술잔을 기울이다 주흥에 겨워 연거푸 곡조를 뽑아낼라치면 필시 목이 탔을 겁니다. 얼근하게 취한 가객들이 청량한 샘물을 마시려 바위 구석에 코를 박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합니다.[그림 19] 필운대 바위로 이르는 길의 돌계단 ⓒ김성희
저만치 아래쪽으로 바위를 쪼아 만든 계단은 술에 취한 가객들이 매끈한 바위에 미끄러지지 말라는 누군가의 배려였는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반듯하게 돌을 쪼아낸 정성이 보통은 넘는 것 같네요.조선 시대에는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이라는 말이 있었으리만치 이곳 필운대는 꽃과 풍류를 즐기는 ‘풍류상화風流賞花’의 장소로도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봄이 되면 많은 사람이 필운대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으며 봄의 정취를 즐겼다고 하니, 선인들의 시문 속에 그 좋다는 ‘필운대 꽃구경’의 감상이 남아 있을 법도 합니다.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 들추어 보니 필운대와 관련된 글을 여러 편 찾을 수 있었는데요, 그중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작품도 눈에 띕니다.
필운대의 꽃구경 弼雲臺賞花 노니는 나비 하필 극성이라 나무라나 戲蝶何須罵劇顚
사람들 되레 나비 따라 꽃과 만나려네 人還隨蝶趁芳緣
아지랑이 핀 저 너머에 한낮의 봄은 새파랗고 春靑晝白遊絲外
길엔 붉은 먼지 자욱하여 마실 풍경 뒤설레네 井哄烟喧紫陌前
새들의 지저귐은 저마다의 마음이지만 各各禽啼容汝意
도처에 피어난 꽃은 저 하늘 마음이지 頭頭花發任他天 명원에 앉아 둘러보니 어린 아니 하나 없고 名園坐閱無童髦머리 허연 노인들만 작년 같지 않아 서글프네 白髮堪憐異去年- 박지원,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연암집燕巖集』제 4권
(위 시의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본을 참조하여 새롭게 다듬었습니다) 바위를 둘러싼 선인들의 자취는 이처럼 찬연한데, 바위를 둘러싼 풍경은 너무나 쓸쓸히 변해버린 듯합니다. 그 옛날 필운대를 찾았던 이유원의 심정이 이러했을는지요. 가슴을 채우는 먹먹함에 잠시 잊었던 추위가 여민 품으로 파고듭니다. 이래저래 필운대 감상에는 주흥이 빠져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짜이 한 잔에 담겨 온 인연 갈 길이 아직 먼데, 날씨는 춥고 마음마저 쓸쓸하니 발걸음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쓸쓸함을 꾹 참고서 발길을 이어가야 하나 아니면 잠시 따뜻한 공간에 들어 마음을 달래야 하나 고민을 하려니 불현듯 언덕길에서 만난 한 가게 앞의 풍경이 뇌리를 스쳐 갑니다.[그림 20] 짜이 한 잔 하세요! ⓒ김성희
쉬지 않고 언 볼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에 언 몸을 녹여줄 따스한 짜이 한 잔이 간절합니다. 하릴없이 발길을 돌려 언덕길을 되짚어가는 수밖에요. 산자락의 묘한 감성에 순순히 이끌리는 것이 인왕산을 걷는 옳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록빠는 티베트어로 친구 지난 글에 낭만을 한껏 불어넣어 주었던 특별한 커피집 ‘커피한잔’의 바로 옆에는 그와는 또 다른 감성으로 행인들의 눈길을 끄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직동, 그 가게’입니다.[그림 21] 사직동, 그 가게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 1-7번지, 070-4045-6331 ⓒ김성희외양을 얼핏 봐서는 흡사 어렸을 적 드나들던 문방구와 같은 모습인지라 이름만으로는 그 정체를 알기가 조금 어렵네요(나중에 알고 보니 ‘사직동, 그 가게’가 자리하기 전에는 수십 년간 문방구로 쓰이던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림 22] 톡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직동, 그 가게'의 외양 낯설음에 그냥 지나치면 손해, 그리곤 후회 ⓒ김성희
낯선 공간에 선뜻 발을 들이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지요. 평소 수도 없이 이 언저리를 오갔지만, 괜한 수줍음에 용기를 내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짜이의 힘을 빌려 소심한 발걸음에 용기를 더해 봅니다.살며시 설레어 하며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찰나, 건물 한편 기둥에 그려진 예쁜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그림 23] 록빠는 티베트어로 친구 ⓒ김성희생소한 단어가 낯설긴 하지만 이 가게에 서린 무언가 남다를 인연을 짐작게 하는 문구입니다. 그 인연이 무엇인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답을 찾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겠지요.[그림 24] 해맑은 미소로 정겨운 가게 안 풍경 ⓒ김성희삐거덕 문을 열어 발을 디디니 유다른 포근함이 훈훈히 반겨줍니다. 차가운 안경알에 순식간 김이 서리듯 온몸으로 삽시간 스미는 따스함에 마음속 쓸쓸함이 일순간 달아납니다. 연연한 미소로 따스하게 물든 계산대 앞에 서 머리 위의 메뉴판을 올려다봅니다. 짜이·커피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음료와 더불어 간단한 요깃거리도 적혀있는데, 하나하나 눈길이 가 머물지 않는 것이 없네요. 그 넉넉한 품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림 25] 예쁜 메뉴판 초록색 점이 찍힌 메뉴는 완전 채식 ⓒ김성희
짜이에 이끌려 가게에 들어왔건만, 요깃거리들이 눈에 드는 순간 잊고 있던 시장기가 발동합니다. 가장 도드라지는 인도식 야채커리를 부탁한 후 유일하게 비어 있던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습니다.[그림 26] 창가의 아담한 테이블 ⓒ김성희
장갑이며 목도리며 꽁꽁 싸맸던 것들을 풀어내며 가게 안을 둘러보니, 책갈피·목걸이·인형과 같이 누군가의 손길로 정성스레 만든 소소한 공예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네요. 가게 밖 기둥의 ‘Shop & Cafe’라는 문구가 조금씩 이해되는 듯합니다.[그림 27] 티베트 아낙들의 솜씨가 빚어낸 예쁜 공예품들 ⓒ김성희
가게 안의 이국적인 소품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다 보니 어느새 맛깔스러운 커리가 만들어져 나옵니다.[그림 28] 가게 식구들이 직접 재배한 채소로 만든 맛스러운 커리 ⓒ김성희
입안을 채우는 매콤한 커리의 기운에 싸늘하던 손발이 따스하게 풀어지는 느낌이 좋습니다. 고슬고슬한 커리 밥과 상큼한 절임 반찬, 살강살강 알맞게 익은 채소와 따뜻한 커리 소스의 조화가 참 예뻐 금세 접시를 비웠네요. 이제는 짜이를 한 잔 부탁할 차례인 것 같군요.[그림 29] 보물처럼 소중한 한 잔의 짜이 ⓒ김성희
홍차, 우유와 함께 끓여낸 알싸한 생강의 내음이 커리의 여운과도 잘 어우러집니다. 유난한 한기에 품을 여며야 하는 요즈음에는 정성스레 끓인 짜이 한 잔이 보물처럼 소중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짜이를 찾는 손님이 많아서인지 작은 주방에선 짜이 냄비가 바쁘게 달그락거립니다.[그림 30] 공간을 채우는 따스한 정서 ⓒ김성희
눈길이 가닿는 모든 곳에서, 혀끝에 와 닿는 드문 맛에서 이는 남다른 감성의 연원은 어디일지, 궁금증이 유난합니다. 밀려드는 주문이 잠시 뜸해지기를 기다려 고운 미소의 매니저께 이 가게의 내력에 관해 몇 마디 여쭙습니다.“알아요”라는 듯 엷은 미소와 함께, “이 책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한 번 읽어 보시고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물어봐 주세요” 라며 건네는 작은 책.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매 짜이 한 잔에 담겨 온 인연이 참으로 귀하게 다가옵니다.[그림 31] 같은 길을 함께 가는 친구, 돕는 이 ⓒ김성희
‘사직동, 그 가게’는 중국의 침략을 피해 고국을 떠나야만 했던 수많은 티베트인들의 경제적·문화적 자활을 돕기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만들어진 ‘록빠ROGPA’라는 NGO 단체의 한국 내 활동 거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인도의 다람살라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채 수십 년간 타국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티베트인들의 아픔은 우리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단순히 조금 남다른 개성의 카페이겠거니 지레짐작했던 저에게, 가게 밖 기둥에 적혀 있던 낯선 문구가 온전히 이해될 리 만무했던 것이지요.
[그림 32] 운영비를 제외한 수익금 전액은 ‘티베트 난민들의 자립’을 위해 쓰입니다 ⓒ김성희티베트 여성들의 자활을 위해 만들어진 ‘록빠여성작업장’의 물품을 소개하는 공정무역 가게이자, 향그러운 한 잔의 짜이가 있는 카페라는 설명에 가게 밖 기둥에 적혀 있던 낯선 문구가 비로소 온전히 와 닿기 시작합니다. 가게 안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공예품들은 티베트 아낙들의 솜씨였던 것이지요. 그 손길이 참 곱습니다.[그림 33] 사직동, 그 가게의 시작 ⓒ김성희
[그림 34] 인도 다람살라의 ‘록빠가게 1호점’ (록빠 웹페이지 / 사직동, 그 가게 블로그)
같은 마음으로 다람살라에 먼저 문을 연 ‘록빠가게 1호점’에 이은 ‘록빠가게 2호점’이 여기 인왕산 자락에 둥지를 틀게 되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사직동, 그 가게는 2010년 5월, 출자자들에게 십시일반 모은 1125만 원의 출자금으로 총 30여 명의 자원 활동가들의 땀과 애정으로 약 두 달여 간에 걸쳐서 만들어졌습니다. 인근에 버려지는 물건들을 모아 자원 활동가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 시간도 더디 걸리고 완성과 동시에 보수가 시작됐지만, 티베트 친구들을 위한 마음이 모여, 투박하지만 사람냄새 나는 곳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림 35] 사직동, 그 가게를 만든 이들 ⓒ김성희눈길이 가닿는 모든 곳에서, 혀끝에 와 닿는 드문 맛에서 일던 남다른 감성의 연원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같은 뜻으로 하나둘씩 모인 손길이 바로 이 가게를 있게 한 힘이기에, 가게 안의 어떤 사물에서나 그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번갈아가며 가게를 지키는 지킴이들의 미소가 유달리 푸근하고 행복해 보였던 이유도 마찬가지이겠지요(일주일에 4시간씩 12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교대로 까페지기를 하고 있습니다).[그림 36] 짜이 맛있죠!? ⓒ김성희찬찬한 눈길로 바라보니, ‘사직동, 그 가게’는 ‘티베트인 친구들을 위한다’는 큰 뜻 이외에도 나눔·환경보호·참살이·반핵·평화·인권·채식주의 등 이 세상을 더욱 오래, 건강히 지탱해 줄 다양하고 소중한 가치가 공유되는 공간임을 알게 됩니다. 허투루 버리지 않고, 함부로 낭비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을 알기에 낡은 잔에 담겨 나온 짜이 한 잔이 더욱 귀하게 느껴질 밖에요.
‘공정’ ‘녹색’ 등과 같은 귀한 단어가 흔하게 회자되는 요즈음입니다.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분식하기 위해 소중한 가치마저 가볍게 소비되는 저간의 현실 속에서, ‘사직동, 그 가게’와 같은 진짜를 만날 때의 반가움은 유난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림 37] 해질녘의 사직동, 그 가게 ⓒ김성희
소중한 음식에 감사를 드리며, 소중한 인연에 감사를 드리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언덕길로 나섭니다. 앞으로도 늘 찾게 될 것임을 알기에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습니다.가게를 떠난 후 한참이 지났건만 그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친절한 귀띔으로 알게 된 온라인 공간들을 살펴보며, ‘록빠’라는 이름 아래 모여 있는 많은 분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그분들의 즐거움과 보람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독립운동, 이제 우리에게는 책을 통해 배우는 역사의 한 장에 불과하지만, 티베트인들에게는 곧 어제 오늘의 일상입니다. 마땅히 누려야 할 일상의 평온을 그들의 삶에 되돌려주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분의 공감이 필요하기에, 귀한 인연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단서를 몇 가지 적어 봅니다.
※관련 웹페이지 사직동, 그 가게 블로그 록빠 웹페이지 록빠 웹진 블로그 록빠 작목반 블로그 록빠 어린이 도서관 페이스 북 발밤발밤 발걸음을 내딛으며 글을 쓰기 위해 가게와 관련된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가게 안 어디선가 ‘발밤발밤’이라는 낯선 단어가 잠시 눈에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다시 궁금증이 일기에 타다닥 검색을 해 보니, 티베트 말인 줄 알았던 제 생각과는 전혀 달리, ‘한 걸음씩 천천히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우리말이라 신기한 마음이 드네요.조금이라도 더 나누고 싶은 욕심에 한 자 두 자 적다 보니 글은 자꾸만 길어지고, 걸음은 자꾸만 느려집니다. 하지만 발밤발밤 꾸준히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가려는 곳에 한 걸음 두 걸음 더 가까워지고, 한 사람 두 사람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할 수 있겠지요. [그림 38] 그렇다면 걱정이 없겠네 ⓒ김성희
가게를 나서며 문득 발견한 담장의 명구에 따스한 위로를 받게 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더 깊은 산자락의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릴 것을 기약하며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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