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박물관] 민영환과 레닌의 조우?

BoardLang.text_date 2007.05.02 작성자 조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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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진은 우리에게는 마지막 짜르로 잘 알려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사신으로 민영환이 참가한 후 귀국 도중인 1896년 8월 23일 재무대신 위테(Sergei Yul'evich Witte; 1849-1915)의 초청으로 소비에트 혁명 이후 최근 얼마 전까지 고리키(Gorkiy)시라고 불리었던 볼가강변의 니즈니 노브고로드(Nizhniy Novgorod)라는 지역의 박람회에 들려 타 본 열기구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민영환 세계일주 과정을 추적하던 중 당시 모스크바대 유학중이던 우리 분과 김영수 선생의 도움으로 모스크바대 도서관 소장 당시 자료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민영환은 일기 해천추범(海天秋帆)에서 “한 곳에 들어가니 가벼운 기구(氣球)가 있는데 대나무로 광주리를 만들어 가히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다. 위에 바람을 넣은 가벼운 둥근 물체가 끈으로 묶여 있다. 주관하는 사람이 여러 가지 기구를 구비하고 함께 타고 바람 쐬기를 청했다. 이에 올라타서 하늘 사이를 배회하니 마치 날게 깃을 탄 신선과 같다. 기계 줄이 있어 마음대로 내려와 신선으로 놀았는가를 의심하니 베게 위의 한 꿈이었다”고 하였고, 한어통역관으로 민영환을 수행했던 김득련은 환구금초(環璆唫艸)라는 시집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가벼운 기구(氣璆)에 올라타다>

가벼운 기구 안에 앉아 하늘로 올라
앞으로 나아가고 바람으로 위로 올릴 수 있네.
아래에는 전기를 저장하여 마음대로 좌우로 움직일 수 있고
우주를 유희하면서 구만리 장천을 높고 멀리 날아오르니
날아다니는 신선이 맞이하기로 약속한 적 있어
내 신선 사는 곳(영주瀛州)에 도착한 것이라네.


 

 

민영1178106716환과 레닌의 조우?

  민영환은 1896년 7월 3일 뻬쩨르부르그의 ‘토끼섬’이라고도 부르는 the Peter and Paul Fortress에 들렀다. 이 섬에는 요새, 베드로 바울 성당, 요새감옥, 엔지니어 하우스, 조폐소, 오포(午砲) 등이 있다.

  그는 “오후 3시에 재판소에 갔다. 소장 례로폐예프가 안내하여 옥방(獄房) 3층을 보여주었다. 무거운 죄수는 매 칸에 1인이요, 가벼운 죄수는 큰 방에 10여 명을 가두었다. 여자 감옥은 따로 두었다. 아울러 죄수는 칼을 쓰거나 착고를 채우지 않았고 각각 책상, 의자와 침구가 있어 편안히 있을 수 있다. 하루에 밥을 세 번 주고 또한 의복도 주었다. 욕실이 있고 병 치료하는 곳과 운동하는 곳도 있다.

  모든 죄수들은 배운 대로 각기 스스로 물품을 만들게 하여 백가지 공예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렇게 해서 번 돈 중에서 90%를 관에 바치고 10%는 관에서 죄수의 그달 수입으로 남겨 두었다가 석방할 때 계산해서 나눠주어 생활에 보태게 한다는 것이다.

  여러 죄수는 재판 후에 감옥서(監獄署)로 보낸다. 감옥서에 가니 서장 츌리스케가 영접하였다. 감방과 여러 가지 규칙과 제도를 두루 보니 재판소와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는 10년 이하의 징역을 받은 자만 남기고 10년 이상의 자는 북도의 매우 추운 지방으로 쫒아 보내 징역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두 곳에 갇혀 있는 죄수는 5백여 명인데 심한 고초를 겪는 것 같지는 않고 각각 스스로 새로운 방도를 도모하니 사람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다 할 것이다. 두 곳의 1년 경비가 20만원이 된다”고 적고 있다.

  수행원의 한사람인 윤치호의 영문일기에 의하면 당시 이곳에는 508명의 죄수가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 중 147명은 정치범이었고 경범자들은 일반 감방에 머물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감방 내에는 침대·세면대·테이블·찬장·컵·성경이 있었고, 285개의 좁은 감방은 깨끗하고 냄새도 없었다. 수형기간은 12∼14개월을 넘지 않으며 10년 이상의 죄인은 중앙의 감옥에 수용되어 있었다.

  교도소에는 3종류의 예배당 즉, 그리스정교(希臘敎), 천주교(로마)와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있었다. 목욕실·도서관·병원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이들 시설을 유지하는 데는 30만 루블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교도소의 여기저기에는 공원이 있고 산보도 허용됐다.” 김득련 또한 한시로서 이를 표현하였다.

<감옥서>

갇힌 죄수 가볍고 중함에 따라 또한 착고를 채우지 않고
방안에 편히 두고 식사와 차를 바친다네.
또한 백가지 공예를 가르치고 작업을 수행하니
잠시라도 고초를 잊고 집에 있는 것 같구나.


* 그런데 이때 레닌은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결성으로 1895년 12월 체포되어 1897년부터 3년간 시베리아 유형에 오르기까지 ‘러시아의 바스티유’라 불리던 이곳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