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박물관] 「華城府城操圖」와 수원 화성

BoardLang.text_date 2013.05.28 작성자 김태완

<華城府城操圖>와 수원 화성


김태완(중세2분과)

정조대 축조된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에 큰 분기점이 된 매우 중요한 성곽이다. 그러나 1792년 겨울 정약용이 정조에게 「성설(城說)」을 올렸을 때 둘레가 3600보(약 4.2km)였지만, 완공된 화성은 4600보(약 5.4km)로 늘어났다. 언제 왜 그렇게 변경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자료가 <화성부성조도華城府城操圖>이다.

[그림 1]  <화성부성조도(華城府城操圖)> (육군박물관 소장)  ⓒ김태완

   육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은 가로 100cm, 세로 76cm의 장지에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이 지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맨 윗부분에는 그림의 제목과 화성에 배치된 군사의 종류와 숫자의 총수 및 아래 회화식 지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그 아래에는 화성지도와 각 시설물에 배치된 군사의 종류와 숫자가 상세하게 적혀있다.


 

   <華城府城操圖>의 上段 註記


華城府城操圖

   周面三千七百步 五步爲一垜


   垜數爲七百四十垜


       ...(중략)...


   黑畵已築


   紅畵未築




윗부분의 주기 사항 중 처음 2줄과 마지막 2줄이 화성축성과 관련되어 있고, 나머지는 화성에 배치된 군사에 관한 내용이다. 우선 처음 2줄은 화성의 크기가 3,700보이고 총 740타로 되어 있다고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2줄은 검은 그림은 이미 축조되었고, 붉은 그림은 아직 축조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화성부성조도>는 언제 그리고 왜 그린 것일까?


   <화성부성조도>의 가장 큰 특징은 북쪽과 남쪽 부분의 성곽은 완공되었지만, 동쪽과 서쪽은 미완인 점이다. 『화성성역의궤』의 성곽 완공시기와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시기는 1795년초에 당시 화성 성역을 책임지고 있던 훈련대장 조심태와 도청 이유경이 화사를 동원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회갑연시 사람들과 들어오는 정문인 장안문, 아버지의 현륭원 참배시 사람들과 나가는 정문인 팔달문 부분이 우선적으로 완공된 것은 윤2월에 있을 큰 잔치를 고려한 것이다. 특히 <화성부성조도>의 군 배치도에서 보이는 것과 서쪽에서 유일하게 완공된 부분이 서장대 인근임을 미루어 보면, 혜경궁 회갑연시 성조 및 야조를 위해 그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유물은 많은 의문점을 주고 있다. ①이중성인 동쪽 성벽, ②공심돈, 동장대, 용도 부분의 암문, 봉수대 등 현재 있지만 지도에 없는 시설들, ③동문과 서문의 위치 등 여러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따라서 이 지도를 자세히 연구하면 3600보인 화성이 어떻게 4600보로 변경되었는지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