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30년사] 한국역사연구회 창립을 회고하며

BoardLang.text_date 2018.07.20 작성자 진도이세영



 

  • 2018년은 한국역사연구회가 창립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연구회는 연구회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자리를 갖는 자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30주년 기념식’의 개최, ≪한국역사연구회 30년사≫(가제)와 ≪한국사 연구의 현장≫(가제) 간행 등이 그것입니다. 미디어위원회는 이를 준비하는 과정을 연구회원들에게 알리고, 30주년의 의미를 더욱 폭넓게 공유하기 위해 특집 코너를 마련하였습니다. 기념식 및 기념도서 발간에 앞서 각 기획의 취지를 설명하고 발표될 원고의 일부를 여러분들께 소개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국역사연구회 미디어위원회







 

한국역사연구회 30년사


한국역사연구회 창립을 회고하며


 

이세영(근대사분과)


 

연구회의 창립 전후에 있었던 일 몇 가지를 회고하면서, 또 하나 제안하고자 한다. 나는 대학원 2학년 재학 중이던 1978년 7월 30일에 육군에 입대하였고 1980년 10월 말에 제대하였다. 이 기간은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시기였다.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은 18년간의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을 호기로 삼고,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켜서 국가권력을 탈취하여 신군부독재체제를 세웠다. 해방 이후 학수고대했던 1980년의 봄은 너무나 짧았고 이내 또 혹독한 겨울왕국으로 빠져버렸다. 그러나 이 기간은 나에게는 ‘塞翁之馬’의 시기였다. 왜냐하면 1974년 4월 유신정권이 조작한 ‘민청학련사건’에 함께 가담했던 ‘한국사연구회’의 동료들 가운데는 전두환 계엄군에 의해서 혹독한 시련을 당했거나 囹圄의 고초를 겪었고, 만일 나도 군대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 동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이후에 아마도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대하고 대학원에 복귀하였다. 동기들은 없었다.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勞農운동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던 차에 먼저 복귀한 이영호(74학번), 이영학(74), 박준성(74), 박찬승(75) 등과 未入隊한 도진순(77), 고동환(77), 양상현(77), 이윤상(77) 등이 공동학습팀을 만들어 경제사를 공부하자고 제안했고, 이후 ‘우리 9명’과 다른 서울대 국사학과 대원생들과 함께 토지제도사를 학습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9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러시아자본주의발전사, 모택동의 모순론과 실천론 등을 은밀히 학습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1981년 여름에 줄포로 농활을 갔다. 노선의 갈림길에서 시험을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활을 체득할 수 없었다. 결국 노동과 실천보다는 공부와 이론의 길을 선택하였다. 규장각에서 원고를 윤문하면서 생활비와 술값을 버는 한편, 석사학위논문을 쓰는데 모두가 진력하였다. 이 무렵 학교 밖에서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학교 안에서는 해방 정국에서 활발했던 학술운동의 싹이 다시 트기 시작하였다. 현실과의 치열한 이론적 실천적 비판과 대결을 회피한 체, 체제 속에 안주해 온 기성세대의 학문과 연구풍토에 대해 전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제도권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학회•연구회•연구소 등을 결성하여 과학적 이론과 진보적 인식의 운동화를 도모하는 학술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학술운동 속에서 역사학계의 신진연구자들은 매우 선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1984년 12월, ‘우리 9명’ 가운데 77학번 후배들은 선배들을 믿을 수 없어서였던지 먼저 치고 나갔다. 이들은 연세대 사학과 대학원생들 일부와 함께 ‘망원한국사연구실’(망원동)을 창립하고, ‘민중사학’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러자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선배들 5명은 그들의 행보를 인정하면서도 내심 못마땅해 하면서 따로 연구회를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1986년 2월, 역사학•문학•정치학 등의 전문연구자들뿐만 아니라 학계 밖의 한국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들 두 연구단체가 사학계에 미친 파장은 컸다. 그러자 失期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5명의 선배들도 서둘렀다. 1987년 4월, 이들 5명은 연세대 방기중•주진오•최원규 등과 고려대 지수걸•하원호•정태헌 등과 함께 ‘한국근대사연구회’를 창립하고,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의 수립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것은 연구방법론으로서 史的唯物論이나 다름없는 사회구성체론을 인용하여 사회의 민주적 변혁과 분단의 자주적 극복에 기여하는 한국사학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한편, 이처럼 한국사학계에서 3개의 연구단체가 설립되는 사이에 다른 분과학문에서도 ‘학계의 민주화와 진보적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7개의 학술단체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이 10개 단체가 1988년 6월 3~4일 이틀간에 걸쳐 학술단체연합심포지움(‘80년대 인문사회과학의 현 단계와 전망’)을 개최하였다. 기성학계와 연구단체들을 비판, 극복하자는 것, 한마디로 기성학계•학회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할 것이었다. 이에 앞서 역사분과에서는 어느 단체에서 누가 논문을 발표할 것인가가 논의되었다. 한국근대사연구회에서 필자(‘현대 한국사학의 동향과 과제’)와 망원한국사연구실에서 지수걸(‘1930년대 초반기(1930~33) 사회주의자들의 민족개량주의운동 비판’)이 발표하기로 하였다. 내가 선정된 데에는 특별하고도 이상한 이유가 있었다. 창립 이후 10개의 학술단체의 회원들은 넓게는 기성학계와 가깝게는 회원 소속 대학교의 선배교수•지도교수들과 이미 갈등•대립관계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회원들 대부분은 석사•박사 학위논문을 준비하거나 논문심사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조만간에 교수로 취직하기 위해서 지도교수의 추천을 필요로 하는 교수요원도 있었다. 따라서 심포지움 발표 논문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서는 그 발표자는 앞으로의 학술활동과 처신에 있어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박사과정에 있었지만 이미 한신대 국사학과에 재직하고 있어서 그러한 갈등관계•이해관계에서 조금은 비껴나 있었기 때문에 발표자로 선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도 결과적으로는 예외는 아니었다.

 

심포지움의 기조발표에서 김진균 교수(서울대 사회학과. 1980년 해직, 1984년 복직하여 초대 한국산업사회연구회장을 맡았다)는 기성학계의 이론적 관점과 연구방법이 한국사회 전체의 종속화와 맞물려 ‘학문적 종속화’로 치달아 왔음을 반성하고, ‘민족적•민중적 학문’을 지향할 것을 촉구하였다. 나는 해방 이후의 한국사학사를 ‘실천성’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앞으로 한국사학은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사회의 건설과 통일민족국가 건설에 실천성을 두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다른 16편의 논문들도 대체로 기성학계의 ‘종속성’•‘反민중성’을 꼬집었다. 이틀간에 걸쳐 연인원 3,000여 명의 연구자, 시민, 학생들의 관심과 성원이 있었으니 심포지움은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기성학계는 예상했던 대로 발끈하였다. 〈조선일보〉의 색깔 보도에 이어 김동길 교수(연세대 사학과)는 서관모 교수 논문의 내용 일부에 대해 매카시즘적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서울지검 공안부는 서 교수 논문의 국가보안법 위반여부를 가리기 위해 서 교수에게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이는 ‘『한국민중사』(망원한국사연구실 발행. 풀빛 1986) 사건(1987년 풀빛출판사 나병식 사장 2년 징역형 선고)’과 ‘민중미학연구회 사건(1987. 1 관련자 구속)’에 이은 학문과 연구 및 사상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탄압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광범위한 반대와 항의 사태가 전개되자 사법당국은 사법적 조치를 포기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얻은 부수적인 효과는 진보적 학술연구가 정치적•학문적으로 공식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젠 기성학계와 진보학계는 공공연하게 대척점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필자는 기존사학을 비판하는 진보사학의 앞잡이가 되어버렸고, 그 대가는 지도교수로부터 ‘사생아’로 낙인찍힌 것이었다. 이런 마당에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는 것은 순리가 아닐 것이었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 연합심포지움이 끝난 직후에 ‘우리 9명’은 다시 만나서 두 연구단체는 통합되어야 한다는 데에 뜻을 같이 하고,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망원한국사연구실과 한국근대사연구회는 한국사의 과학적 체계화, 공동연구와 그 성과의 대중화, 나아가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대한 적극적 대처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서울 소재 대학들의 고•중세사 연구자들까지 끌어들여 지금의 ‘한국역사연구회’를 창립하였다(1988년 9월). 연구회의 창립을 준비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과연 누가 초대 회장을 맡아 갓 출범한 연구회에 장차 불어 닥칠 질시와 외풍을 막아 줄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우선은 선배교수가 필요했다. 나는 준비위원장으로서 안병욱(성심여대 국사학과)•김인걸(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등과 교섭하였는데, 다행히도 안 교수가 수락해 주었다. 이로써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의 신진연구자 전체를 회원으로 갖게 된 한국역사연구회의 창립 취지는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의 수립을 통해 우리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연구자 대중의 조직화보다는 민족민주운동과 진보적 연구자와의 연계 강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부 망원한국사연구실 회원들(윤한택, 홍순권, 송찬섭, 박준성 등)은 두 단체의 통합에 합류하지 않고 별도로 ‘구로역사연구소’를 창립하였다(1988년 11월).

 

이제 와서 얘기지만, 연구회 창립 당시 개념 정의를 분명히 하지 않았던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1983~1984년을 정치적으로 ‘유화국면’이라고 불렀다. 전두환 파쇼정권의 탄압이 다소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를 기화로 강단에서는 한국자본주의의 구조와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이른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생산양식의 발전사의 관점에서 해방 이후, 특히 60, 70년대 이후 박정희 개발독재에 의해 구조화된 자본주의와 이를 토대로 하는 군부독재체제를 정합적으로 파악하자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한국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후자의 문제에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가운데 어느 것을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으로 설정한 것인가, 그리고 그에 따라 누구를 변혁주체로 설정할 것인가를 놓고 강단은 물론 진보진영은 양분되었다. 논쟁의 결과 그 전략•전술은 ‘NLPDR’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NLPDR’이 아니었다. 이러한 혼란스런 현실사회를 보면서 나를 비롯한 연구회 창립회원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근본적 원인은 근•현대 한국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근•현대 한국사회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시기•시대의 현실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연구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그 연구방법론으로서 최선의 것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분단 상황과 정치•이데올로기 국면에서 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용어로 대체했던 것이다. 이는 당대가 군부파쇼체제이긴 했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이미 자기 검열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었다. 이러한 연구회의 처신은 학술지 이름을 정할 때에도 나타났다. 『역사과학』(북한에 이미 『역사과학』이 있음)이냐 『역사와 현실』(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의 학술지 『Past and Present』에서 힌트를 얻음)이냐를 놓고 논쟁하였다. 결과는 지금의 『역사와 현실』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초창기에 ‘과학적 역사학’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연구회원들은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연구생활을 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 그 기치를 다시 내걸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경제사를 공부하고 있어서 ‘역사적 유물론’을 여전히 유효한 연구방법론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그것이 역사학계에서 퇴장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역사의 발전은 역사학의 발전을 수반했다. 물론 우리역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서구역사와 다르지만, 1960년대에 등장한 Annals 역사학을 이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 이를테면 미시사학이나 일상사학 등이 20세기의 사회과학적 역사학을 대체하여 오늘날에는 주류가 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연구회로 말하자면 ‘어떻게 살았을까’ 시리즈가 나왔던 것이 어쩌면 그 변화의 시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는 차제에 연구회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우리역사를 연구할 것인가’를 놓고 심도 있는 토론을 거쳐서 연구회가 지향하는 역사학을 재정립할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자 한다(2017.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