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유관순. 2019년 우리는 어떤 유관순과 마주하였는가?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BoardLang.text_date 2019.06.19 작성자 최우석
 

다시 유관순. 2019년 우리는 어떤 유관순과 마주하였는가?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최우석(근대사분과)


 

[caption id="attachment_7244" align="aligncenter" width="309"]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caption]

3.1운동 100주년 기념 삼일절을 이틀 남긴 2019년 2월 27일, 항거:유관순 이야기 (A Resistance, 2019)가 개봉하였다.

3.1운동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사람들에게 물으면 십중팔구는 유관순을 말한다. 민족대표 중 손병희, 한용운도 유명하지만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그에 반해 유관순은 3.1운동의 일반 참가자였으며 어린 학생이었고 여성이라는 점에서 3.1운동 참가자들의 평범성, 다양성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작동했다. 게다가 유관순은 법정과 감옥에서 강한 투쟁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결국은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기에 3.1운동 참가자들이 행했던 맹렬한 투쟁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 그리고 희생이라는 3.1운동의 내용을 대표하는 데에도 적절했다.

2019년 2월 27일 개봉한 항거:유관순 이야기는 유관순을 다룬 첫 번째 영화는 아니다. 유관순 영화는 해방직후인 1948년 윤봉춘 감독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고 1959년, 1966년, 1974년에도 만들어졌다. 1970년대까지는 7~10년 주기로 유관순 영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유관순이 정말 3.1운동 참가자들 모두를 대표하기 때문에 이렇게 빈번히 영화화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주 영화화되어 대중들의 인식 속에 각인되었던 것인지, 그 선후관계를 명확하지 않다.

10년 단위로 만들어진 유관순 영화들이 유관순을 재현했던 방식은 단일하지 않았다. 각각의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유관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내용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948년의 영화는 유관순과 잔다르크를 연결시키며 기독교적 순교의 이미지를 강조하였고, 시위를 주도한 리더이자 강인한 의지형 인물로 그려냈다. 그에 반해 1974년의 영화에서는 가녀린 여성으로 남성들을 보조하는 역할로 한정했고, 이전 영화들보다 더 자주 효녀로서의 유관순 상이 강조되었으며 잔다르크를 대신하여 ‘나이팅게일’에 비유하였다. 그렇다면 2019년 우리가 마주한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에서는 유관순을 어떤 존재로 보여주고 있을까?

 

실은 2019년에는 유관순을 다룬 영화가 2편이 연이어 개봉했다. 2월 27일 개봉한 항거:유관순 이야기와 3월 14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극영화 1919유관순이 바로 그것이다. 1919유관순은 아직 보지 못한 상태지만, 예고편과 일부분을 접한 정도로 판단해더라도 유관순의 기독교적 순교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1970년대까지 만들어졌던 영화들과 비슷해보인다. 그에 반해 항거는 너무나 엄숙하고 영웅적인 유관순을 조금은 내려놓고 장난기 있는 10대 소녀, 하지만 또 한편 민족과 독립이라는 화두에 있어서는 진지하고 강건한 인물로서 그려나가고 있다.

그러한 면모는 예수를 “깨벗고 못박혀서 고생하시는 이분도 머리가 나뻐서겠네?”, “저렇게 춥게 벗고 계신 이유가 말이야. 혹시 옷을 다 입고 있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짠한 감동을 주니까 일부러 그런거 아닐까”라고 말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런 유관순을 보고 오빠 유우석이 “너는 그렇게 의심이 많으니 천당가기는 글렀다”라고 말하자 “의심이 믿음의 반대말은 아니지요. 그리고 아직 나는 신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라고 답한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면모만 강조되었던 유관순보다도 현실에 있을 법한 사춘기 소녀 유관순의 면모를 일깨워준다.

[caption id="attachment_7241" align="aligncenter" width="664"]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caption]

감옥 생활 중에 서로에게 힘을 북돋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씬에서 여간수가 조용히 할 것을 명령하자, 언제 노래를 불렀냐는 듯이 감방 안은 조용해졌다. 그러자 항거의 유관순은 “우리 꼭 개구리들 같네요.”라고 말을 꺼내고 ‘개굴 개굴’ 울기 시작한다. 울다가 누가 오면 딱 멈추는 개구리, 자신들의 암담한 현실을 장난스럽게 풀어내며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만드는 모습을 연출해냈다. 항거의 유관순은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열사’, ‘영원한 누나’와 같이 존경받을 위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바로 옆에 있을 법한 친구, 누나, 언니, 여동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항거의 유관순은 다른 영화들이 대부분 유관순의 생애 전체를 조망한 것과 달리, 서대문감옥에 갇혀지낸 1년여 시간을 중심으로 묘사했다. 서대문감옥의 씬은 흑백영화로,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진행했던 씬은 통상적인 컬러영화로 보여주어 극명한 대비를 추구했다.

영화는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서대문감옥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로 수형인카드에 들어갈 사진을 촬영했다. 배우 고아성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속 유관순이 그대로 현실에 나온듯한 모습으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리고 소장을 만나고 여옥사 8호실로 향하게 된다.

여옥사 8호실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 들어가려는 유관순 앞에 펼쳐진 풍경. 그것을 보자마자 유관순도 관객들도 숨이 턱 막혀온다. 1919년 전국의 감옥은 그야말로 만원(滿員)이었다. 3월 1일부터 5월 25일의 기간동안 조선 전체 감옥에 수감된 사람이 9,059명에 달했다. 5월경 서대문감옥 재감자가 3,319명이었는데, 이는 1918년 한해동안 서대문감옥에서 취급했던 죄수의 수인 3,948명에 거의 육박한 수였다. 본래 서대문감옥은 500평 규모에 1,500명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감옥이었다. 1평(1.8m×1.8m=3.3㎡)에 3명 가량이 적정인원이었으나 1919년 8월말에는 1평당 6.04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항거에서 보여준 여옥사 8호실의 풍경은 1919년 감옥의 당시 모습을 너무나도 잘 재현한 것이었다.

옥사 안의 사람들은 한꺼번에 누울수도 없어 교대로 누워서 잠을 청하고, 서있는 사람들은 다리가 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3평 남짓의 감옥을 뱅글뱅글 돌았다. 밖에 간수들의 위협에 개구리처럼 조용해지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그들 스스로에게 힘을 북돋기 위해 노래도 부르고 농담도 하고 만세도 부르며 서로에게 의지하며 버텨나갔다. 항거의 여옥사 8호실 풍경은 자료로만 접해왔던 1919년 당시 서대문감옥의 처절함과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연대감을 충분히 전달해주었다.

 

[caption id="attachment_7242" align="aligncenter" width="664"]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caption]

여옥사 8호실에는 실재했던 인물들이 유관순에 앞서 이미 들어와있었다. 유관순의 학교선배이자 개성 만세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었던 권애라, 수원 기생으로 만세를 외쳤던 김향화, 임신한 몸으로 여옥사에 갇혀있던 임명애를 비롯해 총 25명의 인물들이 감방동지로 함께 등장한다. 엔딩크래딧에는 이들 모두의 이름이 제시되어 영화 속에서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3.1운동 당시 서대문감옥에 갇혔던 인물들을 영화 속에 재현하고자 했던 제작진의 노력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인물은 김향화와 권애라, 그리고 유관순과 같은 마을 출신으로 만세운동에서 아들을 잃은 만석이 어머니, ‘만석모’다. 유관순이 감방에 들어서자 만석모는 그녀를 바로 알아보고 울부짓기 시작한다.

만석모 : “너가 고향와서 설쳐대서 몇고을 쑥대밭되고 니 아비애미 꺼정 그 난리에, 내 아들놈도 칼맞아 죽고. 아이고 아이고. 그깟 독립이 무엇이 중하다고. 거길 따라나서서 그 꼴을 당하고. 내가 못 살아.”
김향화 : “그만 좀 하시죠? 만세 누가 시켜서 했습니까?”
만석모 : “그려. 나 그놈의 만세 몰라. 내 아들놈 살려내라고 순사놈들한테 매달린게 다여”

만석모가 보여준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3.1운동의 이야기와는 사뭇다르다. 모두가 강력한 독립의지로 만세운동에 나섰다고 상상해온 것과는 분명히 말이다. 만세가 무언지도 모르고, 만세운동 과정에서 자식을 잃고 그것에 항의하던 와중에 격한 항의가 그 사람을 처벌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만석모를 향해 김향화는 꾸짓듯이 말하고 이 중요한 문제제기는 중단되고 유관순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다양성, 그리고 그 운동이 1차적으로 실패로 돌아갔을 때, 많은 기대를 품었던 이들의 좌절감, 이를 극복하고 어떻게 다시 감옥에서 만세를 부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해야할 영화에서 반드시 다루었어야할 이 갈등은 이렇게 사장되었다. 만석모는 이후에도 몇 번의 틱틱거림을 보여준 것 외에는 어느 순간 유관순에게 다시 친밀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깟 독립이 무엇이 중한지, 왜 만세를 불러야만 했는지, 그리고 왜 다시금 감옥 안에서 1주년 기념 만세시위를 불러야했는지 유관순이라는 인물을 통해 풀어나가야 했던 이 영화는 이 갈등을 회피하면서 무언가 맥이 빠져 버린다.

김향화 : “우리 이렇게 될줄 알고도 만세부르지 않았나요?”
유관순 : “저는 의무라고만 여겼어요. 나라를 되찾으려는 당연한 의무.”

항거의 유관순은 ‘의무’라는 표현으로 만세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하였지만, 이런 자세는 기획단계부터 3.1운동의 내용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소수의 집단에서나 가능한 대답이었고, 일반 참가자들 모두에게 적용할만한 설명은 아니다. 이에 대해 김향화는 의무 같은 것은 모른다고, 이전에는 천해도 인간대접을 받았는데 일제가 지배한 이후 성노리개 변기통이 되어 가는 상황에서 죽일테면 죽여라고 각오하고 만세를 부르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모습에 항거의 유관순은 “나란 년, 이상 속에서 잘난 체”했다고 울면서 “정당한 일을 하니까 하느님이 도와주실 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한다. 이 순간 신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던 유관순의 캐릭터성마저 무너뜨려 버린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무감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했다는 유관순의 입장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만석모와 김향화를 통해 다른 운동 참가자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영화 속에서 더 많이 표현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렇지 못하다보니 인간적인 유관순을 부각하려던 영화의 초반 기획과 달리 후반부에는 점차 유관순 혼자만이 앞장서서 3.1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일으키면서 다시금 모두를 이끄는 영웅적인 유관순을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

최근에 여성 독립운동가를 적극 발굴하고 알리자는 분위기가 있고 언론들도 그런 기조에 동참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마주치는 문구가 ‘제2의 유관순’, ‘어느 지역의 유관순’ 같은 것들이다. 다양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개별성은 사장된 채로 우리는 대중들에게 쉽게 호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관순’을 끊임없이 활용하고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정말 다양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을까? 영화 항거 또한 다양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여 그들의 다양성과 독자성을 담아낼 수 있는 바탕은 마련해두었지만 더 이상의 전진은 없었다. 영화 속 김향화의 “이 안에 있는 사람들 처지가 다 다르듯이 만세부른 연유도 다 다른 거예요.”라는 말이 좀더 영화 내에서 다뤄졌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caption id="attachment_7243" align="aligncenter" width="664"]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caption]

보통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보면서 ‘고증 오류’를 지적하는 경우들이 많다. 하지만 영화와 같은 창작물이은 사실 그 자체로 표현할 필요도 없고 그에 대한 비판도 부적절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개별 사실관계의 문제보다도 전체적인 설정에서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특정한 이미지를 심어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고증 오류’라기보다는 ‘역사 왜곡’이라고 표현하는게 적절할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제시가 필요하다. 심지어 그 ‘역사 왜곡’이 현재 블로그 글이나 유투브 영상들에서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항거:유관순 이야기’에는 유관순의 대척점에 정춘영(=니시다 지로)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극중에서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유관순을 고문하는 일본 헌병이다. 실은 조선인이지만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니시다 지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헌병이 된 이유를 대일본제국의 제대로 된 신민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하지만 실은 제대로된 직업을 구하고 싶은 출세 욕망이 더 컸다. 일본어를 인천 조계 미곡 상회에서 일하며 배워서 능숙한 듯 하지만 일본인들은 어린아이 수준의 일본어라며 바로 그가 일본인이 아님을 눈치챈다. 그는 더욱 일본인 다운 일본인이 되기 위해 조선인을 탄압하는 존재로서 이 영화에서 유관순을 고문하고 감시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caption id="attachment_7245" align="aligncenter" width="665"]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caption]

그러나 이상의 정춘영에 대한 설정은 수많은 사실을 왜곡하는 기반에서 수립된 것이다. 일단 ‘정춘영’이라는 실존인물은 존재한다. 그는 병천헌병주재소 헌병보조원으로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진압하는데 참여했던 인물 중 1명이다. 그는 일본 이름을 가지지 못 했다. 아니 어떤 조선인도 1910년대에 일본 이름을 지니고 일본인인 척 할 수 없었다. 이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에 기반했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 오히려 금지한 것이었다. 그런 정춘영에 대해서 인터넷에서는 유관순을 따라다니며 고문한 악질 친일파라는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1910년대가 아무리 헌병경찰제도로 통치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된 이후에는 헌병경찰로부터 사법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헌병이 서대문 감옥에 들어와서 죄수를 직접 다루고 고문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간수의 역할이었다. 만약 서대문 감옥에서 헌병경찰이 근무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감옥의 내외를 지키는 경비 업무 정도였다. 즉, 항거에서는 여러 단계에서 유관순을 괴롭혔을 법한 ‘친일파 조선인’들을 정춘영이라는 한 인물로 집대성하였다.

영화 말미에는 엔딩크래딧 직전에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9년 유관순을 고문한 혐의로 ‘정춘영’을 체포했으나 이승만정권에 의해 동 위원회가 강제해산되면서 이후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라는 문구가 화면에 떠오른다. 이는 1949년 8월 9일 <동방신문>에 실린 기사에 근거한 내용이다. 해방이후 서천군 장항에서 여관업을 경영하고 있던 55세의 정춘영은 유관순에게 잔인한 고문을 한 혐의로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조사를 받은 이후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모른다. 반민특위 충청남도 조사부에서는 1949년 3월부터 8월말까지 80여명을 조사하고 30명 내외를 송치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정춘영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풀려난건지, 아니면 다른 친일파에 비해 잘못이 적다고 판단되어 송치되지 않았는지 그의 이후는 알지 못 한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있는 정춘영을 벌주기 위해 구타하는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친일파 정춘영’에 대한 분노를 보여준다. 하지만 3.1운동이라는 운동의 연장선에서 생각했을 때 과연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품었던 분노를 가장 말단의 친일파에게 폭력으로 풀어내는 방식에 머물렀을까? 혹은 그렇게 풀어내는 것으로 영화 속에서 우리가 카타르시스를 느껴야만 할까라는 의문을 남긴다.

 

영화 항거는 유관순이 당했던 고문들을 너무 과하지 않지만 또 그렇다고 부족하지 않게 표현해냈고, 유관순이 가졌던 독립의 의지를 풀어내는데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간이기에 감옥 내부에서 겪은 갈등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담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영화 속 유관순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영웅’이자 ‘열사’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그녀의 존재로 김향화를 제외한 다른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지워버리는 효과마저 발휘해버렸다.

영화 말미에 남자 죄수가 “왜 그렇게 까지 하는 거요?”라고 묻자 유관순은 “그럼 누가 합니까?”라고 답한다. 이 대사는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기보다는 역시 유관순이니가 할 수 있었어라는 느낌을 대중들에게 오히려 주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1운동과 관련해서 수차례 영화화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유관순’을 빼놓고 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없다. 아니, 애초에 모든 영화가 ‘유관순’이었다. 그렇기에 이후에는 유관순이 없는, 다른 3.1운동의 이야기를 영화나 드라마로 마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