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기를 통해 본 고려인의 삶 2] 고려도기, 남도의 젓갈을 운반하다

BoardLang.text_date 2019.02.28 작성자 한혜선

고려도기, 남도의 젓갈을 운반하다


('도기를 통해 본 고려인의 삶' 2번째 시리즈)



한혜선 회원(중세1분과)



최근 고려시대 연구는 수중발굴에서 얻은 자료가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근래에 이루어진 수중발굴 중 충남 태안 마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 3건에 대한 조사결과는 연구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다양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각각 마도 1호선, 마도 2호선, 마도 3호선으로 명명된 이 선박들에서는 풍부한 목간자료와 함께 각종 곡식류, 청자·도기·동기·철제 그릇, 대나무 바구니와 젓가락, 동물뼈 등이 인양되었다. 특히 출항지역, 시기, 선적물품, 수취인 등을 특정할 수 있는 다수의 목간자료는 고려시대 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로 발견되었을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목간자료에 따르면 마도 1호선은 1207~1208년 사이에 현재 전라남도 지역인 장흥과 영암 일대에서 출발하여 개경으로 가던 도중 침몰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마도 2호선은 현재 전라북도 지역인 고창일대에서 출발한 선박으로, 목간분석을 통해 1213년 이전에 난파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마도 3호선은 1265~1268년 사이에 침몰한 선박으로, 발송지는 전라남도 여수를 포함한 남해안 지역이었다. 이 선박의 최종목적지는 당시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였으며, 수취인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김준(金俊)과 중방(重房), 삼별초(三別抄) 등 무인세력이었다.


이처럼 마도선은 실려 있던 화물의 선적지와 도착지를 비롯해 수취인까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인들의 식생활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바로 각종 해산물과 젓갈의 존재가 그것이다. 전라도의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인 젓갈은 당시 개경사람들도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로, 이것이 다양한 크기의 도기항아리에 담겨 개경이나 강화도와 같이 원거리에 위치한 지역까지 운반되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마도선의 목간자료에 기재되어 있는 젓갈은 고등어젓[古道醢], 게젓[蟹醢], 전복젓[生鮑醢], 홍합젓[䗊醢], 알젓[卵醢] 등으로 다양하다. 도기항아리 중에는 새우젓으로 보이는 유기물이 담겨져 있는 상태로 인양되거나 게 껍질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어 목간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젓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외에 도기항아리에는 전복[生鮑]이나 물고기기름[魚油]을 담기도 했다.


다양한 종류의 젓갈 중  알젓은 당시 귀한 식품 가운데 하나로, 고려말 조선초 사람인 권근(權近)도 자신에게 알젓을 보내준 사람에게 사례하기 위한 시를 쓰기도 하였을 만큼 별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알젓은 귀한 식품 중 하나로 왕실에 바치는 진상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조선에 요구하는 품목 이었다. 이와 같이 당시 남도의 특산물 중 하나인 여러 종류의 젓갈이 실제로 개경까지 운반되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마도선의 목간과 도기항아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림 1] 태안 마도 1, 2호선 인양 도기항아리(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발굴)


한편 마도 1, 2, 3호선에 인양된 도기항아리는 당시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판매자와 중간상인이나 관리자, 최종 소비자가 동의하는 양의 단위를 반영한 양기(量器)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도선에서 인양된 도기항아리는 크기와 형태에 따라 몇 개의 그룹으로 묶을 수 있는데,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보고서에는 도기호의 용량을 측정한 데이터가 실려 있다. 이것을 목간자료 중 도기항아리에 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식품, 구체적으로 젓갈과 매치시켜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마도 1호선에서 확인된 목간 중 죽산현에서 개경에 있는 교위 윤방준 댁에 게젓 한 항아리를 올린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0913-I13-죽찰), 여기에서는 한 항아리에 4두가 들어간다고 하였다[竹山縣在京校尉尹邦俊宅上 蟹醢壹缸入四斗].



[그림 2] 마도 1호선 출수 0913-I13-죽찰


고려시대 도량형제도에 근거하면 당시 4두는 약 13.6L로, 이 정도 양이 들어가는 도기항아리가 실제로 같은 배에서 인양되었다.



[그림 3] 마도 1호선 인양 도기항아리(4두용)


또한 마도 3호선에서는 홍합젓을 3두용 항아리에 담았는데[䗊醢一缸入三斗玄礼], 3두인 약 10.2L를 담을 수 있는 도기항아리가 30점 정도 인양되었다.



[그림 4] 마도 3호선 인양 도기항아리(3두용)


이외에 목간자료 중 5두와 2두용 도기항아리가 각각 있었다는 점이 기재되어 있고 이에 대응하는 항아리들이 실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마도선에서 확인된 다양한 크기의 도기항아리는 젓갈을 담았던 용기로, 이것은 고려시대에 통용되었던 일정한 양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제작된 일부 도기항아리가 일정한 양을 나타내는 용기로 충분히 기능하였던 사실을 말해 준다. 또한 이렇게 도기가 양기로 기능하기 위해 도기장인들이 제작단계부터 용도와 크기를 구분하여 제작했음을 증명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국가적으로 공인된 완전한 도량형을 반영한 것은 아닐지라도 도기항아리가 암묵적인 동의하에 도기 제작자뿐만 아닐 도기에 물품을 담아서 유통시키는 판매자 및 중개자, 구매자가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양기가 존재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젓갈이나 기름처럼 도기에 담아야 하는 식품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합의하여 인식한 단위를 나타내는 용기로 도기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