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 걸음 더] 우주선 ‘지구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한국 근현대 생태환경사 연구 제언

BoardLang.text_date 2018.08.03 작성자 고태우
 




  • * 우리 연구회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하고 있는 <한국사연구의 현장>(가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지난 2017년 9월 회원 여러분께 처음 말씀드리고 원고를 모집하기 시작된 뒤 짧은 집필 기간에도 불구하고 60명 가까이 되는 회원들이 약 70편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사전 기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분과별로 12~15편 씩 균형도 잘 맞추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집 원칙 등을 정하고 원고에 대한 일차 검토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푸른역사’와 출판 계약을 맺고, 연구회 3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2018년 9월 1일 간행을 목표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출판사의 초교를 마치고 필자들께 수정과 보완을 부탁드린 상태입니다.

<한국사연구의 현장>(가제)은 우리 연구회 회원들이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구 주제를 드러내는 책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구회의 연구 역량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향후 10년까지 한국사 연구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논문 쓰기에 익숙한 우리 연구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발표하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함으로써 연구자 간 정보 교류를 촉진하고, 더 나아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출간을 통해 연구회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이 우리의 지난 발자취를 회고할 뿐 아니라 앞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익주(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중세1분과)








한국사연구의 현장


우주선 지구호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한국 근현대 생태환경사 연구 제언-


 

고태우(근대사분과)


 

풍요를 가져다 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광범한 관개농사가 지금의 황량한 사막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처럼, 거대 석상을 세우던 라파누이Rapa Nui(Easter Island) 사람들이 언젠가 자신들의 터전을 스스로 갉아먹을 것을 몰랐던 것처럼, 우리의 문명은 훗날 극심한 기후 변화와 대멸종의 와중에 ‘인류세Anthropocene’를 마감한 것으로 기록될지 모르겠다. 그 역사의 한 페이지가 지금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등 세계의 권위 있는 기관 및 단체의 조사 보고에 따르면, 인류가 현재 추세로 현재 상태의 소비와 생산양식을 계속해 온실가스를 배출할 경우 금세기말 지구온도가 3~4도(최대 5~6도) 오를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로 인해 우리 자신과 영문도 모르는 많은 생명체의 앞길은 장담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온실가스가 인위적으로 더 이상 배출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그동안의 탄소 배출에 의해 기후변화와 그 영향은 수세기에 걸쳐 계속될 전망이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구 생태계에서 ‘암적’ 존재가 된 듯한 인류의 삶을 깊이 반성하고, 인류와 동식물, 자연환경이 오랫동안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며 실천해야 할 것이다. 공존의 길, 곧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인문학, 역사학이 기여하는 작은 방법으로서 생태환경사의 관점을 제기하고 싶다.

 

그렇다면 생태환경사ecological and environmental history란 무엇일까? 먼저 환경사environmental history는 지구 생태계에서 인간의 특별한 위치에 주목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포착하는 행위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분야라 할 수 있다. 이는 1960~70년대 서구에서의 환경운동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바 있다. 여기에 생태환경사는 기존의 환경사와 달리 ‘생태학적 전환ecological turn’의 의미를 결부시킨 환경사의 확장판 정도로 상정할 수 있다.

 

인간은 여타 동식물에 비해 자연을 길들이는 문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에 생태계라는 연결망 속에 핵심 고리로 위치한다. 이를 고려할 때 분석의 중심도 인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지구 생태계에서 인간의 특별한 위치를 염두에 두는 기존 환경사의 시각을 공유한다. 그렇지만 여기에 ‘생태학적 전환’이라는 관점을 취하는 까닭은 인간을 더 이상 자연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닌 생태환경과 공존하는 생태계의 한 고리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생태환경사는 사람과 자연환경의 관계에 관한 역사를 추구하며, 현재 생태환경문제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는 연구이면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추구해온 역사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태환경사는 인간의 자연 정복 욕망을 비판하고 성찰할 수 있다. 이로써 끝없는 경제성장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 근대 문명이 추구해온 생산력 지상주의, 물질문명에 대한 단선적인 진보관을 거부한다. 이 점에서 생태환경사는 근대가 남긴 부정적인 산물을 반성하고 근대의 여러 함의를 재성찰하게 해주는 동기가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성찰적 근대화’ 또는 탈근대를 지향한다. 이렇게 생태환경사 연구는 현재의 생태환경문제에 대한 역사학계의 학문적 대응이자 작게나마 현실 참여의 의의를 갖는다.

 

물론 환경사 내지 생태환경사에 대한 정의가 세계의 여러 학계에서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고, 이 글도 역시 하나의 입장을 더 보태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백가쟁명이 필요한 학계에 하나의 관점, 시각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향후 생태환경사 연구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다음 몇 가지 문제를 언급해두고 싶다.

 

우선 방향에 관한 것이다. 주변 동아시아나 서구 학계의 경우처럼 한국에서의 생태환경사도 기존의 생활사와 같은 ‘환경의 역사’, 곧 분야사로서의 생태환경사가 될지, 아니면 역사를 새롭게 보는 ‘새로운 역사학’으로서의 생태환경사가 될지의 문제가 있다. 환경사 연구가 일천한 한국 학계에서 전자처럼 생태환경사가 기존의 정치사나 경제사와 같은 하나의 분류사, 역사학의 한 분야로 정립하는 방식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태환경사는 적극적으로 후자를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싶다. 현재 사회체제와 생활 패턴을 바꾸지 않는다면, 여러 생물체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인류가 그나마 남은 다른 생물체와 친구로서 공존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너무나도 상식적이지만 잠시 잊고 있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명제를, 최소한 생태환경사가 역사 속에서 발굴해 인문학적 성찰을 제공하고, 지구 공존의 삶을 위해 행동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이러한 ‘지속가능한 세상’의 밑거름을 제공할 연구를 위해서는 여러 많은 과제가 있을 줄로 안다. 비판적 안목에서 역사학 연구방법론을 더 다듬을 수 있는, 단순히 분야사를 넘기 위한 방법론은 무엇이 있을지, 어떤 소재를 통해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을지, 치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는 상투어일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생태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자연과학의 언어에 능통해야 하고, 과학의 방법을 역사 영역에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학문 분과 간의 방법론 차이에서 빚어지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려는 인내심도 요구된다. 학제 간 협업이 더욱 요구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끝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 영역에서 생태환경사가 기여할 수 있는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세계 환경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존 맥닐John Robert McNeill의 저작 《20세기 환경의 역사Something New Under the Sun》와 같이 ‘20세기(또는 21세기) 한국의 환경사’를 주제로 공동연구를 진행하자는 생각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여러 각도로 기획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다음과 같은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 20세기(또는 21세기) 에너지사이다. 또 다른 환경사가 앨프리드 크로스비Alfred W. Crosby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태양의 아이들Children of the Sun’일 뿐이다. 현재 기후변화의 주요한 원인인 석탄과 석유 등 화석에너지 사용 문제, 현재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원자력(핵 발전)에 대한 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환경 변화 및 공해, 또는 재난에 관한 역사를 본격적으로 구성해볼 수 있다. 한국의 지난 20세기는 존 맥닐도 언급했듯이 ‘방탕한 세기’였고, 이는 최근까지도 4대강 사업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 미세먼지 문제로도 이어지고, 불행하게도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에 관한 진지한 검토와 반성이 절실한 시점이다.

 

셋째, 경제성장 신화의 망딸리떼 연구, 또는 소비사회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이다. 전 세계인이 미국인의 ‘캘리포니아 드림’을 꿈꿀 때, 지구적 위험수위는 한층 높아져간다. 이는 불가피하면서도 남북문제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함께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이와 관련하여 분단체제 아래 세계적으로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해온 한국의 상황을 검토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넷째, 환경 변화 내지 오염, 재해에 대응해간 지성사로서의 생태사상사 및 환경운동의 역사, 지속가능성을 추구해간 여러 인간 활동의 역사도 더 면밀한 고찰이 요구된다.

 

한국학계에서 생태환경사 연구가 주변 동아시아나 서구학계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의 연구 영역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예시는 그 영역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한편으로 성찰 및 연구와 행동은 또 다른 문제이다. 동식물이 사라지고 인간의 생활양식의 변화를 알게 되어 인문학적 성찰을 주더라도 결국 사회와의 긴밀한 의사소통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이에 역사학이 지구생태계의 생존문제를 환기하고 문제를 풀어갈 작은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큰 다행일 것이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