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痢疾), 무너미 땅의 역습

BoardLang.text_date 2017.02.27 작성자 김동진
 

김동진(중세2분과)



4. 이질(痢疾), 무너미 땅의 역습


 

15~16세기에 수인성 질병인 이질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질병이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질은 벼농사를 중시하고, 냇가를 개간한 조선이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었다.

조선은 15세기부터 천방을 만들어 무너미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고,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벼농사를 보급하였다. 벼농사를 짓는 논[水田]은 밭 위에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짓는 독특한 농업 시설이었다. 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설사에 시달리고, 이질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국왕으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지위를 가리지 않으며, 나이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으며, 병에 걸린 자는 누구나 전염원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비슷한 증상을 겪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질은 만인에게 평등한 병이었다.

다음 [그림 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실록’에 나타난 이질에 대한 기록은 벼농사의 확대가 이질의 발생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15세기 초반 급증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18세기 초에는 기록이 크게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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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연대기 기록에 나타난 이질 발병 추이 (검색어 : 痢)


 

그러나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는 18세기~19세기 전반까지 여전히 높은 빈도로 이질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이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만들게 된 것일까? 빈번한 발생에도 불구하고 이질을 역사적으로 기록하는 방식에 차이가 나타났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이질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변화되어 그 심각성이 감소된 측면과 수인성 질병인 이질의 발생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거나 혹은 감소하는 생태환경적 변화가 나타났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찾을 수 있다. 또한 수인성 전염병의 확산을 초래하는 생태환경적 조건을 이해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적극 시도된 점도 주목할 수 있다.

먼저 생태환경적 측면에서 살펴보자. 15~16세기의 천방에 의한 농지개간은 무너미의 땅을 수전으로 전환하였고, 이는 일시적으로 침수되는 숲[藪]이 벼농사가 이루어지는 뜨거운 여름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위적 습지를 조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반도의 하천 변에 분포하는 넓은 무너미의 땅이 숲[藪]에서 일종의 늪지인 논[水田]으로 개발되면서 무너미 땅은 건조한 기후에 적합한 미생물의 생태계에서 습한 기후에 적합한 새로운 미생물 생태계로 바뀌었다. 이러한 습지의 생태계에서 번성하는 모기류는 말라리아[虐疾]를, 수인성 세균인 병원성 살모넬라 균과 시겔라(Shigella)균은 장티푸스 1) 와 이질 2) 의 발병율을 크게 높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농지개간의 중심축이 천방에 의한 무너미 땅의 개간에서 화전에 의한 산지 지역의 개발로 전환하였고, 이는 수인성 전염병의 발생을 크게 줄이거나, 그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농법의 측면에서도 17~18세기에는 하삼도의 벼농사에서 이모작과 이앙법이 확대되었고, 이는 이른바 문전옥답으로 쓰이던 마을에 인접한 논의 사용법을 변화시켰다. 그 가운데 논에 물을 가두어 두는 기간을 줄인 만큼 수인성 질병의 감소 내지 약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조선에서 발전시킨 향약의술이 15~16세기에 빈발한 수인성 질병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한 것과 관련이 있다. 15~16세기에 이질이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는 생태환경이 조성된 이래 의학계에서도 이질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 결과 17세기에 이르면 이질은 통제 가능한 질병으로 전환되었다.

의서에서 이질의 치료법을 처음 언급한 것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과 15세기 전반인 세종 15년(1433)에 편찬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초인 광해군 2년(1610)에 편찬된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그 상세한 치료법이 나타나 있다. 3)

허준이 분류한 이질은 적리(赤痢), 백리(白痢), 적백리(赤白痢), 역리(疫痢) 등 무려 17종에 이를 정도로 다양한 것이었다. 4) 오늘날의 기준에서 이질의 다양한 증상에 대한 구분이었지만, 일정한 부분에서는 오늘날의 의학적 지식에 근접하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후의 의서들은 허준의 견해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이는 허준이 제시한 처방이 이질의 치료에 일정한 정도 효험을 발휘했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로 전염병의 발병과 확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에 근거하여 전염병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의 확산에 주목할 수 있다. 17세기 초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지방의 수령과 의생들에게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광해군 5년(1613)에 편찬된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에서 허준은


온역의 원인은 도랑의 물이 빠지질 않아 더러운 오물이 씻겨나가지


못하면 (병의 기운이) 훈증(薰蒸)되어 병이 생긴다. 5)


 

라며 오염된 물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이라고 하였다.

그러하다면 이질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계절은 언제일까? 조선시대 계절을 구분하는 기준에 따라 봄(1~3월), 여름(4~6월), 가을(7~9월), 겨울(10~12월)로 실록의 기사에 나타난 이질에 대한 기록을 세기별로 분류한 것이 다음 [그림 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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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실록’의 계절별 이질관련 기사


 

음력의 특성, ‘실록’이라는 기록의 한계가 있겠으나 <그림 3>에서 살필 수 있는 이질의 발생은 여름보다도 가을이 그 빈도가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효종 6년(1655)과 현종 9년(1668)의 연대기 기록은 이를 더 잘 보여준다.

 

함경도 북청부(北靑府)에 이질(痢疾)로 사망한 자가


1백 5십여 인이나 되었다.


(孝宗實錄 15卷, 孝宗 6年 10月 丁丑)



충청감사의 서목(書目)에 덕산군수가 올린 보고에 “경내에서 이질로 사망한 노약자가 많게는


100여 명에 이르니 매우 놀랍고 비참한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承政院日記 11冊, 顯宗 9年 8月 戊辰)


 

라고 한 바와 같이 이질로 100명 이상의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하였음이 보고된 시기 역시 가을과 겨울이었다. 이를 통해 더위로 세균이 최대로 번식된 이후 사람들이 사는 곳곳에 잠복해 있던 균과 접촉하여 발병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더위기 서서히 식어갈 무렵 오히려 발병이 본격화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백성들의 삶을 되돌이켜 볼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논에서 벼베기와 탈곡 등 수확을 하는 등 일이 많거나, 추수 후 마을 단위의 잔치 등으로 여러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잦아진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이질에 집단적으로 감염되거나,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 장티푸스(腸-, typhoid fever)는 살모넬라 균의 일종인 Salmonella enterica serovar Typhi에 의한 급성 전신 감염 질환이다(위키백과)
2) 이질(痢疾, Dysentery)은 대장에서 발병하는 급성 또는 만성 질병이다. 전형적인 증세로는 액체와 같은 소량의 설사에 피와 점액이 섞여 나오며 심한 복통이 따른다. 세균성 이질의 원인균은 이질균으로 장 점막의 상피세포에 정착하여 증식함으로써 감염증상을 일으킨다(위키백과).
3) 오늘날 세균성 이질에 해당하는 역리(疫痢)가 함께 사는 사람들끼리 누구에게나 쉽게 전염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처방으로 늙은 생강을 이용한 생강차탕[薑茶湯]으로 다스리라고 처방하였다.
4) 『東醫寶鑑』 內經篇 卷4 大便條.
5) 『新纂辟溫方』, 瘟疫各有所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