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서동요”로 본 백제의 정치구조 정동준(고대사분과) 드라마 “서동요(薯童謠)”는 정통사극이라기보다는 퓨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루고 있는 부분의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작자들의 관심이 지금까지 주로 연구된 분야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에 쏠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청률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성공하기 어려웠던 각종 발명 관련 에피소드들(한날 칼[刀], 황무지 개간, 온돌, 명광개(明光鎧), 종이, 무늬 비단[錦]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의 내용들은 대체로 ‘사실’보다는 ‘허구’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준 낮은 작품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온당한 평가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림 1> "서동요" 명광개(16회) (출처: www.sbs.co.kr) 영상물에서 사실과 허구의 관계라는 것이 자료적 고증에 충실한 사실의 비중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는 데다가, 그러한 작품일수록정작 허구 부분이 부실하게 될 가능성도 높다. 또 허구라는 장치는 극적 흥미를 더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당시의 시대성을 사실 이외의 부분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허구가 잘 만들어진 영상물이야말로 잘된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백제의 정치구조는 드라마 전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52~54회에 드러나는 무왕(武王)과 귀족들 간의 대립 장면에 대한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중심적인 장치로 부각되는 정사암회의(政事巖會議)에 대해서 서술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기타 몇몇 관직들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림 2> 호암사지(츨처: 문화재청 ) 정사암회의는 최근 방영되는 “선덕여왕(善德女王)”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 신라의 화백회의(和白會議)와 유사한 성격의 귀족회의체이다. 정사암회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설명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합의를 기본으로 하는 귀족적 성격의 회의라는 데에는 대다수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화백회의와도 공통되는 점이다. <그림 3> "선덕여왕" 화백회의 장면 (출처: www.mbc.co.kr) 차이가 있다면, 화백회의의 참가자격이 진골(眞骨) 귀족인 대등(大等)이고 그 의장이 상대등(上大等)인 것과 달리, 정사암회의의 참가자격은 백제의 16관품(官品) 중 제1품인 좌평(佐平)이고 그 의장이 상좌평(上佐平)이라는 것이다. 혈연적 요소가 강조되는 신라와 귀족관료적 요소가 강조되는 백제의 차이가 대비되는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신라는 지배층을 이루는 진골 귀족이 혈연으로 복잡하게 연결된 혈연적 공동체인 반면, 백제는 왕족과 귀족들이 종족, 혈연적으로 다른 데다가 고구려의 지배층과 같은 지연적인 요소까지도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정사암회의는 화백회의처럼 최고귀족층의 합의에 의해 왕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매우 막강한 권력을 가지는 것은 물론 왕에게도 가장 큰 압박이 될 수 있는 존재이다. 실제 드라마에서처럼 정사암회의가 의결한 상주문(上奏文)을 올려 왕에게 질의를 할 수 있었는지는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가능할 정도의 권력이 정사암회의에 주어져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삼국시대의 모든 귀족회의가 그러하듯이 때로는 왕의 폐위까지도 결정할 정도이니, 드라마에서처럼 국가 간의 문제로 왕을 압박하는 일 정도가 불가능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역사라는 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보니, 같은 삼국시대라고 하더라도 초기와 말기의 귀족회의는 엄연히 성격이 달랐다. 초기의 귀족회의는 비록 의장이기는 하더라도 왕조차도 그 성원으로서 참여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취약한 왕권 위에 존재하였던 것이기에, 사실상 왕과 귀족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지배자공동체의 최고지배기구였다. 이러던 것이 점차 왕권이 성장하면서 왕과 귀족의 구분이 뚜렷해지자 귀족회의의 의장이 왕이 아닌 최고의 귀족관료로 바뀌게 되었다.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 백제의 상좌평, 신라의 상대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속성이 강하지만, 기본적으로 왕과 귀족을 매개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왕권과의 관계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권이 귀족들과의 대립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려면, 결국 귀족회의체 의장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여 귀족회의체를 조종하거나 귀족회의체 성원들을 최대한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인물로 채우는 수밖에 없었다. 백제에서도 무왕 시기에 후자에 해당되는 개혁이 시도되었다고 추정되는데, 그것이 바로 6좌평제의 실시이다. 기존의 좌평이 정사암회의의 구성원으로서 특정한 직무 없이 국정 전반에 폭넓게 개입하는 존재였다면, 6좌평은 가능한 직무가 규정되어 이전의 좌평보다 권한이 축소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6좌평들이 중심이 되어 모이는 정사암회의 또한 국가 전반의 정치적 의사결정보다는 보다 실제적인 행정 문제를 전반적으로 처결하는 재상회의(宰相會議)에 가까운 성격이 되기 쉬웠다. 이러한 개혁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귀족들과의 격심한 대립 이후 실시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어쨌거나 귀족이라는 존재의 속성이나 왕권과 귀족의 대립 계기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짚어내었다는 점에서, 허구이긴 하지만 이 정치적 갈등 장면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싶다. 다만 드라마 전반에 흐르는 “황제” 운운과 같은 호칭 문제는 이러한 훌륭한 허구를 가려버리는 옥의 티라고 지적하고 싶다. 흔히 ‘건원칭제(建元稱帝)’라고 하여 연호의 사용과 황제 호칭의 선언을 동일시하기 쉽지만, 중국사에서도 분열기에는 황제 호칭 없이 연호만 사용하는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삼국도 마찬가지여서 고구려는 ‘태왕(太王)’ 또는 ‘호태왕(好太王)’, 백제와 신라는 ‘대왕(大王)’이라는 호칭은 썼을지언정 황제 호칭은 사용한 적이 없다. 오히려 황제가 중국 역사상의 발명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호칭의 사용은 한화(漢化) 내지 중국화(中國化)의 지표라고 할 수 있기에 황제 선언을 통해 독립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영상물 제작진의 의도와도 모순된다고 지적하고 싶다. 오히려 배경이야 어찌되었건 앞서 제시한 여러 호칭을 쓰는 것이 중국왕조와는 구분되는 독립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강조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드라마에 등장하는 몇몇 관직이나 관사제도 전반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관직은 뭐니뭐니 해도위사좌평(衛士佐平)이다. 사료상으로는 시위군이나 국왕 호위에 관련되는 일을 총괄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궁궐이나 도성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어 사료의 기록에 약간의 상상력이 더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4> "서동요" 위사좌평 부여선(김영호)과 내신좌평 우영공주(허영란) 문제는 위사좌평이 궁궐이나 도성의 출입 통제에 그치지 않고 국왕에게 올라가는 문서까지도 통제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위사좌평으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한 부여선(扶餘宣) 즉 법왕(法王)이 대사 속에서 스스로 인정했듯이 본래 위사좌평의 권한 밖의 일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잠정적으로 월권행위를 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왕에 즉위한 이후에는 그것을 원상회복시 키려 하였다. 본래 국왕에게 올라가는 문서의 통제라는 직무는 드라마 후반부에 중시되는 내신좌평(內臣佐平)의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위사좌평이 관할하는 관사의 명칭을 위사부(衛士府)라고 상정하고 있다. 그리고 위사부에는 좌평 아래에 달솔(達率), 은솔(恩率) 등 여러 관인이 존재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22부에 속하는 다른 관사도 비슷하여 솔계(率系) 관품의 소지자는 물론 고덕(固德), 계덕(季德), 대덕(對德) 등 덕계(德系) 관품의 소지자까지도 여럿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료상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역사적인 논리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관료제가 가장 발달하였다는 역대 중국왕조를 보더라도, 위사부나 22부 정도의 1개 관사에 관품체계상 중간층 이상이 되는 관인이 중층적으로 다수를 이루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초기에는 장관-실무책임자 나중에는 장관-차관-실무책임자 정도의 간단한 구조이고, 인원도 보통 1개 관직당 1명이거나 많아야 다 합해도 5명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래 고대의 관사제라는 것은 실무를 집행하는 하층 관인이나 서리가 많이 필요한 법이어서, 백제에서 상층이나 중간층에 해당하는 솔계나 덕계 관품 소지자가 1개 관사에 그렇게 많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사료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제작자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상층이나 중간층의 관인이 많다면 일이 제대로 집행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상물이라는 건 사료에 입각한다고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고, 사료에 없는 내용이라고 해서 함부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허구’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