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침은 예보에도 없던 비와 함께 했다. 젖은 땅과 습한 공기는 어제 마신 술로 숙취가 심한 몸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근처 국밥집에서 순대국이라도 한 그릇 시원하게 했으면 좋으련만 이곳은 중국이다. 각자의 손에 쥐어진 만두 2개로 간단히 아침식사 겸 해장을 마친 우리는 미창구 장군묘(米倉溝將軍墓)로 향했다.
[사진1]미창구 장군묘(米倉溝將軍墓) 전경ⓒ이승호
[사진2] 미창구 장군묘(米倉溝將軍墓) 주변을 휘감아 흐르는 혼강 ⓒ이승호
무덤은 미창구(米倉溝) 촌락 일대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차에서 내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언덕길을 오르다보니 제법 큰 규모의 봉분이 나타났다. 봉분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무덤이 위치한 마을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천혜의 지형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침 안개 속에 바라본 주변 일대를 휘감아 흐르는 혼강의 경치가 무척이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사진3]오녀산성 박물관에 복원된 미창구 장군묘 내부 전경 및 자흔 ⓒ이승호
미창구 장군묘는 환인 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대형 고구려벽화무덤으로 피장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오녀산성 박물관에 복원된 미창구 장군묘 내부 전경을 보면 무수히 많은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벽면 가득 그려진 연꽃무늬 밑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王 国 金” 등의 글자들이 보였다. 이곳에 묻힌 피장자를 추측해볼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글자들을 유심히 관찰해보았지만 어제 밤 마신 술이 어김없이 나의 사색을 방해한다.
[사진4] 오녀산성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일부ⓒ이승호
미창구 장군묘에 답사를 마치고 찾은 오녀산성 박물관은 한산했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필자는 연신 셔터소리를 내며 사진을 찍다가 박물관 관계자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필자는 ‘사진촬영 금지’ 푯말을 정말 보지 못했다. 박물관 관계자의 시선이 꽤나 매섭고 날카롭다. 이번에 답사를 가게 될 고대사분과 선생님들께서는 이점을 꼭 유의하시기 바란다. 본의 아니게 ‘어글리 코리안’이 된 심정은 꽤나 억울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라도 건진 몇 장의 사진들이 상당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특히 비록 복제품이지만 망강루 적석총에서 출토된 금제 귀걸이 장식을 사진으로 담아 온 것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사진5] 안개 속 오녀산성 계단길 계단을 오르다보면 오른편에 1차 차단벽이 보인다 ⓒ이승호
오녀산성 박물관 관람을 마친 우리는 고대하던 오녀산성(五女山城)을 오를 수 있었다. 막 내린 비로 안개가 자욱이 낀 가파른 계단 길은 정말 신비로웠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명성왕 4년 조를 보면 “4월 운무(雲霧)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이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치 못하였다.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라고 적혀있는데, 바로 그 이야기처럼 오녀산성은 운무가 자욱한 가운데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어제의 술자리를 저주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계단을 오르길 10여 분, 계단길 오른편으로 산성의 1차 차단벽이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르며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또 다시 오르길 10여 분 드디어 산성의 정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문지에 도착했다.
[사진6] 오녀산성 성문지 당시 문지는 공사 중이었다 ⓒ이승호
[사진7]오녀산성 내부 건물지ⓒ이승호
우리는 오녀산성 정상에 모여 잠시 숨을 고르며 목을 축였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나는 쓰레기통 옆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중국인 관광객 옆으로 가 자연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렇게 숨을 고르며 휴식을 취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방송이 들려왔다. 얼핏 듣기에도 이곳은 금연구역이니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얘기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서있는 곳 바로 앞에는 감시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었고, 카메라의 렌즈는 정확히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총에 맞은 기분이었다. 내 옆에서 함께 담배를 태우던 중국인 관광객은 절묘하게 감시 카메라의 시선을 피한 사각지대에 서있었다. 두 번째 ‘어글리 코리안’이 되는 순간이다.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 윤선태 선생님께서는 연신 “스미마셍! 스미마셍!”을 연발하셨다.
나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우리는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했고, 우리의 짧은 휴식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를 더욱 곤혹스럽게 한 것은 내가 입에 담배를 물자마자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이 신성한 곳에서 감히 네가 담배를 피우려 했단 말이냐!”라는 엄한 질책을 내리는 것처럼 하늘은 거센 빗방울을 쏟아냈다. (여러분 오녀산성은 전 지역이 금연구역입니다. 저의 잘못을 반성합니다) 소나기에 흠뻑 젖어 오녀산성을 내려온 우리는 간단히 개인 정비를 마친 후 차에 올랐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집안시를 향해 빗길을 시속 100km로 달렸다. 매우 안전하게.
[사진8]집안시로 들어가는 길ⓒ이승호
집안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시간 상 빨리 도착하면 대형 고분 유적 두 곳과 집안 시내 일대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환인에서 집안까지의 거리를 그저 인천에서 서울 가는 거리 정도로만 생각했던 나의 무식함과 어리석음과 철없음이 빚어낸 망상이었다. 택시로 꼬박 4시간을 달려 집안시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해가 있는 동안은 답사를 계속하기로 한 우리는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사진9]마선구(麻線溝) 2100호분ⓒ이승호
집안 지역에 들어와 답사한 첫 유적은 마선구(麻線溝) 2100호분이었다. 마선구 2100호분은 비교적 큰 규모의 계단식적석총으로 그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으로 인정되고 있다. 원래는 7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4단만이 남아 있는 이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 현재 소수림왕, 미천왕, 봉상왕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마선구 2100호분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두워졌다. 더 이상의 답사는 무리라고 판단한 우리는 그렇게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짐을 풀고 젖은 옷을 말리며 잠시 정비 시간을 가진 뒤 압록강변의 식당가를 찾았다. 새까만 압록강물이 조용히 흐르는 밤, 우리는 그 풍경을 감상하며 각종 꼬치구이 메뉴에 지속적인 알콜 섭취에 돌입했다. 역사 전공한다는 8인은 그렇게 어제의 일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술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