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여름 내몽고 답사기 #3] 북방민족의 흔적을 찾아서③ : 답사 여섯째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이야기 이충선(중세1분과)
답사 6일차의 일정은 원 상도 유적과 원상도유적박물관(元上都遗址博物) 그리고 장가구(张家口)로 이동해 대경문 유적을 보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이렇게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파림우기에서 정람기 까지는 대략 350km 정도의 먼 거리였습니다.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정람기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를 넘어서였습니다. 저희는 우선 정람기에 도착해서 점심식사를 하고 원상도유적박물관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박물관은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내부 공사 중이라서 박물관이 폐쇄되었고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직원의 말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장장 4시간을 달려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허탈한 마음이 컸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고 上都유적을 보기 위해 출발했지만 상도까지 가는 길이 비포장도로였던 게 문제였습니다. 도로가 공사 중이라 갈수가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비포장도로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포장된 도로였다면 30여분이면 갔을 거리를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도착하게 되었고,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가 다된 시간이었습니다. 상도는 쿠빌라이가 중국인 류병충(刘秉忠, 1216—1274)에게 1256년 도시건설을 지시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263년에 상도로 개칭하였고, 같은 해 베이징에 大都를 건설하면서 상도와 대도를 오가는 체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358년 홍건적에 의해 불타면서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후 상도는 황폐한 초지로 남겨지게 되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상도의 구조는 궁성 ‧ 황성 ‧ 외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황성의 정문인 明德門을 지나서 대로를 따라 궁성의 정남문인 御天門을 거쳐서 중앙의 대안각(大安閣)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유적은 이전에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정부가 복원을 목표를 하고 있는데요. 저희가 다닌 코스 이외에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유적은 현재 입구에서부터 도로를 포장하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훨씬 수월하게 유적을 관람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상도는 성곽의 둘레만 9km 정도의 거대한 성으로서 걸어서 둘러보기에는 힘든 유적입니다. 매표소에서 명덕문까지는 전동차를 타고 10분 정도를 가야했습니다. 명덕문 앞에서 하차해서 한참을 걸어서야 어천문에 도착했습니다. 거리가 대략 1km 정도인 것 같습니다. 성벽은 흙을 쌓고 돌과 벽돌을 이용하여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허물어지고 풀이 무성해서 가까이 가서야 성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안각을 지나서 저희는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서 상도의 궁성 성벽까지 둘러보고 그날의 일정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6일차 일정은 원 상도 유적을 보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언제 다시 올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온다면 좀 더 며칠의 시간을 두고 상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6시가 넘어 상도 유적을 뒤로 하였고, 돌아갈 때에도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올 때보다는 빨리 나와서 1시간정도 소요됐고 정람기로 다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한 저희는 저녁 8시에 숙소가 있는 장가구(张家口)로 출발하였습니다. 장가구까지 240km 정도의 거리였고, 밤새 차를 달려서 밤 12시에야 도착해 겨우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7일차 일정은 전날 일정에서 갈수 없었던 대경문(大境門)을 가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대경문은 청나라 순치제 때인 1644년에 축조된 관문으로 몽골 ‧ 한족 ‧ 회족 ‧ 장족 등 다양한 민족이 교류하는 장소이고, 청대(1644-1911) 북방지역의 중요한 상업적 도시로 노륙상부(路陆商埠), 피도(皮都)로 불렸다고 합니다. 저희가 아침에 대경문에 도착했을 때는 한창 보수 공사 중이라 조금은 어수선한 상태였습니다.
대경문을 둘러보고 나서 저희는 선화요대벽화묘군(宣化辽代壁画墓群)으로 이동했습니다. 선화현 하팔리촌(下八里村)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택가 안에 위치해 있어서 좁은 골목길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찾는데 조금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곳은 1973년부터 시작하여 여러차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요나라 대에 감찰어사(监察御史)였던 장세경(张世卿)의 묘(천경 6년, 1116)를 시작으로 해서 총 9기의 벽화묘가 발굴되었고, 이를 통해 장씨 일족의 벽화묘군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벽화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2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 볼수 있는건 장세경의 묘뿐이었습니다. ‘그림 16’에 나오는 벽돌로 지은 건물이 장세경의 묘 입구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흰색의 봉분처럼 보이는 것이 발굴 된 다른 벽화묘 입구입니다. 발굴 이후에 저렇게 입구를 봉해놓고 있었습니다.
묘실은 지하 4~5m 정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묘실 벽에는 벽화가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그림이 채색되어 있었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악기를 다루는 악사들로 구성된 여러 인물들을 표현한 산악도(散樂图)가 前室에 채색되어 있었고, 안쪽의 后室에는 벽면에 차와 술과 같은 음식을 통해 연회 등을 준비하는 다도도(茶道图) ‧ 출행도(出行图) ‧ 시녀도(侍女图) 등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천장에는 천문도가 그려져 있었고요. 벽화의 그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당대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 했습니다.
이후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계명역성(鷄鳴驛城)으로 이동했습니다. 계명역은 1219년 칭기즈 칸이 군대를 이끌고 서역을 정벌할 때 설치된 역참으로 명 영락 18년(1420)에 확대되어 베이징으로 통하는 주요 역참의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명 성화 8년(1472)에 흙으로 담 벽을 쌓았고, 융경 4년(1570)에는 벽돌로 수축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성벽은 15m 정도의 높이로 벽돌로 쌓았으며, 내부는 황토로 채웠습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예전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내부에는 명청(明淸) 시기에 건립한 묘우(廟宇)가 17여개에 달하는데 대부분이 관리가 잘되어 있었습니다.
계명역을 마지막으로 저희는 7일차 일정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북경으로 들어가면서 이제 8일간의 일정이 끝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8일차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간곳은 북경시내에 위치한 요금성원박물관이었습니다. 저희가 8일간 다닌 일정 중에서 유일하게 본 금나라와 연관된 답사지였습니다. 이 박물관은 1990년 아파트 건설 과정 중에 금의 중도성 유적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95년 4월에 정식 개방되었다고 합니다. 지하 전시실에 유적이 발굴된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금의 중도 남쪽 성문인 豊宜門 동쪽 수로입니다. 1층 전시실에는 유적 발굴현황과 연구 성과 및 금 중도성의 발전역사 등이 5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뒤로하고 마지막 코스인 천녕사로 향했습니다. 천녕사는 요금성원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천녕사는 북위 효문제 시기에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사찰 내부에 지었던 탑은 목탑이었는데 후에 붕괴되었고, 이후 요대 천조제 천경 연간에 8각 13층 사리전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탑을 세운 사람은 천조제의 숙부인 야율순(耶律淳)이라고 합니다. 몇 번의 개보수가 있었지만 탑은 세워진 이래로 지금까지 내려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탑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나오는데요. 박지원이 북경에 와서 이 탑을 보고 느낀 감상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높이가 대략 60m 정도 되는 이 탑은 탑신부에 부처 ‧ 보살 ‧ 역사 ‧ 비천등의 조각들이 부조되어 있어 요나라의 불교와 미술의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천녕사를 마지막으로 길었던 7박 8일의 답사가 끝났습니다. 저희는 북경 유리창 거리를 구경하고 늦은 점심식사를 한 이후에 베이징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공부할 수 있었던 귀종한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글과 사진으로만 접했던 북방 유목민과 그들이 남겼던 유산을 눈으로 직접 접할 수 있어서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여정이었습니다. [내몽고 답사기] "북방민족의 흔적을 찾아서"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