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여름수련회 답사기】 고창ㆍ부안일대를 다녀와서 박미선(중세사 2분과) 오랜 만의 수련회인 까닭에 대학 신입생 때의 설레임과 긴장감이 팽배했다. 한편으로는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는 불편함과 어색함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답사 전날까지 나의 마음은 갈까 말까 수차례 헷갈렸다. ‘가야지’, ‘아니야, 지금이라도 못 간다고 할까.’ 이렇게 며칠이 지난 7월 3일 금요일 밤. 나는 여행짐을 싸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사람들끼리 있을법한 서먹함과 어색함도 이규철 총무부장 선생님의 특유의 입담으로 일순간 사라져버렸다. 1. 부안군 변산 앞 바다에는 강(江)이 흐르고 있다? 한참을 달려 변산반도에 도착했다. 매운탕에 소주 한 잔을 반주 삼아 점심을 먹고 채석강으로 향했다. 채석강의 한자 이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바다에 왠 강?”이라는 질문에서부터 “채석강의 강이 江이 아니고 암석을 나타내는 강[자갈 강 礓, 또는 언덕, 산등성이 강 岡(崗)]이 아니겠냐”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심지어 한자이름에 대한 내기까지 있었다. 채석강은 한자로 [彩石江]이라고 쓴다. 실제 강이기 때문에 [江]이라는 한자를 쓴 것이 아니라 그 빼어난 절경이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일화와 관계있는 채석강과 흡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의 채석강은 대체 얼마나 뛰어난 경관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 검색 결과(그래서 확실치는 않지만) 중국의 채석강은 광저우시 연화산 북쪽의 바위 협곡이라고 한다(사진 2). 사진으로 확인되는 중국의 채석강은 우리의 채석강처럼 탁 트인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답답해 보인다. <사진 1>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닭이봉 일대를 포함한 1.5㎞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채석강이라고 한다.(@김창수) <사진 2> 중국 광저우시 연화산 북쪽의 바위 협곡. 그렇다면 변산반도의 이곳을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채석강이라고 불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후일을 기약 해야겠다. 부안과 관련된 지역 자료를 좀 더 찾아야겠다는 마음만 먹은 지 일주일이 지나버렸고, 벌써 답사원고를 넘겨야 하는 마감 날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채석강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눈 후 바다를 바라보니, 어느새 편집위원 선생님들께서는 시원한 바닷물 속에 들어가 계셨다. 여름 바다는 ‘지천명(知天命)’의 선생님들까지도 열정적이고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답사가 끝날 무렵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여름바다가 선생님들을 흥분시킨 것이 아니라, 한역연 선생님들의 열정이 답사를 역동적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후 답사코스인 내소사, 고창읍성, 선암사 답사에서도 선생님들은 신입회원인 우리들보다 더 신입같은 활기찬 모습으로 그때마다의 답사를 흥분시켜 주셨다. 우리 한역연 선생님들의 ‘청년의 열정’에 다시 한 번 감탄의 찬사를 보내드린다. 2. 소생(蘇生)과 소원(所願) 다음 답사지는 운치있는 전나무 길이 매력적인 내소사였다(사진 4). 내소사에는 잘 알다시피 한국형 종의 양식을 잘 계승한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천태종의 근본 경전인 법화경절본사경(보물 제278호), 아름다운 꽃 문살과 ‘백의관음보살좌상’이라는 후불벽화가 있는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한 모습을 그린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 등 소중한 문화재가 많은 편이다. <사진 3> 전나무길. (@김창수) 이중에서도 나는 절의 창건설화와 대웅보전 후불벽화인 ‘백의관음보살좌상’에 관심이 쏠렸다. 아마도 요즘 학위논문의 글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나의 답답한 심정이 내소사 대웅전의 아름다운 꽃 창살이나 능가산의 품격 있는 자태보다 그것에 더 관심을 갖게 했는지 모르겠다(사진 4, 사진 5). <사진 4> 꽃 문살. (@김창수) <사진 5> 능가산. (@김창수) 내소사는 혜구두타(惠丘頭陁)가 백제 무왕 34년(633)에 “여기에 들어오는 분은 모든 일들이 다 소생되게 해주십시오”라는 원력에 의해서 창건했다고 한다. 즉, 나 같은 중생들이 이곳에 방문해서 모든 일이 다 소생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진 6> 내소사 : 창건 당시 대ㆍ소(大小)의 소래사(蘇來寺)가 있었으나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가 남아 지금의 내소사로 이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명(寺名)이 내소사(來蘇寺)로 개칭된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조선후기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김창수) 대웅보전에 있는 후불벽화는 창건설화와 함께 나의 또 다른 관심을 이끌어냈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에 협시보살(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두는데, 내소사 역시 그러한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영산회괘불탱 뒤쪽 편에 흰 옷을 입은 관음보살이 앉아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관음보살(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은 원통전(圓通殿), 대비전(大悲殿), 관음전(觀音殿)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곳에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어, 왜 이곳에 이러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이 벽화는 조선 말기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전북지역에서 나타난 민중의 동향과 연관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해보았다. 속설에 의하면 “이 관음보살의 눈을 보면서 좌ㆍ우로 왔다 갔다 해서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 역시 관음보살의 눈을 마주치며, 소원을 빌고 대웅보전을 떠났다. 귓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염불이 떠나질 않았다. 오후 5시까지 주차장에 모여야 한다는 약속을 떠올리며 전나무 숲길을 재빨리 내려왔다. 그런데 막상 내려와 보니, 제 시간에 모인 회원은 고작 5명에 불과했다. 우리를 제외한 선생님들은 모두 ‘소생(蘇生)’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시원한 막걸리와 도토리묵과 파전으로!!! 뒤늦게 도착한 우리 역시 정신없이 소생의 시간을 갖고 차에 올라탔다. 3. 고창읍성 고창읍성에 도착했다. 덤덤한 마음으로 읍성에 들어섰다. 입구에는 답성놀이와 관련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윤달에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한다는 것이었다. “돌은 필요 없겠네. 머리가 돌이니까”라는 한상권 선생님의 유머로 한바탕 웃고 성벽을 따라 북문에서부터 동남치까지 전체 성벽의 절반 정도를 걸었다. <사진 7> 고창읍성. (@김창수) 그리고 동남치에서 내려와 읍성 내의 관아건물을 객사->동헌->내아->장청->풍화루->작청->관청->향청->옥->북문의 순서로 살펴보았다. 원래 이곳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지만 병화(兵火)로 소진되어 1976년부터 복원해오고 있다. 때문에 작청은 아직 건물을 복원하고 있는 중이었고, 안내판의 설명 역시 미심쩍은 부분이 조금은 있었다. 이동인 선생님과 한상권 선생님께서 설명하시는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으며, 고창읍성의 배치 및 관아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선생님들께서 하시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돌아와 고창읍성 전경 지도를 보며 관아의 위치를 다시금 되짚어 보았다. 관아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니 165,858㎡의 읍성 내에 관아를 제외한 다른 곳은 어떤 건물이 어떻게 배치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읍성 및 마을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은 향촌사회사를 이해하는데 기초적인 요소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4. 30년 전통의 동백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수학여행을 오면 먼발치에 서서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우리는 언제쯤이면 저와 같은 동백호텔에서 묶어볼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30년 전통의 동백호텔에 숙소를 마련했습니다.”라는 센스 있는 총무부장님의 소개와 함께 숙소에 도착했다. 부러움의 눈초리를 받을 만한 호텔은 아니었지만 30년 전통치고는 아주 깨끗하고 넓은 숙소였다. 장어에 복분자를 곁들여 먹고 전체 모임의 시간을 가졌다. 혹시나 음주가무의 시간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게 한 ‘프로그램’의 정체는 자기소개 및 한국역사연구회 창립 20주년 이후의 활동방향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참으로 건전한(?) 회의였다. 프로그램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서는 한숨을 돌렸지만, 중세2분과 분과장님이신 이동인선생님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이 자리를 통해 사과드립니다. 뭘 모르는 신입회원이 한 말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이렇게 꽤 오랜 시간 회의를 한 후 본격적인 음주의 시간을 보내며 구수한 송창식의 노래에 등장하는 선운사 동백호텔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갔다. 5. 선운사 아침 햇살이 따가웠다. 평이하고 단조로운 길을 따라 선운사로 향했다. 선운사 입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숲 속에 부도 밭이 있었는데, 세운지 얼마 안 된 눈에 띄는 비석이 있었다. 백파율사의 비석이었다. 비석 보호의 차원에서 원래의 비석은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새로 세운 것이었다. 백파율사는 조선후기 불교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로서, 비명(碑銘)은 조선 철종 9년(1858)에 건립되었다. 특히 비명의 필적이 조선시대의 명필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것이라고 하여 주목된다. 하지만 실제 크기에 비해서 현재의 비석은 축소되어 세워졌다. 때문에 축소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가벼운 농담으로 오고갔다. 작업과정에서의 실수->향토사학자의 신랄한 비판->실수 인정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선운사에는 다양한 지방유형문화재, 천연기념물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대웅전(보물 제290호),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도솔암마애불상(보물 제1200호) 등이다. 특히 선운사는 전각과 불상이 일치하지 않는 점, 지장보살을 중시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대웅보전의 뒤쪽 동편에 위치한 관음전은 원래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금동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이후 관음전에 있던 금동지장보살을 도솔암 내원궁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지는데(관음전과 내원궁에 있었던 불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했는데 미처 그러지 못했다. 선운사 홈페이지 내용으로 봐서는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관음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전각과 불상이 일치하지 않게 된다. 즉, 내원궁은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수행을 닦으며 장차 부처가 되어 세상을 교화시킬 때를 기다리며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미륵보살을 모셔야 하는데,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이 있어야 할 전각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이 외에도 별도의 명부전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운사만의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사진 8> 도솔암 내원궁. (@김창수) 선운사 답사에서 또 하나 주목된 것은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바로 위편에 존재하는 도솔암 내원궁과의 관련성을 느끼게 한다. 큰 규모의 마애불답게 관련 전설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무너져 지금은 그 흔적만이 희미하게 있다. 이 마애불에는 그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한다. 동학농민전쟁 무렵에는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흔적들이 마애불에 희미하게 남아 있어 전설을 유지시키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사진 9> 도솔암 마애불. (@김창수) 도솔암 내원궁까지의 답사를 마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1박 2일이라는 짧은 한 번의 답사로 모든 선생님들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과 서먹함이 이번 수련회를 통해 많이 사라졌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이제 다음 모임에서는 만나는 모든 선생님들께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대학시절부터 답사는 늘 새로움을 제공한다. 서른 즈음까지 말이다. ** 사진을 제공해주신 중세 2분과 김창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