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3일천하’의 길을 따라【2】

BoardLang.text_date 2008.09.11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갑신정변 ‘3일천하’의 길을 따라【2】


백선례(근대사분과)


1-2. 갑신정변 첫째 날
: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
창덕궁부터


점심을 먹고 드디어 정변의 주요 사건들이 일어났던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창덕궁 이전 코스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했지만 어쩌면 본격적인 답사의 시작은 지금부터인지도 모른다.


숙장문에서 찍은 사진. 앞쪽의 문의 진선문, 진선문 사이로 보이는 작은 문이 금호문이다. 김옥균 등은 이러한 직선 코스를 따라 움직였다. <ⓒ백선례> 

표를 끊고 입장하기 전 박은숙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금호문(金虎門)을 먼저 살펴보았다. 정변 당시 김옥균 등은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아닌 이 문으로 들어갔다 하는데, 돈화문은 9시 반 이후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금호문으로 들어간 그들은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進善門)과 숙장문(肅章門)까지의 직선 코스를 통과하였다 한다.

  진선문을 지나 오른편엔 인정문(仁政門)과 인정전(仁政殿)이 자리 잡고 있는데, 김옥균 등은 인정전 앞에 폭발물을 묻어두고 30분 후에 폭파하도록 지시한 후 숙장문을 지나 협양문(協陽門)을 통해 ‘편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협양문은 희정당(熙政堂) 앞에 있는 문이었다.

  협양문에서는 당시 이미 개화당에 포섭되어 있던 윤경완(혹은 윤계완이라고도 함)이 전영 50명을 데리고 호위를 서고 있었다. 평상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주로 낮에 자고 밤에 정사를 보았는데 정변 당일인 10월 17일에는 김옥균이 고종에게 밀린 문서를 모두 바쳐 그날따라 정무에 지친 고종이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미리 조치를 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편전’이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희정당은 왕의 침전이며, 희정당 바로 뒤에 자리 잡은 대조전(大造殿)은 왕비의 침전을 말한다. 기록상으로는 협양문까지만 기록되어 있고 편전이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아 어느 쪽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한다.

  희정당의 경우 협양문을 지나 바로라는 점, 왕의 침전이면서 집무를 보는 곳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편전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조전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정변 기록에 잠자는 고종 옆에 민비가 함께 있었다는 점, 그리고 ‘편전’이라고 지칭했다는 점에서이다. 하지만 당시 엄격한 내외를 따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김옥균 등이 ‘왕비’의 침전까지 들어갔다는 점은 역시 미덥지 못하다. 『윤치호 일기』를 보면 고종이 윤치호를 부를 때마다 민비가 고종의 곁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왕의 침전인 희정당에 민비가 같이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도 하다.

  희정당 앞에서 박은숙 선생님께서 제기한 ‘편전’이 ‘희정당’인가 ‘대조전’인가라는 질문에는 이와 같은 활발한 논의가 오갔다. 물론 당장에 어떤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라는 학문이 가지는 매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과거의 어떠한 사건도 빈틈없이 완벽한 자료를 남기거나, 완벽히 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역사는 항상 불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편전에서 고종을 깨워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린 김옥균 등은 고종과 민비를 모시고 요금문으로 나왔다. 통영전 쪽에서 궁녀 고대수가 터뜨린 폭탄에 고종과 민비는 변란이 있다는 김옥균의 말을 믿게 되었는데, 이 궁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덩치도 있고 박색이라 다른 궁녀보다 말 걸기가 수월해 김옥균이 섭외했다고 한다.

  변란이 있음을 듣고 자다 깬 고종이 큰 반항 없이 김옥균을 따라나선 것은 그 전에 어느 정도의 양해가 이루어졌던 듯하다. 여기서 잠깐 퀴즈, 요금문으로 가던 도중 고종이 일본 공사관에 쓴 ‘일사래위(日使來衛)’ 조서는 무엇으로 썼을까? 경황없이 나와 붓이나 벼루 같은 걸 챙겼을 리 만무한데 말이다. 정답은 연필! 답사 도중에 실제로 이 퀴즈를 내셨던 임경석 선생님께선 요즘 연필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한다. (선생님의 연필예찬은 뒷풀이에서도 계속되었다~)


요금문 <ⓒ백선례>

요금문으로 나간 고종과 김옥균 등은 경우궁의 후문으로 경우궁에 들어갔고, 이후 일본 군사가 와서 수위하였다. 여기서 박은숙 선생님께서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셨다. 그들은 왜 경우궁으로 갔을까? 『갑신일록』에는 적은 군사로 수비하기 위해 경우궁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외에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일까? 기록상 경우궁의 규모가 작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경우궁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실제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수비를 위해서 이동했다면 규모의 문제도 있지만, 경우궁의 지형지세를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한다.

2. 갑신정변 둘째날! :  1884년 10월 18일(음 12월 5일)

경우궁으로 이동 후 김옥균 등은 고종 알현을 위해 찾아온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민영목 등을 모두 죽였는데, 심상훈만은 죽이지 않았다. 그는 임오군란 때 민비에게 궐내 소식을 전해주었던 사람이다. 고종이 처소를 경우궁으로 옮긴 후 민비가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요청했을 때는 누군가 상황을 전달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 누군가는 심상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물론 눈치 빠른 민비가 정황을 짐작하고 환궁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심상훈을 죽이지 않았던 것은 갑신정변 주도자들에겐 정변 실패 후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을 듯하다.

새벽 4시경에는 김옥균 등은 고종에 건의하여 각국 공사에 위문단을 파견하였다. 그 후 그들은 바로 인사와 내각 조직에 돌입하였다. 영의정에 이재원, 우의정에 홍영식, 좌우영사에 박영효, 서광범을 임명되었다. 이들은 새벽에 바로 조보(朝報)를 돌렸다.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의 경우 새벽 6시에 내각 인사를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인사·내각 구성을 보면 좌우영군을 장악하는 특별한 조치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전후영군은 일본식 훈련을 받은 군대였고, 좌우영군은 청국식 훈련을 받은 군대로, 개화당에게 경계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음에도 좌우영군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 또한 갑신정변 주도세력들이 놓친 또 하나의 실패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동궁터. 현재는 현대사옥 앞에 이러한 표식만 남아있다. <ⓒ백선례>

오전 10시에 고종은 처소를 경우궁 남쪽,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으로 옮겼다. 이후에도 비의 창덕궁 환궁 주장은 계속되었다. 오후에는 고종이 일본 공사를 찾아가 환궁을 요청하니 일본 공사가 이를 수락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후 5시경 고종과 민비는 창덕궁 관물헌으로 환궁하였다. 현재 창덕궁은 제한적 개방이 이루어지고 있어 원하는 대로 다 볼 수 없다. 따라서 희정당 옆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관물헌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고, 다만 대강의 위치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관물헌의 경우 개방은 물론이고 안내 책자에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문 뒤로 왼쪽쯤에 관물헌이 있지 않을까 짐작만 할 수 있었다. <ⓒ백선례>

3. 갑신정변 셋째날! : 1884년 10월 19일(양 12월 5일)

이날 10시경에 깁옥균 등은 정령을 작성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오후 3시에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민비는 세자와 세자빈을 데리고 즉시 도망쳤고 이어 조대비도 도망쳤다. 그러나 북산으로 도망치던 고종만은 7,8차례 붙잡혀 결국 연경당에 잡혀 있었다고 한다. 임오군란 때 이미 암살 고비를 넘긴 민비의 경우 위기 상황에서의 행동이 좀 더 능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망치던 고종의 모습과 그러한 고종을 몇 번이고 다시 붙잡아두는 김옥균 등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지? 조금은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그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연경당  도주에 실패한 고종은 이곳에 잠시 유폐되어 있었다. <ⓒ백선례>

고종을 연경당에 모셔둔 상황에서 김옥균 등은 왕을 어디로 모실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인천으로 모시고 가자는 안에 대해서는 고종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정변이 청군에게 진압되고 이후의 결말은 알다시피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남아서 고종을 호위했던 홍영식은 그 날 피살되어 후에 능지처사에 처해졌다. 흔히 3일 천하라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총 46여 시간’에 불과한 짧은 거사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김옥균 등이 찾아갔을 때 별다른 저항도 없이 따라나서 그들을 묵인하는 듯했던 고종은 왜 다시 청측으로 기울어 청군의 지원을 요청했을까? 이에 대해서도 앞서의 질문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그 중에도 고종은 늘 결정적인 순간마다 마지막까지 여러 장의 카드를 쥐고 선택했던 사람이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즉, 처음에는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았는데 내각 구성과 정령 반포 등 정변의 진행 과정에서 점차 자신이 배제되고, 민심이 이반하자 다시 청나라 쪽으로 맘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긴박했던 갑신정변 당시의 상황 그대로, 당시의 사건 순서를 거의 그대로 밟아가며 진행된 이번 답사를 통해 갑신정변은 교과서나 전공 서적 속에 활자체로 딱딱하게 기록된 사건이 아닌 바로 눈앞에서 실재했던 사건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나 역시 답사기를 쓰면서 갑신정변을 또 다시 활자 안에 묶어버린 셈이 되었지만, 적어도 답사 현장에서의 갑신정변은 더 이상 외워야할 역사적 사건이 아닌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와 같았던 것이다.(그런 느낌을 이 글에서는 반의반도 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전체 답사 코스를 안내해주시고 설명해주신 박은숙 선생님의 갑신정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답사 내용을 풍부하게 했던 것은 물론이고 간간이 박은숙 선생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적극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내 주시던 여러 선생님들 덕분에 답사의 재미, 그리고 역사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자칫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사실들을 지나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며, 그렇게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듣고 본 것만으로도 그 의의가 작지 않은 답사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