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기 매곡성과 성주 공직 여러 날 갈등하던 끝에 이번 선거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투표 안하는 것이 자랑도 아니지만, 이번 같은 경우에는 뭐 별로 '공화국 시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부끄러움이랄 것까지도 없을 것같아서… 그 대신에 "내 공부와 관련된 곳으로 가서 바람이나 쐬자"며 충북 청원으로 향했다. <호점산성>을 보기 위해서였다. 석축산성인데도, 안팎의 성벽을 쌓을 때 나무기둥을 댄 흔적이 남은 곳이라 오래 전부터 흥미가 끌리기도 했다. 청남대가 있는 청원군 문의면에서 하루를 묵고, 이틑날 일어나서 보은군 회남면의 호점산성으로 갔다. 보은이라지만, 실제로는 대전에 더 가깝고, 대청호를 끼고 있는 곳이다. 홀로 오르기 시작하여 3시간 좀 못되는 시간에 한 바퀴를 돌았다. 오후 2시쯤이나 되었나…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좀 섭섭해서, 가까운 매곡성을 찾아보기로 했다. 부근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보은군 회인면 소재지의 동쪽에 있는 해발 186m 가량의 얕은 산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 둘레는 610m밖에 안되는 작은 곳이다. 삼국시대 백제 일모산군(一牟山郡) 아래의 미곡현(未谷縣)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연산군(燕山郡), 매곡현(昧谷縣)으로 고쳤다. 그리고 『삼국사기』편찬 당시에는 회인현으로 불렸다.(이 명칭은 이후로 이어진다) ▲ 매곡산성 위치 : 왼쪽이 회인면 소재지. 복원한 인산객사 건물이 있다. 그리고 위의 지도 오른쪽 위의 [도엽번호] 라는 글자 아래의 건물 표시가 <회인향교>자리이다. (■ 색으로 표시한 번호와 화살표는 아래서 보여줄 사진을 찍은 방향임) (■ 색으로 표시한 선은 최근 개통된 청원-상주 고속도로) 적당한 곳에 차를 대놓고 등산화를 다시 꺼내 신었다. 그리고 경사가 완만한 북동쪽으로부터 수풀더미를 헤치고 성벽이 있음직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서쪽 성벽은 급경사면 꼭대기에 쌓았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무너져 흔적만 남은 서쪽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가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보기 시작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산이 매곡산성이 있는 곳이다. 교회 첨탑 오른쪽(남쪽)에 복원된 인산객사가 있다. ▲ ① : 회인면 소재지의 회인초등학교 입구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개울 하나를 건넌 낮은 산 위에 매곡산성이 있다. 회인면 소재지 남쪽에서 바라보면 아래 사진과 같다. 가까운 산을 끼고 그 서쪽에 자리잡은 마을이 오랜 엣날부터 이 일대의 중심지였던 것같다. 평상시에는 평지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이곳 산성으로 옮겨 입보(入保)하는, 삼국시대 이래의 생활방식이, 후삼국시대에 제대로 부활했다. 매곡성주 공직(龍+共 直)이 이 무렵, 이 곳을 거점으로 이름을 남긴 이였다. 그는 신라말~고려초에 등장한 호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혼란을 틈타 자립한 정황이 그렇고, 견훤과 왕건 사이에서 향배(向背)를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고… 이 모든 것이 후삼국이 다투던 당시의 역동적인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 ② : 처음 보여드린 지도에 표시한 위치에서 찍은 사진이다. 둥근 산처럼 보이지만, 왼쪽편 성벽이 돌아가는 곳은 아주 급한 경사를 이룬다. 『고려사』열전에는 <공직>이 매곡사람이며,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 신라 말에 '본읍장군(本邑將軍)'이 되었다고 했다. 신라 말에 등장하는 호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자신의 출신지를 거점으로 독립한 세력들은 대개 중소 호족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제법 넓은 지역을 아우른 경우에는 대호족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견훤이나 궁예 등 후삼국을 연 주인공들은, 군사들을 지휘하는 무장(武將)으로서 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이런 군소호족들을 제압한 경우이다. 즉 자신의 출신지를 거점으로 하지 않고서도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하나의 권력체를 이룬 자들이었다. 왕건은 918년(태조 1)에 궁예를 내쫓고 즉위하였다. 그러나 국왕 권력은 늘 불안한 상태였다. 즉위 초기에 있었던 반란, 반란 모의들이 이를 말해준다. 바로 그 해, 환선길(桓宣吉)이란 자가 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왕건이 학사(學士)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자리를 습격했다가 실패했다. 그리고 청주 사람 임춘길(林春吉)은 왕건 정권이 마음에 안들었든지, 고려 조정에 등을 돌리고 경종(景琮) 등의 무리와 함께 청주로 돌아가려 했다. 일이 발각되어 모두를 죽이려 했을 때, 현율(玄律)이란 자가 이렇게 아뢴다. "경종의 누이는 매곡성주 공직의 처입니다. 그 성(城)이 매우 견고하여 공격해서 함락시키기 어렵습니다. 또 적(후백제)과 경계가 가까우니 만약 경종을 죽이면 공직이 반드시 반발할 것입니다. 용서하여 회유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건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처형을 단행하였다. 그래서일까? 물론 그 직전이나 직후 사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어쨌든, 공직은 일찍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귀부(歸附)한 상태였다고 한다. 장자 직달(直達)과 차자 금서(金舒), 그리고 딸 하나를 견훤에게 볼모로 보냈다. 그런데 그는 견훤을 직접 만난 뒤로 마음이 달라져서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견훤을) 직접 보니 사치스러움이 도를 넘는다. 비록 가깝지만 다시 오고 싶지 않다. 고려의 왕공(王公:왕건)은 문(文)이 백성을 안정시키고, 무(武)는 지나치지 않도록 하니 사방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德)을 생각한다고 하여 귀부하려 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냐?" 장자 직달은, 자신도 직접 와서 살펴보니 가망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저희들은 틈을 타서 돌아가겠으니 염려말고 뜻대로 하시라"고 대답했다. 설령 돌아가지 못하고 죽더라도 자손들에게 경사가 흐르면 여한이 없다고 하면서… 물론 이들 기록은 최후의 승자가 된 왕건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말 그대로를 다 믿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당시 여러 호족들 일부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932년(태조 15) 6월, 공직은 아들 영서(英舒)와 함께 왕건을 찾아가서 항복했다. 왕건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높은 관계(官階)를 줌은 물론, 친척의 딸과 영서를 혼인시키고, 다른 아들 함서(咸舒)에게도 관계를 내렸다. 그러나 공직의 가족들로 보면, 이 결정은 큰 불행이었다. 소식을 듣고 분노한 견훤은 볼모로 와 있던 직달과 금서, 그리고 공직의 딸을 가두고 고문하였다. 직달은 뒷굼치 근육이 끊겨 죽고 말았다. - 이 대목에서 『고려사』공직전은 뭔가 혼란스럽다. "백제를 멸한 뒤에 羅州에서 포로로 잡고 있던 백제 장군 구도의 아들 단서(端舒)와 금서를 교환하여 금서가 부모에게 돌아왔다"고 했는데, 후백제가 멸망한 뒤에 뭘 다시 교환할 필요가 있었다는지? 이것 말고 다른 내용도 좀 그렇다. 사건의 흐름을 사후에 일괄하는 과정에서 생긴 혼란인 듯하지만, 이 자리에서 장황히 변증할 겨를은 없다 - ▲ ③ : 지도의 ③위치에서 화살표 방향을 바라본 모습. 무너진 성벽. 공직은 후삼국이 통일된지 몇년 뒤인 939년(태조 22)에 죽었다.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했고, 그 아들 함서(咸舒)를 후사로 삼았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건이 "그 아들을 후사로 삼았다"는 구절이다. 당시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각지의 호족들이 할거하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곡성과 그 부근의 지배권에 대해서는, 그 후손이 역할을 이어받음을 형식적이나마 국왕이 다시 인정해준 점이다. 흔히 상상하듯이 '제멋대로'는 아니었던 것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온전히 남은 성벽이 없기에, "그 성(城)이 매우 견고하여 공격해서 함락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잘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서쪽벽이 남쪽으로 꺾이는 곳의 성벽을 보면 조금은 상상이 간다. 아래 사진과 같은 모습니다. ▲ ④ : 성벽 바깥쪽이 아주 조밀하게 잘 쌓은 모습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날 오전 에 본 호점산성이든 이곳이든, 이 지역 부근에는 이런 재질의 석재밖에는 없다. ▼ 참고삼아 회인초등학교 앞 민가의 돌담을 보라. 물샐틈이 없어 보인다. 성이 사용되고 있을 때, 이렇게 쌓은 성벽이 4~5m 이상의 높이였다면, 공격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둘레가 얼마 안되는 작은 성이지만… 옛 기록에는 성 안에 우물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찾기 어렵다. 그리고 성 안 동쪽구역은 경사가 완만하여 경작지가 되어 있었다. 매곡성이 있는 땅이 사유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성 안팎에 군데군데 비석을 갖춘 조선시대 민묘들도 보인다. ▲ ⑤ : 성 내부의 동쪽.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동쪽 성벽을 좀 둘러보면서 치성(雉城)이나 문지(門址)를 확인하려 기웃거리다가, 위의 사진을 찍은 곳을 지나니 아래 사진과 같은 장면이 나타난다. 경작하는 농민이 농기계와 차량을 출입하게 하려고 동쪽 성벽의 꽤 긴 구간을 완전히 깎아먹은 것이다. 이렇게 깎아서 길을 냈으니 얼마나 편했을까. 얇은 돌무더기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니, 따로 축대를 쌓을 필요도 없고... 덕분에 동쪽 성벽은 본체 내부의 채움돌만 좀 볼 수 있었다. 언 땅이 녹아서 내려오는 길은 푹푹 빠지고… ▲ ⑥ :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동쪽 성벽 일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멀리 보이는 도 로는 최근에 개통된 청원-상주고속도로이다. 그나마 고속도로가 매곡성을 절단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나? 이 부근에는 산성들이 꽤 많다. 청주와 가깝고, 후백제와 고려의 경계 지역이기도 해서, 후삼국기에도 사용되었음직한 것들도 있다. 청주는 왕건이 일찍이 궁예 휘하에서 활약할 때 공략한 곳이었으나 늘 불안한 지역이었고, 회인에는 매곡성주 공직이 있었다. 그리고 회인에서 가까운 문의면(일모산성)은 후백제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 왕건은 공직이 귀부한 바로 다음 달인 932년 7월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일모산성을 공략했다. 일모산성은 문의면 소재지의 양성산성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덧글 회인면은 면 소재지라고는 하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오전에 호점산성을 둘러보고, 매곡성까지 헤매다보니 속이 출출해져서 어디 라면이라도 먹을 데가 없나 찾았다. 답사 다니다보면, 중학교나 초등학교 앞의 분식집에서 출출할 때 사먹는 라면이 꽤나 반가울 때가 있다. 또 요즘같은 겨울철에는 어묵꼬치와 따끈한 국물 생각도… 그래서 학교를 찾으니, 회인초등학교를 안내하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슬금슬금 찾아갔지만 분식집이 있을 리가 있나. 이런 시골에… 학교 마치면 셔틀버스 타고서는 다들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나마 한 두 군데 식당마저도 임시 공휴일이라서 다들 문을 닫아 걸었다. 결국 상경하는 고속도로 휴게소를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2007년 12월 19일 답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