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서 저녁 6시 어간에 출발한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는데도 여전히 저녁 나절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 가는 길은 꽤 멀다. 네 명이 열흘이나 타고 다닐 것이니 렌터카를 좀 큰 걸로 하자고 해서 얻은 메르세데스 벤츠가 아무리 성능이 좋고, 아우토반에 속도 제한이 없다해도 운전자의 체력에 한계가 있으니 하루가 조히 걸린다. 2월 초순이면 아직 겨울이라고 해야 할텐데 가도 가도 푸른 초지에 드문드문 숲으로 덮인 구릉이 끊임없이 굽이친다. 가다가 지쳐서 잠시 쉴 겸 들른 곳이 아이젠나흐(Eisenach)라는 소도시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 11세기인가 지어져서 보수와 증축을 한 것인데, 안내 할머니는 엘리자베쓰라나 하는 헝가리 출신 귀족 부인이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 나가 죽은 뒤에 과부가 되어 이 성을 얼마나 중흥했나 하는 이야기만 하는 눈치다. 내부에도 온통 그 과부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는지, 자못 화려한 모자이크도 내내 그 이야기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이 성이 관심을 끄는 것은 종교개혁자 루터(M. Luther)가 1521년에서 1522년 사이 1년 남짓 이 성에 숨어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방에 비해서 지극히 아무런 장식도 남아 있지 않은 소박한 방에 덩그라니 남아 있는 닳아빠진 나무 책상. 그 어느 화려한 유물보다도 큰 울림을 준다. 따로 마련된 전시실. 각종 무기며 유물들이 일개 지방의 성 치고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가운데, 투박한 지질의 두꺼운 책. 난외에 루터의 친필 주기가 쓰여 있는 성경책. 루터 자신이 번역한 독일어본의 창세기 31장이 펼쳐져 있었다. 가볍게 들러 무거운 감동을 받고 돌아서는데, 순백의 비둘기들은 벽에 뚫린 두 개의 구멍에서 한도 없이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