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에서의 산책 이현진(중세2분과) 9월달 중세2분과 모임에서 갑자기 분과장님이 “다음달에는 종묘로 답사를 갑시다” 라고 건의를 하시는 게 아닌가. 상반기에 사직을 갔으므로 하반기에는 종묘를 가자는 것인데, 그러곤 나의 얼굴을 보며 거절하기 힘들게 밝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안내를 부탁하는 것이다. 최근 종묘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했는데 아무래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 기인하리라.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종묘’라고 하면 종묘공원에 포진하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먼저 연상시킬 것이다. 어떤 때에는 종묘 매표소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계셔서 가끔 걱정이 들 때가 있다. 너무나 시끄러운 음악소리, 고함 소리로 인해 인상이 찌뿌려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묘 안으로 들어오셔서 담배라도 피실까봐 내심 초조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혹시라도 화재가 날까봐. 지금 종묘공원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사당 앞이라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오시기로 한 선생님들을 기다렸다. 종묘 매표소 앞에서 만나기로 한 우리 일행은 준비해 온 답사자료집을 가지고 먼저 종묘 정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처음 종묘 정전을 접하면 그 웅장함과 엄정함에 가슴이 벅참을 느낀다. 이런 감정 나만 느끼는 것일까. 사실 궁금하기도 해서 물어보니 직접적으로 아니라고 표현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동의하기는 뭣해 순간 고요히 흐르는 정적과 함께 야릇한 표정들을 지으시는 게 아닌가. 종묘 정전은 역대의 왕과 왕후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처음에는 태조와 국왕의 4대조를 모시기로 했지만 후대에서 나름 공덕이 있다고 판단한 임금들을 불천지주(不遷之主:옮기지 않는 신주)로 정해 계속해서 모시게 되면서 지금처럼 가로로 긴 형태가 되었다. 사진 1) 종묘 정전(宗廟正殿) 원래는 각각의 임금마다 사당을 지어 모셨는데 후한대부터 한 건물 속에 방만 따로 만들어 모시게 되면서 지금처럼 한지붕에 19분의 신위를 모시게 되었다. 서쪽에서부터 태조, 태종, 세종.... 의 순서대로 봉안한 서상제(西上制) 구조이다. 종묘 정전 앞은 전통시대 건물 가운데 가장 넓은 월대가 펼쳐져 있다. 종묘제례를 행할 때 연행되는 악(樂)과 가(歌), 무(舞)를 위한 공간이다. 그런데 함께 동반했던 꼬맹이들이 이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너무 신나게 뛰어노는 것이 아닌가. 애들은 역시 뛰어놀아야 제맛이야. 그런데 고요함을 숭상하는 곳이라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누누이 강조하고 조심했던 곳인데 신령들도 이해하시겠지. 그 월대 아래에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건물이 공신당, 서쪽에 있는 건물이 칠사당이다. 월대 중앙에 서서 공신당부터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공신당은 역대 국왕들이 재위에 있을 때 가장 공이 있다고 평가를 받은 사람을 배향하는 곳이다. 조상들 가운데 이곳에 배향된 인물이 있는 경우 지금의 표현을 빌자면 가문의 영광인 셈이었다.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가묘에서도 불천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공신위 83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사진 2) 공신당(功臣堂) 정조대 이전까지는 3간이었다가 정조대 증축한 기록이 발견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규모로 증축한 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지금은 16간이다. 정조대 이후 적어도 몇 번의 증축 공사가 있었을 법한데 기록이 없어서 설명 불가능. 문헌 사학자로서의 애로랄까. 칠사당은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 아는 이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대개 종묘에 오더라도 종묘 정전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사진 몇 컷 찍은 뒤 그냥 영녕전으로 가 버리기 일쑤였다. 칠사는 궁중 안에 있는 일곱 신을 말한다. 사명(司命), 사호(司戶), 사조(司竈), 중류(中霤), 국문(國門), 공려(公厲), 국행(國行). 일곱신은 수명(나이)과 선악의 관장, 출입, 음식, 실내에서의 생활, 죽이거나 처벌, 도로 통행 등을 주관하는 신이다. 종묘 대제를 지낼 때 함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사진 3) 칠사당(七祀堂) 언제 부터인가 칠사위를 폐하고 건물 내부에 종묘 제례 용품을 보관해 오다가 2000년 11월 6일에 칠사위를 복원했다고 한다. 아마 세계문화유산 지정과 관련해서 부랴부랴 취한 조처인 듯. 칠사당까지 마저 보고 영녕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선시대 국왕이었다면 가마를 타고 갔을텐데. 종묘 정전보다는 좀 덜 웅장하지만 나름대로 멋있는 건물이다. 영녕전 정전은 처음 건립할 때에 태조의 추존 4대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봉안하기 위해 지어졌다. 정전이 4간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후 연산군대에 태조 다음 임금인 정종이 친진에 이르러 영녕전 익실에 봉안하면서 이후 공덕이 좀 부족하다 싶은 임금을 영녕전의 좌우 익실에 봉안했다. 사진 4) 영녕전(永寧殿) 후손들 입장에서 공덕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임금들이 점차 증가하면서 좌우익실을 증축, 그러다보니 종묘 정전보다 긴 날개를 갖게 되었다. 그 밖에는 종묘의 부속 건물들이다. 건물마다 사진을 다 수록하지 못해 아쉽다. 사진 5) 전사청(典祀廳) 신주(神廚)라고 하여 종묘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곳이다. 사진 6) 제정(祭井) 전사청의 동쪽에 있는데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제수 마련에 소요되는 물을 이곳 제정에서 조달해 사용했다. 사진 7) 재궁(齋宮-어재실(御齋室)) 제사지내기 전 왕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는 곳이다. 뜰을 중심으로 북쪽에 재궁, 서쪽에 어목욕청, 동쪽에 세자재실이 있다. 사진 8) 어목욕청(御沐浴廳) 목욕 제계하는 곳이다. 사진 9) 세자재실(世子齋室) 제사에 참석하는 세자가 머무는 곳이다. 사진 10) 망묘루(望廟樓) 종묘를 살펴보는 관청인 종묘서(宗廟署)로 종묘를 관리한다. 사진 11) 공민왕신당 망묘루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 연대미상의 건물이다. 1960년대부터 종묘 주위의 주민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진 12) 공민왕신당에 걸려있는 영정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사진 13) 향대청(香大廳) 신을 모시기 위해 사르는 향(香), 제사의 뜻을 고하는 축(祝), 신에게 올리는 예물인 폐(幣)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 사진은 종묘대제 전날 향축을 봉안한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