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중세1분과) 1. ‘정통 사극’ <정도전> 바라보기
정도전은 일찍이 96년 <용의 눈물>에서도 보여준 여말선초 정치적 격변기를 다룬 작품이다. 공민왕 말년에서 시작해 우왕대 정도전의 유배, 이성계와의 만남, 위화도 회군과 우왕의 폐위, 창왕대 사전 개혁 논의에 이르는 사건들이 적당한 템포를 갖추어 재구성되어 있다.
드라마로서의 <정도전>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현실정치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그 대사들에 있다.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으로 잘 알려진 작가에 의해 다듬어진 “전장에서 적을 만나면 칼을 뽑아야 하지만 조정에서 적을 만나면 웃으세요. 정치하는 사람의 칼은 칼집이 아니라 웃음 속에 숨기는 것입니다.”, “의혹은, 궁금할 때 제기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감당할 능력이 있을 때 제기하는 겁니다.” 등의 대사들은 현실의 정치상황을 은유해주는 탁월하고 남다른 깊이를 제공하기도 한다. 드라마 <정도전>의 또 다른 매력은 여말의 정치투쟁을 단순한 세력 간의 정쟁 수준에서 더 나아가 정치관ㆍ사회관 간의 갈등으로 확장하여 표현하였다는 점에 있다. 기반이 완전히 붕괴된 고려 사회와 그 사회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궤적은 본 극을 둘러싼 ‘모처럼 보는 정통 사극’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담긴 ‘정통’이 가진 맛을 족히 느끼게 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극이 보여주는 수려한 표현미와는 별개의 측면에서 우리가 사극 <정도전>, 더 나아가 사극이라는 장르 자체를 접근함에 더욱 중요한 것은 해당 역사 인물의 어떤 측면이 어떤 맥락에서 활용되고 있는가의 영역이 아닐까 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각색을 전제로 하고 있는 사극이지만, 그 사극이 역사 인물을 어떤 견지에서 접근하여 해석하였고 그 해석을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하는 측면에서는 ‘역사적 사실의 해석과 전달 방법에 대한 성찰’이라는 별도의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극 <정도전>의 몇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짚고 넘어가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사극 <정도전>을 읽는 첫 번째 창 : ‘영웅 전기’로서의 <정도전>
<정도전>이 가진 ‘영웅 전기’로서의 메시지를 요약한다면 무장 세력을 포함한 '걸출한 인물'에 의한 폭력 혁명의 옹호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정도전>은 그 제목만큼이나 문인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실제로 극중에서 정도전 이상으로 큰 무게가 실려 있는 인물은 바로 이성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 극의 상당 부분에 있어 이성계가 가진 과단성 있는 카리스마나 분위기 장악력은 주인공 정도전을 뛰어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극 전체에 있어서의 이성계가 가진 비중을 방증해주기도 한다. 물론 사극 <정도전>이 이성계의 일방적 미화극인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의 극 중에서 이성계는 정계 진출과 이인임과의 대립, 위화도 회군의 정치적 변동 속에서 수없이 갈등하고 고뇌하며 모습을 충분히 보여 준 바 있다. 남 몰래 품어온 ‘대업’의 야망과 고려 신하로서의 입장 간의 갈등, 존경하던 최영과의 대립 속에서 이성계가 보여준 수없는 번민은 <정도전>의 초ㆍ중반부를 장식한 백미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다만 오히려 이와 같이 ‘인간 이성계’의 내적 갈등양상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그가 가진 감정선이 과잉 표현된 점이야말로 어쩌면 <정도전>에서 이성계를 그려내는 가장 우려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조선 건국이라는 이성계의 정치적 횡보를 그의 인간적 고뇌와 그의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적 고뇌는 한 인물을 그려내는데 있어서 빠져선 안 될 중요한 단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인간적인 갈등’이 무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인물에게 조명될 때에는 ‘그가 가진 의외의 인간적 모습’이라는 맥락에서 해당 인물의 약점을 정당화하는 측면에서 활용되곤 하며, 이는 현실정치의 이미지 구성양상을 통해 흔히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극중에서 자주 표현된 ‘이성계의 눈물’은 그 의미에서 영웅적인 ‘대업’ 성취를 향한 그의 횡보가 가진 폭력성을 옹호하여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모습도 갖춘) 영웅 이성계’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중요한 요소로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웅극 자체가 사극에서 이색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른바 ‘대업’을 이룩한 무장의 과단성과 뚝심도 있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현 시점에 부각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낳는다. 이러한 부각들이 혼란 속에서 ‘도덕적이고 인간적이며 추진력을 갖춘’ 영웅 리더가 시대를 바꾸어 나아간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극 <정도전>이 가진 ‘영웅 전기’로서의 면모는 해당 극을 읽는데 있어 중요한 핵심 논제이며, 동시에 감상에 있어서도 빼 놓을 수 없는 시선을 제공하는 창인 것이다. 3. 사극 <정도전>을 읽는 두 번째 창 : ‘정치적 혁명극’로서의 <정도전>
이른바 ‘정치적 조율’을 제시하는 세력들이 언제나 주인공과 대립하는 세력들이라는 것은 극 중에서 반복되어서 나타난 바 있다. 극중에서 ‘이인임’으로 대표되는 고려의 기성세력은 고려 사회를 유지하는 방편으로서 ‘정쟁 양상의 교착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동시에 이인임 세력의 축출 이후 ‘정몽주’로 대표되는 고려 왕조의 보수적 개선세력이 고려 왕조의 체제적 안정을 추구하자는 것을 전제로 취한 대책 또한 주인공 정도전의 세력에 대한 타협과 협상의 제시였다. 말하자면 극중에서 정치적 타협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주인공 세력의 파괴를 동반한 ‘대업’ 성취 과정에서의 걸림돌로서 수없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극중에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상의 고려 말 사회 또한 폐단이 누적되어 회생 가능성을 대체로 상실한 상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또한 그 가운데에서 개혁ㆍ변화의 필요성 또한 절실히 요구되던 것도 사실이며, 실제 그 결과 일어난 역사적 변동이 조선 건국이라는 것 또한 일반적으로 동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동시에 타협과 협상을 통한 점진책의 마련이 보수적 개량론자들의 일시적인 정치적 카드로서 활용되는 것 또한 유사 이래 수많은 현실정치에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다만 그 개혁 자체가 시대상황에서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와, 절대적 목적으로서의 ‘파괴’ 자체에 대한 절대적 신뢰론은 별개의 의미이다. 극중을 지배하는 ‘파괴에 대한 정당화’는 극중을 꿰뚫는 근본 정서로서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화라는 코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극중에서 보여준 정도전과 정도전을 둘러싼 인물들에게는 개혁이라는 목적이 있을 뿐 그에 대한 수단에 대한 고민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방영분으로부터 정치적 술수나 속임수까지도 ‘대업’을 위한 한 방편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모습이다. 말하자면 개혁은 무조건적인 측면에서 옳고, 개혁을 위해 걸림돌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것'으로 처리하게 되는 거친 과정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역사 발전에 있어서 변동이 수반되고, 그렇게 수반되는 변동 속에서 희생이 따르는 것은 비극적이지만 필연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주지하다시피 이성계의 국가 성립과정이 신국가 건설의 과정이라 하기에는 적은 무력충돌로 이루어진 일이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왕조는 그 건국과정에서의 군사력을 통한 무력충돌이 최소화된 가운데 실질적으로 정치ㆍ사회적인 변화의 큰 흐름 속에서 비교적 원만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폭력적 정쟁의 수반 없이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비교적 원만한’과정 속에서도 반대파의 숙청을 비롯한 희생 또한 분명히 이루어진 사실이었다. 때문에 이 과정이 전술한 영웅화 과정과 연계되어, ‘과단성 있는 영웅적 횡보’로만 그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전 없는 갈등을 양산하는 고려 말 정치 사회의 정체성을 ‘대업’ 실행의 방해 요인으로 파악하고, (적어도 현 방영분 내에서) 정몽주로 대표된 인물들의 올곧음과 진정성을 ‘대업’을 결단하는 데에 내적 갈등을 부르는 ‘안타까운 고민거리’로서 구성하는 시각 내에서 이른바 '규제는 해악‘임을 강하게 역설하는 현실정치의 일면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기우일까. ‘민본’이라는 큰 이념지향을 전제로 한 정도전의 횡보는 역사적으로도 과격한 충돌들을 동반하기도 하였고 동시에 그로 인해 일으킨 결과가 큰 역사적 변동을 야기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극중에서 민본국가 건설을 위한 혁명 대업의 화신으로 분한 정도전에 의해 수없이 많은 ‘불가피론’의 형태로 그 수단들이 정당화되어 부각되는 것에는 별도의 우려를 감출 수 없다. 큰 변동기라고 할지라도 절차적 정치 과정의 중요성이 결코 간과되어선 안 될 뿐만 아니라, 그 수단의 정당화 과정이 그 목적을 명분으로 건 권력화 과정으로 변질되는 것 또한 유사 이래 빈번하게 발생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정치적 혁명극’으로서 사극 <정도전>이 어떻게 표현되었고, 그 이후 전개과정이 어떻게 표현될지는 그 감상에 있어서 놓쳐선 안 될 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4. 앞으로를 기약하며..
이러한 점들은 사극 <정도전>에 대한 평가를, 방영중인 현재의 시점에서는 완전히 확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큰 국면 전환의 시점을 거쳐 조금씩 변모하는 인간상을 기본 시각의 틀로 삼고 있는 극이니만큼, 앞으로 창왕-공양왕대의 정치적 갈등과 조선 건국, 그리고 건국 후 왕자의 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속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보여줄 가능성과 기회가 충분히 열려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도전의 인생 전체에 있어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은 생애 후반부의 짧은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인물 정도전을 역사적 견지에서 바라보는 우리에게 있어서 왕조 교체와 그 이후의 횡보는 그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족적임에 틀림이 없다. 그 만큼 아직 방영분이 고려 멸망에 도달하지 않은 사극 <정도전>은 ‘보여 준 이야기’보다 ‘보여 줄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 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현재까지의 사극 <정도전>의 모습에서는 몇 가지 우려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방영분에 드러난 정도전 계열 인물들에게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정의로움’이 근간으로 드러나 있을 뿐 ‘권력욕’은 그 목적에서 교묘히 빠져나가 있으며, 그 수단에 있어서 수장인 이성계의 내적 고민만이 인간적 면모로서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비추어질 정도전 일파의 ‘대업’ 수행과정에서의 많은 희생과, 동시에 정치의 중심이자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정도전의 ‘권력투쟁’으로서의 면모들, 동시에 건국 이후 조정의 중심 권력자로서의 정도전이 가진, 앞으로 더 변화할 만한 면모들을 보다 더 여유를 갖고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전개를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이 글은 드라마의 공식 스틸컷을 저작권법에 맞게 인용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