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천택: 封禁과 與民共之 ①숲의 변화

BoardLang.text_date 2016.04.04 작성자 김동진

김동진(중세사2분과)




서언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 與民共之]’를 표방하여, 숲의 사용권을 민간에 개방하고 제한된 지역에 금표를 설치하거나 봉산으로 설정하여 백성의 출입을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개방된 숲에서 땔감과 각종 특산품을 얻고, 새로운 경작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산림 개방 정책은 이전까지 한반도 대부분에서 유지되었던 원시적 산림에 큰 변화를 야기하였다.

한반도에서 농경이 시작된 이래 농경지는 확대되었고, 산림천택은 지속적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정착 생활과 벼농사가 중심이 된 청동기 시대 이래 본격화하였다. 농지개간으로 산림천택은 그 면적이 줄었고, 산림천택 역시 상당한 면적이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핵심자원인 땔감과 목재를 공급하고, 사냥하는 가용공간으로 편입되었다. 14세기 말에 성립하여 15~19세기 사회를 이끌어간 조선시대에 이러한 변화는 가속화되었다.

고려시대 한반도의 대부분은 활엽수 중심의 원시림이었고, 울창한 소나무는 개경 주변의 몇몇 고을과 바닷가 지역에 많았다. 따라서 산림천택 중에서 일부 지역에서 산곡, 산록 경사면, 저습지 등이 개간되었지만, 둔전과 사패 혹은 수령의 책임 아래 국가가 주도적으로 개간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 전시과 제도를 혁파하고 과전법으로 개편되면서 시지의 절급을 혁파함으로써 산림 이용 제한은 최소화되었고, 민간에 널리 개방되었다.

이는 한반도 산림천택 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과전법이 시행된 14세기 말 이래 한반도의 숲과 산림천택은 급속히 농경지와 시초채취지로 전환되었고, 16세기에 본격 등장하는 입안과 절수로 개발된 산림천택에 대한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확립할 수 있게 되면서 숲의 개발은 더욱 촉진되었다.

무너미의 땅은 천방과 보의 설치를 통해 15세기에 국가와 수령이 농지개간을 주도하였고, 16세기 이후 향촌 사족과 일반 백성이 주도하게 되었다. 개간지 경작권을 법제적으로 용인하기 위해 마련된 입안과 절수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확립시켰다. 이는 17세기 이후 화전 등 농지개간을 더욱 촉진함으로써 산림천택의 곳곳이 농경지로 전환되었고, 신생촌이 자리 잡으며 원시적 산림은 점차 축소되었다.

‘산림천택 여민공지’라는 이념을 채택한 조선의 산림 개방 정책이 야기한 변화의 모습을 살펴보자.

1. 스케치, 15~19세기 임목 축적의 변화

  15~19세기에 이르는 5세기 동안 한반도의 숲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임목축적(林木蓄積, growing stock)은 오랫 동안 역사학자들이 도전을 꺼려한 개념이지만, 숲의 상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각 시기 임목축적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면, 조선에서 진행된 인간의 역사적 활동이 산림천택에 미친 영향을 보다 계량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입목지(立木地, stocking land)와 무립목지(無立地, unstocked forest land)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인 임목축적은 최근 다른 나라의 임목 축적, 그리고 최근 한국의 임목 축적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국초 조선의 임목축적은 14세기말~15세기 초 산림의 현황을 살필 수 있는 역사적 기록과 최근 산림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축적된 각종 자료를 비교·분석하여 추산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2010년까지 한국에서는 산림 자원을 조사하고, 이를 이용하여 통계를 작성하였다. 20세기 초 및 중반에 작성된 산림에 대한 기록과 통계는 지난 5세기 동안 조선의 산림 이용 결과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1960년대 이후 본격화한 산림녹화가 성공하면서 남한에서는 임목축적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산림청에서 상세히 파악하여 기록하였다. 그뿐 아니라 산림학을 전공하는 여러 학자들은 나무의 종류별 특징과 성장속도, 임목축적량 증가 추이 등에 대한 실험적인 값을 얻었다.1)

다음 <그림 1>은 20세기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임목축적량에 대한 조사 기록과 15세기 시장에 대한 규정을 통해 지난 6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진행된 임목축적량의 변화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다. 임목 축적을 추산할 수 있는 자료를 얻지 못한 16~19세기에 걸쳐 한반도의 숲에서는 어떤 변화가 나타난 것일까?


[그림 1] 한반도 임목축적량 변화


2. 시장(柴場) : 임목 축적량 추산의 근거

15세기 조선의 임목축적은 시장의 설치와 운영에 대한 논의를 담은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고려와 마찬가지로 조선은 기인을 통해 전・궁과 각 관사의 난방과 취사에 사용할 땔감(燒木)을 공물로 거두어 사용했고, 이를 위해 각종 법제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자료에서 얻은 값을 과학적으로 연구된 최근의 자료를 적용할 때 수치라는 구체적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다.


우선 <經國大典> 京役吏條에는 국가에서 공물로 거두어 들이는 땔감의 양을 기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공조는 매년 각도에서 기인 332인을 차출하여 사재감(233인)과 선공감(99인)에 배속시켜 땔나무, 싸리 횃불, 숯을 공급하게 하였다.2)

이 가운데 사재감에 배속된 233인의 기인(其人)은 매일 땔 나무 57근(34.2kg, 연간 20,520근)과 이틀 간격으로 싸리 횃불 10근(6kg, 연간 6,000자루), 선공감에 소속된 99인은 한 사람이 매일 숯(炭) 5斗 5升(55근, 33kg, 연간 132석)을 납입케 하였다.3) 사재감과 선공감은 이를 받아들여 각 전·궁과 관서에 배분하였다. 선공감에 속한 기인 한 사람에게 부과하는 숯의 양은 사재감에서 바치는 기인 1인이 바치는 땔감과 횃불의 양과 같은 가치로 볼 수 있다.

숯이 같은 무게 땔감 발열량의 약 1.3배 가량이고, 1석의 무게는 땔감 1단의 1.75배 가량이므로, 열효율은 2.3배 가량이다. 백탄의 수율이 참나무 원목의 10~15% 가량이므로, 수율을 최대치인 15%로 잡으면 목재에서 얻는 발열량의 1/3 가량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값을 통해 기인 332인이 매일 바치는 땔감의 양을 통해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각 전·궁과 관서의 땔감 소비량은

사재감 : 땔나무 4,847,565근(2,908.5t),   싸리 횃불 425,225근(255.1t)


선공감 : 숯 5두 5승 1,960,200근(1,176.1t) ≒ 땔나무 발열량 5,880,600근(3,528.3t)
≒ 소요목재량 13,068,000근(7,840.8t)


으로 추산할 수 있다. 숯의 사용으로 인해 발열량과 목재 사용량 사이에 1,576,500근(945.9t)의 차이가 발생하는 데, 이는 숯을 굽는 과정에서 발생한 목재 손실이다.

이러한 목재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시장(柴場) 면적은 얼마인가? <經國大典> 工典, 柴場에는 “땔나무(柴)를 사용하는 여러 관사에는 물가(水邊)에 柴場을 지급한다.”고 하면서 각 관사에 지급한 시장 면적을 기재하였다. 이를 미터법의 도량형으로 환산하여 면적을 다시 계산한 것이 <표 1>이다.


해당 관사



둘레



면적(추산)



관사 수



면적 계



봉상시, 상의원, 사복시, 군기시, 에빈시, 내수사



20리



약 10㎢



6



약 60.00㎢



내자시, 내섬시, 사재감, 선공감, 소격서, 전생서, 사축서



15리



약 5.6㎢



7



약 39.20㎢



사포서



5리



약 2.54㎢



1



약 2.54㎢





14



101.74㎢



[표 1] 15세기 중엽 중앙 각사의 시장 지급 기준(<經國大典> 工典, 柴場) 4)

사료를 통해 연간 땔감 사용량을 파악할 수 있는 관서는 사재감과 선공감이다. 이 두 관서에 지급된 시장은 최대 560ha로 계산할 수 있다. 광주 분원에서 땔감의 성장을 기다리기 위해 60~70년을 주기로 이전의 시장에서 땔감을 채취한 전례에 비추어, 60년 주기를 적용할 경우 매년 벌채할 수 있는 시장의 면적은 두 관서 모두 9.3ha 이내이다.


9.3ha에서 사재감과 선공감의 목재수요를 충족하려면 60년 동안 축적되어야 하는 임목의 양을 계산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재감의 목재 소요량은 땔나무 4,847,565근(2,908.5t), 싸리 횃불 425,225근(255.1t)으로 모두 5,272,790근(3,163.7t) 가량이며, 선공감의 목재 소요량이 13,068,000근(7,840.8t)이기 때문이다.

이를 최근의 연구를 통해 얻은 목재 비중(소나무 0.47, 참나무 0.84)을 고려하면 다음 <표 2>와 같이 필요 목재 재적과 최소 임목축적을 계산할 수 있다.

 

구분



시장


면적



필요 목재



가채 면적


(ha/년)



필요 임목축적



무게(t)



비중



재적(㎥/년)



소나무



사재감



둘레 15리


약 5.6㎢



3,163.7t



0.47



6,731.3㎥/년



9.3ha


시장면적/60년



723.8㎥/ha



참나무



사재감



0.84



3,766.3㎥/년



405.0㎥/ha



선공감



7,840.8t



9,334.3㎥/년



1,003.8㎥/ha



[표 2] 사재감과 선공감 시장(柴場)의 필요 임목축적

  위 <표 2>를 통해 사재감과 선공감에 할당된 시장에서 해당 관사에서 소요되는 목재를 충족하려면, 60년 동안 축적되어야 하는 시장의 임목이 개략 600㎥/ha을 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적어도 2세기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된 시장이라면 사재감이나 선공감에 지속가능하게 땔감을 공급받을 수 있는 면적이었다고 상정할 수 있고, 이는 한반도 숲의 임목축적 속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국내외 온대 원시림의 임목축적 역시 이와 유사한 수준이다.


3. 숲의 나무, 참나무에서 소나무로


  임목축적에서 확인되는 인간의 간섭은 한반도의 숲을 구성하는 나무의 종류도 바꾸었다. 원시 상태의 한반도 숲에서 가장 많은 나무는 참나무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한 활엽수였지만, 인구와 나무 이용이 늘어나 숲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의 거주지 주변에서는 점차 소나무 숲이 늘어났고, 15~19세기는 그 결정적 시기였다.

  가. 가용공간의 숲

  건축에 사용할 나무를 구할 때 사람들은 최소비용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건축물에는 기둥이나 대들보와 같이 큰 힘을 받기에 튼튼하고 큰 약간의 목재가 필요하지만, 서까래나 판재처럼 큰 힘을 받지 않으며 건물에 많이 쓰이는 작은 목재도 필요하다. 따라서 과거 사람들이 사용한 모든 목재를 대상으로 분석하면,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구해 쓸 수 있는 곳[가용공간]에서 많이 자란 나무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다.

이광희 등(2010)의 연구는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들의 연구는 고건축에 사용된 여러 목재의 흔적을 분석한 결과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그림 2>는 현미경에 나타난 나무의 종류를 수치화한 결과를 그래프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프의 전체적 변화를 살피면,  선사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참나무는 이후 사용 빈도가 급격히 감소하였고, 선사시대에 가장 적게 사용하던 소나무는 고려 시대 이래 건축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며 늘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든 나무

*5% 이상의 나무


[그림 2] 건축물에 사용한 나무의 종류 변화(이광희 등, 2010)


  조선이 건국되고 발전하던 15~17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에 사용한 목재에서 침엽수의 비율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인구가 증가하였고, 이에 조응하여 더 많은 산림천택이 농지개간가 되었고, 농경지 주변에는 새로운 촌락이 생겼다.

촌락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더 넓은 숲에 접근하며, 이를 훼손하였다. 숲에서 가축을 기르거나 먹이를 채취하고, 땔감을 베고, 거름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숲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많은 유기물이 숲 밖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우거진 숲을 비우고, 숲의 토양을 척박하게 바꾸었다. 바로 이러한 조건이 소나무가 자연 발아하여 마을 주변에 소나무를 단일 수종으로 하는 숲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었다.

마을 주변에 있던 활엽수림이 사람에 의해 점점 훼손되는 만큼 소나무 숲은 늘게 마련이었고, 특별한 기능을 요하지 않는 부분에서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우선 건축재로 쓰기 마련이었다. 천방과 화전의 개발로 표상되는 15세기 이래의 대개간은 18~20세기 초에 사용된 건축재가 대부분 소나무 중심의 침엽수로, 활엽수는 특수한 부분에 간헐적으로 쓰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나. 대부등(大不等), 원시림의 바로미터

  대부등(大不等)은 조선시대 원시림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건축용 목재에서 가장 큰 것이 대부등[大不等]이었고, 매우 굵은 아람드리 나무 또는 그런 나무로 만든 목재(木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큰 목재는 적어도 200~300년의 생장 기간을 필요로 한다.

*건축물 등에 사용한 나무 흔적(이광희 등, 2010)

*대부등(大不等)에 사용한 나무(정성호, 2007)

[그림 3] 건축물의 목재에 쓰인 나무의 변화


조선이 건국되고 발전하던 15~17세기에는 고려시대만큼 소나무 건축재(73~40%)가 빈번하게 사용되었고, 그 다음으로 참나무(14%)와 느티나무(9%)는 고려시대에 비해 사용량이 크게 줄었다. 18~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건축재의 대부분이 소나무 건축재(89~72%)로 충당되었으며, 참나무와 전나무가 나머지 대부분을 담당했다.


이 시기에 조선은 목재의 고갈에 대응하여 소나무 등 목재의 공급을 위해 봉산을 지정하였는데, 그 지역이 태백산맥을 따라 경상도 북부에서 강원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17세기 이전에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목재를 공급하던 곳에서 대부분 제외되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17세기 이전보다 운송 여건이 열악하고, 나무의 생장에 불리한 조건을 지닌 지역에 남아 있던 일부 원시림의 활엽수와 이곳에서 상대적으로 잘 자랄 수 있는 금강 소나무를 대형 건축물의 기둥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8~19세기 목재 사용에서 특징적인 것이 전나무인데, 15~17세기에는 그 사용량이 2% 가량이던 것이 5% 가량으로 사용량이 2.5배 늘었다. 전나무의 주된 쓰임새는 대부등으로 이전 시기에 느티나무나 소나무로 사용하던 목재 부분이었다. 이는 더 이상 느티나무와 소나무 숲에서 큰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은 국가와 사찰에서 관리하는 주요 임야에 대형목재의 조달에 적합한 전나무를 심는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것이 최근의 목재 분석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다. <영건도감의궤>, 원시림의 상태와 위치 변화

  대부등은 건물의 격을 결정하는 목재였기 때문에 적어도 200 ~ 300년 가량 자란 나무를 사용했다. 이는 원시림과 유사한 것으로, 대부등의 크기는 건물을 축조할 당시 원시림의 상태를 반영한다.

조선은 궁궐 등 주요한 건축물을 지을 때 임시관청으로 영건도감을 설치하였고, 공사가 마무리되면 의궤를 편찬하였다. 다음 <그림 4>는 현존하는 32종의 ‘영건도감의궤’에서 17~19세기 궁궐 공사에 사용된 대부등의 크기와 공급지의 변화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 4] 17~19세기 궁궐 공사에 사용된 대부등의 크기와 공급지


대부등에 사용한 목재의 크기는 나무의 지름의 크기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의궤에 따르면 대부등의 크기가 17세기 이래 19세기까지 점점 가늘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에 보수된 영녕전에 사용한 대부등으로 만든 큰 기둥은 끝지름이 2.4척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지어진 팔달문과 인정전,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근정전의 기둥에는 끝지름이 1.9~1.8척에 해당하는 대부등이 사용되었다.

즉, 2세기가 지나는 동안 대부등의 지름은 0.6척(약 22㎝) 가량 가늘어진 것이다. 대부등이 각 시기 재목을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재목이라고 볼 때, 원시림이라 할지라도 숲의 임목 성장 조건이 열악한 곳 혹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나무를 이른 시기에 재목으로 사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각 궁궐에 사용한 대부등과 같은 큰 목재를 공급한 숲은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의궤의 기록을 통해 1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궁궐 공사 등에 사용한 나무가 어디에서 공급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오른쪽의 그래프로 제시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200여 년 동안 큰 기둥 등으로 사용된 부등목 생산의 중심지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해안에서 강원도로 옮겨졌다. 안면도가 있는 충청도가 그 다음 순이었다. 19세기 후반 경북궁을 지을 무렵 부등목은 함경도를 포함한 전국에서 공급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경복궁 주요 기둥으로 사용한 대부등은 대부분 강원도 설악산 사면에서 벌채한 것이 사용되었다. 대부등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이전과 달리 설악산 원시림에서 벌채한 수 백년 동안 자란 전나무가 쓰였고, 전국 곳곳의 마을 숲에서 채취한 느티나무도 쓰였다. 산림천택을 민간에 개방하여 개발과 이용이 늘어났고, 이는 원시림을 크게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4. 움직이는 소나무 숲, 금표와 봉산의 이동


  조선이 국용의 목재로 사용하기 위해 보호한 것은 소나무였다. 병선 등 주요한 국가 목재가 되려면 100년 이상 길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쓰임에 충족할 소나무의 양을 헤아려 일정한 지역에서 소나무를 길러 공급하였다.

소나무는 인구 밀집 지역의 주변, 바닷가, 인공으로 심은 곳 등 제한 숲에서 주로 자랐기 때문에 무제한 공급될 수 있는 목재는 아니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소나무의 사용이 늘어나면 곧 그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갈되었다. 특정 지역에 있는 제한된 소나무 숲에서 공급되는 소나무 목재로 인해 조선 건축 초 한양으로의 도성 이전과 대마도 정벌을 위한 병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라에서 관리하던 소나무의 대부분이 소진되었다.

태종 7년 4월 충청도 경차관의 보고에 따르면 안면도 등에서 병선 건조에 사용할 수 있는 소나무를 거의 다 소비하였다고 한다. 이에 국왕은 수령 책임 아래 소나무를 심고, 소나무 숲에 불을 내거나 벌채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세종 6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나라에서 배를 만들고, 사냥하는 무리가 놓은 불로 바닷가의 땅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거의 다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라의 소나무가 이렇게 빠르게 없어진 것은 고려 시기에 조성된 소나무 숲이 조선 건국 이후 급격히 늘어난 쓰임새를 충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한정된 면적을 가진 탓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국초부터 소나무 숲을 보호하고 확대하려 노력했다. 경국대전 공전 재식의 세주에는 “매년 봄 어린 소나무나 종자를 심어 기르고, 연말에 그 숫자를 왕에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또한 창덕궁, 건원릉, 남산, 태평관 북쪽, 장의동 등지에서는 관원에게 丁夫와 함께 소나무를 심게 했는데, 이는 국용 목재 충족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세종대 국가에서 소나무를 심을 곳으로 바닷가의 넓은 땅에 주목하였고, 그 결과 서해안을 중심으로 의송지(宜松地)가 지정되었다. 세종 30년 의송지(宜松地)는 경기도 23곳, 황해도 24곳, 강원도 5곳, 충청도 26곳, 함길도 21곳, 평안도 24곳, 전라도 93곳, 경상도 77곳 등 모두 293곳에 지정되었다. 이 가운데 경상도에서 평안도에 이르는 서해안과 남해안에 설정된 것이 244곳으로 대부분이었다. 소나무를 한양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주로 심은 까닭은 소나무가 국가의 건축 사업과 병선의 건조에서 특히 중요한 목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15세기 이후 각 지방에 세거하던 사족들 역시 자신들의 거주지 주변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산에 소나무를 심어 그 영역을 표시하는 관행이 점차 확대되었다. 산림 이용 증가는 산림토양을 척박하게 만들었고, 척박한 산림토양에서는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보다는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가 잘 자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이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방에서 소나무 숲이 확대되었고, 소나무가 조선을 상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6~17세기를 지나면서 바닷가에 설정한 금표 구역 내에서 생산되는 소나무의 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운송과 벌채의 어려움으로 이전에 국가에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원시림으로 관심의 대상을 옮겼다. 그 결과 이른바 17세기 이후 국가에서 지정하여 보호하는 봉산은 주로 태백산맥이 펼쳐져 있는 경상도 북부에서 강원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림 5>는 15~19세기 사이에 금표와 봉산이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옮겨갔음을 확인해 준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의송지’(1448)


*대동지지의 봉산 소재 고을과 진보(1864)


[그림 5] 15~19세기 금표와 봉산으로 지정된 곳5)

 





1) 임목축적 추산에 사용된 자료와 추산 과정은 별도의 논저를 통해 발표할 예정이다.
2) <六典條例> 卷10, 工典, 山澤司, 所管貢物. “其人[마련하는 땔감(燒木) 20,520근을 1명으로 한다.(57근*360) 숯(炭) 132석을 1명, 싸리 횃불 6,000자루를 1명으로 한다. 싸리나무는 6,000속을 1명으로 한다. ○ 12시를 1일로 하고, 30일을 1삭으로 하고, 12삭을 1명으로 한다. ○ 땔감 57근을 1丹, 싸리나무 6節을 1束으로, 숯(炭) 15斗를 1석으로 한다.] 421명 4삭 1일 1시[元貢 332名零 加定 89名零 수시가감하고 항상 정한 수가 없다] 원공가미 43,212석 10두 2승 4홉 2 …… (경상도에 162명 9삭 27일 5시, 전라도에 104명 5삭 8일 7시, 충청도에 81명 3삭 8일로 …… 경기도에 22명 4삭 24일. 강원도에 25명 4삭 15일 9시로 하여 ... 황해 평안 양도에 25명 6일 10시로 하여 매 명에 …… ) 444일 ……”
3) <大典會通> 卷6, 工典, 京役吏. “[속]進排炭 15두를 1석으로 하고, 매 1석은 150근으로 한다.”

4) 조선시대에는 위도 1도를 200리로 계산하였다. 지구 둘레가 4만㎞이므로, 이를 360도로 나누면 111.1㎞(=1도)이다. 따라서 10리는 5~6㎞(약 5.6㎞)이다(이상태,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2000, 225쪽).
5) 이기봉, 「조선후기 봉산의 등장 배경과 그 분포」, 문화역사지리 18,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02, 10·12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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