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중세사2분과) ▶ 천방(川防)에서 화전(火田)으로의 전환 천방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던 15∼16세기에 화전(火田)은 농지개간에서 매우 부차적인 방식이었다. 천방 개간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17세기 무렵 전국 곳곳에서 더 이상 천변에서 개간할 수 있는 땅이 고갈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변화가 화전 개발에 불을 당겼다. 16세기까지 천방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천변에 있는 넓은 무너미의 땅이 경작지로 바뀌고 있었다. 여기에 경기 외의 지역에 분포하였던 광대한 강무장을 경기 일원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평지와 구릉지가 농경지로 전환되었다. 태안 강무장은 순성 이서 지방으로 오늘날 당진, 서천, 태안, 홍성의 상당 지역을 포괄할 정도로 그 땅이 넓었다. 그러나 산지가 많은 일부 지역에서 화전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평전(平田)이 적고, 산 위나 중턱에 자리 잡은 산전(山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탓이었다. 강원도에서는 17세기 이전에도 이미 산에 있는 밭 가운데 몇 년마다 바꾸어 경작하면 이를 화전(火田)이라 불렀다. 이러한 토지는 국가의 수취를 위해 작성한 장부인 양안에 기재하지 않고, 수령이 따로이 속안(續案)을 만들어 여기에 기재하여 관리했다. 이곳에서 거둔 세는 수령 책임하에 처분할 수 있는 것으로 사재정이었다. 전국의 삼림지대에서 화전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양란을 거치면서 약화된 국가의 통제력은 중앙의 권세가, 지방의 요호와 부민층을 『경국대전』에서 금지대상으로 삼았던 산허리 이상의 땅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덩치 큰 소, 든든한 농기구에 넉넉한 식량을 가노와 몰락한 소농민의 손에 쥐어줌으로써 산지의 완경사면에 널리 분포한 미개발의 산림 지역을 새로운 가업경영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왕자궁을 포함한 각종 궁방 역시 화전 개발에 적극 참여했고, 이는 규장각에 보관된 다수의 『화전성책』류를 통해 그 규모와 운영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궁방에서 절수한 화전은 전국 곳곳에 널려 있었고, 규모는 방대하였다. 왕자궁이 절수받은 화전은 경상도 안동부의 북면에서 4∼8천 경, 강원도 회양부 수입면에서 4,812일 1식경이라는 방대한 규모였다. 이러한 화전의 규모는 그 면적이 현이나 면을 단위로 할 정도였다. 조선 국가는 양전을 통해 부세수취를 늘릴 때 직면할 저항을 피하면서 급속히 늘어나는 종친들에게 산림지역을 사패지로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생계를 보장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천방과 화전에 대해 논의한 기록을 통계적으로 처리한 다음의 <그림 1>은 15~16세기 천방 중심의 농업 개발에 17세기 이래 화전 중심으로 이행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림1] 15~19세기 초 조선왕조실록의 천방과 화전에 대한 논의 추이 ▶ 쟁송과 관리의 대상 : 17세기의 화전 조선이 국초부터 고수했던 화전 금지 정책에 반하는 17세기의 화전 개발은 민과 관, 민과 수령 등 다양한 세력이 화전을 매개로 다투게 만들었다. 양란 이후 진황지를 재개간하고, 양안을 복구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한 결과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산간지역이나 심지어 해택에 이르기까지 ‘1무의 한광지도 없다’고 할 정도로 전국의 토지가 개간 확장되었다. 중앙 정부와 수령은 이러한 추이와 실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새롭게 곡물 생산의 주요 지목으로 부상한 화전에 대한 공식적인 부세수취의 방향과 규정을 마련하는 데 다소의 시간이 걸렸다. 『경국대전』에서 살필 수 있는 산전 혹은 화전의 허용 범위는 산 중턱[山腰]까지였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로 경지의 부족한 곳에서는 산자락에서 시작된 화전이 산의 정상 부분까지 넓혀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고지대의 화전 개발은 무너미 땅에서 개발되는 땅에서 홍수와 가뭄 뿐만 아니라 무너져 내린 산이 논과 밭을 덮어버리는 천반포락을 일으켰다. 따라서 국가는 누누이 화전의 금지를 강조하였고, 이는 16∼17세기를 통관하는 현상이었다. 화전의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쟁송은 더욱 늘었고,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화전으로 인한 갈등에 국가가 적극 개입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화전은 17세기 조선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폐단’으로 규정되었다. 화전의 심각성은 현종 4년(1663)년 무렵 헌납 이민서의 지적에서 엿볼 수 있다. 이민서는 “화전(火田)의 폐단이 끝이 없고, 화전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 높은 산에서 화전을 만들며 큰 숲을 멋대로 불질러 태워 버리는 예도 비일비재하였다. 1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키운 숲이 2~3년의 농사를 위해 한꺼번에 불로 태워지고 있었고, 이는 국가적 재난이었다. 조선은 늘어난 화전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조선 역시 소득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칙을 실현하는 가운데 국가를 경영했기 때문이었다. 『계암일록』에는 예안 지방에서 수령과 민 사이의 갈등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인조 13년(1635) 예안 지방에서는 화전의 결수를 양안에 등재하는 문제로 예안현감과 지방민 사이의 갈등이 소송으로 비화하고 있었다(1635. 2. 12). 이는 인조 12년(1634) 11월 경상좌도 양전사로 임명된 신득연이 안동 일원에서도 시행한 양전사업의 결과였다(1634. 10. 7). 문제는 양전 과정에서 산전, 혹은 화전 명복의 토지를 양안에서 누락한 예안현감이 포폄에서 너무 많은 폄사를 받은데 있었다. 이에 예안현의 士民은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한 수령에개 폄사를 날린 신득연에게 소송[呈訴]을 제기하였다(1635. 2. 8). 당시 소송의 쟁점은 화전을 모두 양안의 전결수에 기록할 것인가였고, 이는 화전개발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조종성헌에서 양안에 등재될 수 있는지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개간한 숲을 숨기지 말라는 중앙의 지침을 수행한 신득연과 화전을 속안에 기록할 뿐 양안에 등재하지 않는다는 이전의 원칙과 이익을 고수하고자 하는 예안현감과 사민들 사이의 갈등이 화전을 매개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인조 7년(1629) 안동의 화전은 세안(稅案)에 등록되어 있었고, 안동부사는 이를 중앙에 알려 삭제할 것을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인조 20년(1642)에도 산골짜기 화전에 여전히 일체 구실을 징수했다. 그러나 효종 4년(1653) 무렵에 이르면 다시 많은 화전이 공식적인 부세수취 대상에서 누락되었고, 관행적으로 수령의 사사로운 비용으로 쓰였다. 이는 인조 12∼13년에 양전이 진행된 이후에도 양안에서 누락된 토지가 있었겠지만, 새로이 개간된 화전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화전에 대한 궁가의 절수가 일상화되면서 화전은 왕실과 국가 운영의 문제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영남에서 17세기 중엽부터 화전에 중세를 부과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고, 수취액수는 민전의 갑절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안동부의 화전세는 호조에 납부하게 되어 있었는데, 궁방에서 절수하여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은 효종 3년(1652) 열읍의 화전은 읍마다 타량하고 속전의 예에 따라 출세하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어 현종 3년(1662)에 마련된 양전사목에서는 산군에서 화전은 원전과 일체로 타량하여 속전에 따라 별건성책하게 하였다. 이해 9월 화전절수가 당시에 처음 생긴 일이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지방의 수령은 일찍이 화전세의 사취가 용인되었기 때문에 화전 개간을 묵인 조장하였고, 시간이 지나 숙전이 된 화전은 은루결[隱漏結]로 남게 되었다. ▶ 경관 변화 : 안동과 예안 일원의 사례 고려 말 조선 초 구릉성 산지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안동과 예안 일원은 사족들이 산림에 은거하면서 가문의 새로운 기반을 일구는 중요한 터전이었다. 소백산맥의 아래로부터 산의 구름처럼 이어지는 구릉성 산자락에는 깊지 않은 실개천이 흘렀고, 사족들은 이를 농경과 생활의 자원으로 이용했다. 냇가를 중심으로 논과 밭의 개간이 마무리되는 가운데 족세가 크게 확대된 안동과 예안 일원의 사족들은 일가의 힘을 모아 산지에서 화전을 개발하였고, 그것이 본격화된 시기가 17세기였다. 17세기에 이르면 안동 지방에서 이루어진 개간은 주로 화전이었다. 화전이 늘어나면서 안동 『영가지(永嘉誌)』에는 풍산현의 니금곡촌(泥金谷村), 월동촌(月東村), 적지촌(赤旨村) 등은 화전민 촌락으로 구분하여 표기했는데, 이들 마을에는 “산의 백성들이 살고 있다[山氓居焉].”라고 하였다. 17세기 경상도 북부에는 유원지(1598∼1674)의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에 담긴 것과 같은 개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다양한 개간법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는 이전 시기부터 진행된 다양한 개간의 경험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일찍이 16세기 중후반 경상도 성주 지방에서도 화전의 경작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이문건이 남긴 『묵재일기』에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성주에서는 화전 경작의 댓가로 관에 화전조[火田粟]을 납부했으며, 새로 개간한 것으로 보이는 가경화전이 존재하였다. 이문건은 선조의 묘역보호를 구실로 화전을 막고 묘역으로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화전을 경작하던 백성들과 송사를 벌였다. 사족에 의한 화전민의 토지 약탈은 사족들의 초기 이주 과정에서 흔히 발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화전에 대한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지 않은 사정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예안의 한곡에 정착한 김효우가 정착한 곳 역시 화전민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선성지』 한곡사적에는 김효우가 한곡에 정착하는 과정을 이 마을은 예부터 전하기를 초목이 숲을 이루어 단지 화전민 한 집만이 살고 있었으나 김효우가 대대로 현 사천에 살면서 본 현의 향임으로 상리의 장점(匠店)이 있는 곳을 왕래하면서 이 마을을 두루 살펴보니 땅은 비옥하고 샘은 맛이 좋아 농사를 지을 수도 마실 수도 있었다. 드디어 이거하기로 결정하고 비로소 이곳에 집을 지었다. 네 아들은 숭조, 흠조, 문조, 계조이다. …… 계조와 숭조의 자손들이 많이 불어서 시내 좌우로 퍼져 살았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애초에 화전민이 거주하던 곳을 시거지로 삼고 개간을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개간이 이루어진 중심지는 ‘시내 좌우’라고 하듯이 천방의 시설을 통해 관개할 수 있는 천변이었다. 그러나 16세기까지 천방의 시설이 가능한 천변의 개간이 마무리되어 가면서 화전이 이루어지는 곳은 더 높은 데로 옮겨갔다. 16세기 후반 이귀(李貴)가 1576년 경 안동 지방을 여행하면서 곳곳에서 화전의 경작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관찰한 바 있다.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았다. 촌옹도 따라와서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한 점을 가리키며 저곳이 어느 곳의 어느 산이라고 한다. 학가, 청량, 일원 등의 산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 바라보니 촌 사람들이 산의 나무를 모두 벌목하여 장차 화전을 만드는 노력이 많았다. 들리는 얘기에 그곳에서 얻은 조는 먹거리로 충분하다고 한다. 한해를 마치면서 또한 번거롭고 고통스런 부역을 면하니 세간의 시끄러움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안동 일원의 커다란 산을 바라보는 중에 산의 곳곳에서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국가의 부세와 역역의 부담을 회피한 유리민들은 화전에 조(粟)를 심어 생활했고, 이들 대부분은 국가의 부세 수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부 화전은 숙전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경작한 지 30년이 넘는 화전도 적지 않았다. 화전 주변에 발달한 촌락은 기왕의 촌락에 비해 그 경관의 특색이 잘 드러났다. 16세기 후반 이래 생성되기 시작한 화전의 가용공간은 이전의 배산임수를 특징으로 하는 모여 있던 집촌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화전지대에서 사람들은 산 중턱에 집을 마련하였고, 밭(화전)은 산허리에 띠를 이루며 산재하였다. 사람들이 사는 집과 집은 서로 흩어져 있었기에, 화전민 촌락은 산촌(흩어진 마을)을 특징을 드러내었다. 이는 화전으로 개간된 토지의 생산력, 경작지의 분포, 재배 작물의 특성 등 여러 요소가 결합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림2] 화전민 마을의 모습 ⓒ참고문헌 : 조풍연 최석로, 『사진으로 보는 우리 문화와 역사』 , 서문당, 2008 ▶ 개발의 속도 : 17세기 후반 ∼18세기 초 안동 일원 17세기 후반 ∼18세기 초 급속한 화전 개발의 모습은 안동 지방의 사례에서 살필 수 있다. 각읍에서 수령은 화전에 대해 양안과 구분되는 토지대장[별건 성책 문서]을 작성하여 관리하면서 이를 근거로 화전세를 수취했다. 안동지방의 화전세에 관한 기록을 숙종 20년(1694)과 숙종 43년(1717)의 『승정원일기』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화전세는 화전 면적에 근거한 것이므로, 화전세의 증가를 통해 화전 면적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숙종 20년(1694) 안동부 북면에는 숙원궁으로 이속한 왕자궁의 절수처가 있었고, 이곳에서 매년 화전목 2동 5필을 수취했다. 17세기 이래 화전 25일경을 평지 1결로 환산하였고, 1결에 화속 2∼4두를 거두게 했다. 이를 당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105필(火田木 2동 5필) * 미 6두(= 대동포 1필) = 미 630두 화전 25일경 당 火粟 2∼4두 미 630두/2∼4두 = 157.5∼315단위 * 25일경 = 3,937.5∼7,875일경 = 157.5∼315결 로 계산할 수 있다. 이로부터 숙종 20년 무렵 안동부는 3,937.5∼7,875일경에서 화전세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승정원일기』에서 숙종 43년(1717) 안동부사가 매년 ‘수 천석(數千石)’의 화속을 거두었다는 기록을 살필 수 있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숙종 43년의 안동부 전체의 화전 규모를 추산하면 93,750∼187,500일경(3,750∼7,500결)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안동부 북면과 안동부 전체의 화전 면적을 통해서 17세기에서 18세기에 진행된 화전 개발의 추이를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먼저 17세기 초반의 결부수를 기록한 『영가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가지』에 기록된 17세기 초반 안동의 전결수는 12,403결 1부 2속이었다. 안동부 15개 면으로 그 값을 나누어 평균값을 구하면, 1개 면의 토지는 평균 827결 가량이었다. 숙종 20년 당시 안동부 북면의 화전은 157.5∼315결로 환산할 수 있는데, 이는 면당 평군 결수의 19~38%에 해당하는 결수이다. 3,937.5∼7,875일경으로 표기된 화전의 실제 면적은 17세기 말에 안동부 북면 일원에서 양안에 등재된 경작지와 대등한 수준에 달했을 것이다. 18세기 초 안동부사가 거둔 화속은 안동부에서 파악한 화전의 규모는 이전 시기보다 더욱 방대하게 증가한 상황을 반영한다. 화전 면적으로 안동부 15개 면으로 나누면 1개 면에서 평균 화전 면적으로 6,250일경∼12,500일경[250∼500결]이라는 값을 얻을 수 있다. 이 값은 숙종 20년 안동부 북면에서 숙원궁으로 이속된 화전보다 1.6배 가량 많은 것이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에도 화전은 급속히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안동 지역은 이미 화전이 양안에 등재된 경작지의 면적을 상회하였고, 개발의 속도 역시 가속화되어 곧 더 이상의 화전 개발은 한계에 도달했을 것이다. 안동 일원에서 시작된 화전 개발은 인접한 군현과 강원도 등 여타 지역으로 확대되어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 18∼20세기 초까지 화전 개발의 추이 하삼도에서 화전개발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최고조에 도달했다. 하삼도의 화전 개발이 고조점을 찍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개발된 화전 지역은 강원도와 북삼도였다. 17세기 후반인 숙종 2년(1676) 평안도 리산(理山)에서는 이미 방대한 규모의 화전이 개발되었다. 리산에서 1년에 거두는 대동화속(大同火粟)이 500∼600석 규모였는데, 이는 46,875∼112,500일경에 달하는 화전에서 수취할 수 있는 액수였다. 일찍부터 화전이 개발된 북삼도는 하삼도보다 산이 높고, 숲이 울창한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하삼도의 화전 개발이 끝난 후에도 개발이 계속되었고, 이곳에서 터전을 잡지 못한 이들을 간도 지방으로 옮겨주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 결과 전국의 산자락에서 화전이 없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화전 개발은 확대되었다. 이러한 추이 속에서 화전의 규모는 구체적 수치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중엽 정상기는 『농포문답』에서 전국 8도의 원결을 134만여 결인데, 화전의 총 결수가 50에서 60만결이 넘는다고 주장하였다. 17세기 이래 화전 25일경을 1결로 환산하는 관례를 고려할 때, 50-60만결의 화전은 1,250만∼1,500만 일경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면적이었다. 이에 정상기는 50-60만결의 화전이 양안에 등재된 134만결보다 넓은 면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3] 18세기 중엽 화전의 비율 : 정상기의 『농포문답』 이후 18세기 말 정조는 『홍재전서』에서 전국 각 고을에서 수령들이 화속으로 거두어 사적으로 쓰는 토지의 면적이 양안상의 토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언급한 바 있다. 19세기 초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쓴 『경세유표』에서 평지의 땅과 화전의 면적이 대등한 수준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특히, 정약용은 양전사업에서 은루결·산전·화전이 양전 결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양전결수에 포함되지 않은 화전은 산악이 3/4, 평지가 1/4인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을 고려하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약용이 어림할 때 화전의 총면적은 평지와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그림4] 19세기 초 화전의 면적 비율 : 정약용의 『경세유표』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에 주로 활동한 두 인물이 평가한 화전의 규모는 양안상에 등재된 경작지에 버금가는 면적이었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무양안을 고려하여 230만 ha 정도일 것으로 추산되던 조선의 경작지가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 무렵 파악된 430만 ha의 내역으로 쉽게 수렴된다. [그림5] 20세기 초 한반도 토지의 정량면적 파악 과정 17∼18세기 개발된 하삼도의 화전은 숙전으로 전환되고,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에서는 대부분 등기부와 지적도에 기재되었다. 17세기 이래 화전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지역은 숙전화의 과정을 거쳤는데,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개발된 화전 역시 점차 하삼도와 같이 숙전화의 경로를 밟았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에 화전이 가장 널리 분포한 지역은 19세기 이래에 여전히 화전 개발이 활발했던 함남-평북-평남-강원의 순서였다. 1926년 무렵, 전국의 화전은 40만 ha였고, 화전민 인구는 115만 가량이었다. 화전민이 호당 2ha 가량을 경작했던 함경남도는 화전과 화전민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지만, 전체적으로 숙전화가 진행 중이었다. 이와 달리 전체 경작지 중 80%가 화전이 평남 성천은 20세기 초가 화전 개발의 극성기였다(동아일보 1926년 09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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