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중세사2분과)
실제 농지 개간의 추이는 개간이 이루어진 곳의 입지와 환경을 살피면 파악할 수 있다. 기록에는 진황지의 재개간, 무주 한광지나 산림천택에 대한 새로운 개간 등이 대부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개간했는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국초의 개간은 진황지의 재개간에서 주인없이 넓은 황무지를 경작지로 전환하는 개간으로 이행하였다. 고려 말 외적의 침입과 사회적 혼란은 진황지를 발생시켰고, 이전부터 널리 분포하던 구릉수택의 한광지는 늘어난 인구압으로 급속히 개간되었다. 개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구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양전을 시행하였는데, 기사양전(1389)에서 결부수로 80여 만결 가량이 확보되었다. 15세기 초반 태종대까지 연해지역의 진황지의 개간은 마무리되었다. 연해주군에 대해 양전을 시행한 태종 1년(1401) 양계를 제외한 6도에서 126만결 가량이 파악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미 150만 결 이상이 경작지로 개발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조선은 한광지에 대한 개간을 추진하였고, 경작지의 면적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세종 10년(1428) 전라도 이북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산림수택’이 개간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새로운 토지를 개발한 조선은 이에 적합한 농업기술을 조사·정리·보급하였다. 그 방향은 상경연작 기술의 발전시키고, 수리시설을 확충하면서 연해와 천변의 저습지를 개간하면서 벼농사를 크게 확대하는 것이었다. 밭농사에서도 면화의 재배가 급속히 확대되는 가운데 작부체계와 시비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세종대 정초가 편찬한 『농사직설』에는 당대 각 지역의 노농들에게 수집한 최신의 농업기술이 실리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급속히 확장되는 논과 밭에 적용할 농업 기술을 널리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농사직설』에는 새로 개간한 땅을 숙전으로 만드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논으로 개발된 곳은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조밀한 곳”, “진흙으로 가득한 연못과 질척거리는 황무지”, “막힌 물로 (진흙이나 수렁이) 깊어진 곳은 사람과 소가 빠져 걸을 수 없는 땅”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농사직설』에서 숙전으로 만들고자 했던 땅은 우거진 초목, 고인 물과 수렁을 특징으로 하는 무너미 땅이었다. 당대인들이 서술한 ‘천택(川澤)’이나 ‘수택(藪澤)’은 비로 이런 곳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급수하고 배수하는 관개 시설이 마련된다면 이곳은 벼를 재배할 수 있는 논으로 바뀔 수 있었다. ▶ 천방(川防)을 이용한 수전(水田) 개발과 관리 천방을 통한 개간과 관개는 고대사회로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농지개간을 위해 국가적으로 활용된 것은 조선의 세종과 문종 때부터였다. 그러나 『경국대전』이 편찬될 무렵에도 천방은 여전히 제언사에서 관리하는 수리시설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국초부터 제언의 수축을 통해 관개면적을 늘리면서 농지를 개간하려는 노력은 세종 2년 눌제와 벽골제가 붕괴되고, 제언 수축을 주도한 판청주목사 우희열이 사망하면서 좌절되었다. 이후 일본 등으로부터 수차를 이용한 관개 기법을 받아들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제언과 수차의 보급에 실패하는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 실험적으로 건설된 천방이 큰 성과를 거두면서 천방(보)의 보급이 본격화할 수 있었고, 이는 초기에 국가와 수령이 주도하는 대규모 천방 건설로 나타났고, 이후 지방의 사족과 민인들이 조금 더 작은 규모의 천방을 자치적으로 건설하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조선이 국가적으로 처음 천방을 설치한 것은 세종 10년(1428) 세종의 특별한 명을 받고, 연기현감으로서 조천 유역에서 1,000여 경을 개간한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개간은 이후 널리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구체적인 기법은 이후 실록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종 2년(1451) 11월에 방천(防川)은 “냇물을 막아 모아두는 시설인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관개(灌漑)에 널리 사용하는 시설이었다”라고 했다. 방천은 특히 저습지에 수전(水田)을 만드는 데 유용했지만, 당시까지 백성들이 널리 활용하지는 않았다. 문종은 천방을 설치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사케 하였다. 즉, 각도의 관찰사에게 내린 유시에서 “제언(堤堰)은 드러난 수원(水源)이 얕지만 공역(功役)이 많이 들고, 천방(川防)은 원류(源流)가 있는 물이어서 적은 노력을 들이지만 이익이 많다. 이 때문에 천방이 가장 좋고, 제언은 그 다음이다. 소문에 들으니, 여러 고을에는 천방을 만들 만한 곳이 자못 많다고 한다. 이익이 될 만한 물이 있는지 순행(巡行)하며 널리 묻고 경(卿)들은 (그 결과를) 아뢰어라[然堤堰 則水源淺露 功役爲多 川防則水有源流 功小利多 故川防最好 而堤堰次之 仄聞 諸邑可爲川防之處頗多 而水有遺利 卿巡行廣問以啓].”고 하였다. 성종 16년(1485)에는 『경국대전』의 수리시설 관리에 대한 규정을 개정하였다. 당시 『경국대전』에는 제언의 수리와 축조에 대한 규정이 있을 뿐, 천방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법규에 없아 포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천방에 대한 수령의 관심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긴 물줄기가 있는 곳에 건설되는 천방을 만들려면 인접한 지방관과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성종 16년(1485)에는 천방의 “물줄을 끌어오는 곳이 혹 다른 고을이거나 아니면 1, 2식(息) 되는 곳”에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래서 각도 관찰사가 “가장 합리적이고 마땅한 곳을 탐문(探問)하여 장정[丁夫]을 조발(調發)해서” 천방을 쌓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관찰사에서 제언사에 이르는 보고의 절차, 중앙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는 등의 절차로 인해 작업의 때를 놓지는 예가 많았다. 이에 성종 19년(1488) 이후에는 제언과 천방(川防)의 작업 일체를 관찰사가 주관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후 각 지방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진행된 천방을 이용한 개간에 대한 기록이 실록에 기재되지 않게 만들었다. 천방을 만들 때 제언사에 대한 보고와 승낙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지방의 사족과 농민은 수령의 감독 아래 자율적으로 수리시설을 만들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초에 “제언(堤堰)·천방(川防)은 예부터 해 온 것인데, 가을에 곡식이 익을 때에 수령(守令)과 백성이 혹 고기잡이를 하느라고 물을 터서 제방(隄防)을 거의 다 무너뜨린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언급에서 천방이 수령과 백성이 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대중적인 장소로 등장한 새로운 경관이었으며, 수령의 책임 아래 수령과 백성들이 천방을 이용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천방 건설로 개간하여 관개한 면적 수리시설은 벼농사에 필수적인 것으로 주로 하삼도에 건설되었다.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저수지의 87.6%, 보의 88.3%가 하삼도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다른 지역의 수리 시설도 농업에서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으나 한반도 전체의 수리시설의 변화는 하삼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수리시설로서 천방의 가장 큰 장점은 문종 즉위년 7개도의 관찰사들에게 내린 유지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저수지보다 훨씬 넓은 면적에 관개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고려시대에 주로 만들어진 수리시설은 저수지였는데, 제언으로 불렸고, 조선에서도 국초부터 이를 관리하기 위해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제언으로 불리는 저수지는 고려에 이어 조선 시대에서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저수지는 수원이 작아 관개면적을 넓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 제언은 둑 안쪽에 잠기는 땅에 비해 새로 관개할 수 있는 땅의 면적이 그리 넓지 못했고[벽골제 1:3], 대풍우로 둑이 무너져 제언 아래 많은 농경지가 침수되는 예가 적지 않았다[1420년 8월 눌제 600여결, 9월 벽골제 2,098결]. 15세기 초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세종과 허만석은 흐르는 냇물을 이용하는 천방(川防)을 시도했고, 이는 수차 등 여타의 수리시설의 효율성을 압도하는 것으로 입증된 15세기 중엽 이래로 국가의 정책적 관심을 기울이면서 널리 보급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 기재된 저수지가 전국에서 44개인데,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이르면 그 수가 723개일 정도로 많다. 중종 18년(1523) 제언사에서 보고에는 저수지가 전라도에 900여 개, 충청도에 500여 개, 경상도에 800여 개가 있었다고 했다(1月 8日(庚戌)). 19세기 초에 편찬된 『만기요람』(1808)에는 경상도에 있던 1,765개의 저수지 중 1,666개가 사용중이었고, 99개는 폐기되었다. 이와 달리 천방으로 건설한 1,339개의 보가 새로 추가되었다.
[표1] 16~19세기 수리시설의 양적 변화 추이, ()안의 숫자는 폐기된 저수지의 수
[그림1] 16~19세기 수리시설의 양적 변화 추이 15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그리고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도 전국적으로 많은 저수지가 계속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18세기에 화전개발이 심화되고, 보의 건설이 보편화되는 가운데 일부 저수지들은 사용할 수 없거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폐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규모가 큰 저수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저수지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만여 명을 동원하여 복구한 벽골제는 그곳이 오늘날 만경평야라고 불리 듯, 9,840여 결을 관개할 수 있었고, 눌제는 벽골제보다 많은 15,080명을 동원하여 복구할 정도의 규모였다. 이후 홍주의 합덕제, 연안의 남대지,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 등 저명한 여러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수산제의 관개면적은 4,000-7,000석 정도를 수확할 수 있는 규모였지만, 여타의 저수지는 천방보다 관개면적이 넓다고 보기 어렵다. 15세기에 만들어진 보의 관개 면적은 저수지보다 훨씬 방대했다. 이는 『세종실록』 지리지를 포함한 연대기와 『경상도속찬지리지』에 기재된 수리 시설의 관개면적을 비교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부여와 청양에 설치된 보의 규모와 관개면적을 상세히 적고 있다. 충청도 공주목 부여현에 설치된 대난보(大難洑)는 둑의 길이가 217척(101.3m)인데, 이로써 국둔전(國屯田) 74결에 물을 대고 있었다. 홍주목 청양현에 설치된 벽항보제(蘗項洑堤)는 둑의 길이가 3백 23척(150.7m)인데, 이로써 논 1백 10결을 관개하였다. 보의 관개면적은 둑의 길이에 비례하여 넓어졌다[이는 지역적으로 가깝고, 비슷한 지형을 가진 지역이라 하천 폭과 유량이 비례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뒤에 사례로 상세히 소개하게 될 연기현과 전탄에 만든 천방의 관개면적은 훨씬 규모가 컸다. 이미 세종대에 만든 연기현의 천방 관개 면적 1,000여 경이었고, 이후 성종 16년(1485)에 만든 전탄 천방의 관개 면적 역시 1,000여 경이었다. 전탄은 이후 3,000∼4,000여 경이 더 개간되었고, 그 이후에도 방대한 면적을 개간하여 관개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달리 『경상도속찬지리지』에 기재된 723개의 제언 중 관개면적 10결 이하 252개(34.85%), 10∼49결 361개(49.93%), 50∼99결 77개(10.65%), 100∼299결 30개(4.01%), 300결 이상이 3개(0.42%)이며, 최대 관개면적은 405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림2] 15세기 저수지와 천방의 관개 면적 분포 18세기의 기록에서도 보는 일반적으로 저수지보다 관개면적이 넓었다. 18세기 중엽 편찬된 『여지도서』을 통해 여러 군현에 설치된 수리 시설의 현황에 대해 살필 수 있다. 이 기록에는 경기도의 금천(衿川: 현재 시흥)의 제언조에는 저수지에 해당하는 저수지[堰]과 천방을 통해 관개하는 보(洑)를 구분하고, 관개면적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18세기 중엽 금천에 소재한 6곳의 저수지[夜·光·重·唐·始·事字堰]으로 관개하는 면적은 1,445두락인데, 각각의 저수지가 관개하는 면적은 夜字堰 175두락 원주 光字堰 在縣南老溫寺里 126두락 重字堰 184두락 唐字堰 322두락 始字堰 352두락 事字堰 276두락이다. 저수지 한 개로 평균 240여 두락을 관개하였다. 관개 시설 중 저수지와 구분되는 柳木亭洑와 觀音洑가 있는데, 이들은 각각 2250두락과 825두락을 관개하였다. 한 개 당 평균 관개면적은 1500여 두락에 달했고, 보의 관개 면적은 저수지보다 평균 6.4배 넓었다. [그림3] 18세기 중엽 경기도 금천 지방의 수리 시설과 관개규모(여지도서) [그림4] 18세기 중엽 경기도 금천 지방의 수리 시설과 관개규모(여지도서) 19세기 초에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전국의 저수지와 보의 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살피면 전국의 관개면적에서 저수지와 보가 담당하는 비율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만기요람』에 기재된 전국의 저수지는 3,695개였는데,이 중 168개가 폐기되어 당시 3,527개를 사용 중이었다. 보는 폐기된 것 없이 2,265개가 가동 중이었다. 경기도 금천에서 살필 수 있는 저수지와 보의 관개면적 1 : 6.4라는 값을 대입하여 계산하면, 19세기 초 수전(水田)에 대한 보(洑)의 관개면적은 80.4%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조선후기 관개시설에서 천방(보)이 저수지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폐기된 저수지가 있는 것과 달리 폐기된 보가 없을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표2] 19세기 초 전국의 제언과 보의 현황과 관개담당율(만기요람) [그림5] 19세기 초 전국의 제언과 보의 현황과 관개담당율(만기요람) ▶ 천방 개간 사례 1 : 연기 현감 허만석의 축언(築堰)과 개간(開墾) 허만석이 개간한 곳은 금강 중류에서 미호천과 조천으로 분지하는 곳에 널리 펼쳐진 무너미으로, 전의에서 흘러내리는 조천에 제언을 설치한 후 하천의 제방을 쌓고, 봇또랑으로 물을 대고 빼는 시설을 마련하여 개간한 논이 1,000여 경에 달했다. 허만석은 세종 9년(1427) 7월에 연기 현감(燕岐縣監)에 제수되었고, 세종의 특명에 따라 연기현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천방을 축조하였다. 연기현감으로 천방을 축조하는 과정과 성과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연기현조에서 살필 수 있다. 이는 이후 연기현에서 허만석과 관련한 다양한 전승을 만드는 기원이 되었다. 이에 따르면 아마도 이듬해인 세종 10년(1428)에 현 북쪽의 냇가에 둑을 설치하고 물을 가두었고, 이 물로써 1,000여 경의 땅에 관개하였고, 그 이익이 매우 컸다고 한다[縣北十五里 防川大堤 灌注千餘頃 提在淸州之境 … 提成民賴其利 至今稱頌]. 허만석이 개간하기 전에 연기현의 조천 유역은 전의와 전동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미호천이 합류하는 곳에 가까이 있어 홍수로 빈번히 범람하는 넓은 무너미가 있었다. 이곳 무너미에는 개간 전과 후에도 무너미에 널리 자라는 갈대(물가)와 억새(모래톱의 높은 부분)가 많았다. 바로 이곳에 허만석은 둑을 쌓아 보를 설치케 하고, 저습한 무너미에 봇또랑를 설치하여 물을 대고 뺄 수 있는 관개시설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1,000여 경의 논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그 땅이 오늘날 죽림리를 중심으로 한 조치원 일원과 건너편의 동평리·서평리에 이르는 벌판이 되었다. 1915년 경 작성된 <한국근세지도>에는 허만석이 쌓은 천방과 봇또랑의 흔적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조천의 상류 청주 지경에서 발원한 보의 중심 물길이 지점 1, 2, 3, 4에서 분기한다. 지점 1에서는 현재 조치원 시내 방향으로 흐르는 물길과 지점 2, 3, 4로 분기되면서 현재 강외면 동평리와 서평리 일원으로 흐르는 물길이다. 구글어스에서 살핀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현재 홍익대 정문 앞에 설치된 보가 일제강점기 초기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허만석이 처음 쌓은 보의 위치일 것이며, 이 보(大堤라고 표현하는)를 설치한 허만석은 조치원과 현재 강외면 지역에 관개하기 위한 봇도랑을 만들었고, 보의 하류에 위치한 조천에도 길고 튼튼한 둑을 설치하여 홍수에 대비했던 것이다. 허만석이 개간한 1,000여 경은 1,000∼1,700ha(3∼5㎢) 가량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림6] 연기현감 허만석의 조천 일원의 개간 추정 지역 ▶ 천방 개간 사례 2 : 전탄(箭灘)의 천방(川防)과 개간 전탄 일원의 개간은 성종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중앙의 대신을 파견하여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진행되었고, 작업의 과정과 성과가 ‘실록’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종 16년(1485)에 시작된 공사는 40일의 작업을 거쳐 이듬해 초에 개략적으로 완성되었고, 성종 17년(1486) 11월에 군정 1,000여 명을 동원하여 봇도랑을 만드는 작업을 함으로써 1차적인 개간 사업이 종료되었다. 이 당시 개간된 땅은 1,000여 경, 27,000여 두락으로 벼를 심는 논(稻田)으로 개간되었다. 율곶의 들[栗串平]에서 파종할 수 있는 볍씨가 1,000여 석이었고, 삼지강의 들[三枝江平]에서 파종할 수 있는 것이 700∼800석이었다. 이 당시 설치된 보와 수로는 5,000∼6,000여 석락(75,000∼90,000두락)에 달하는 수전으로 더 개간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었다. 전탄의 천방과 개간 공사가 진행되는 곳은 멸악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전탄(箭灘)과 토천(兎川)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서로 만나는 지점으로 전형적인 무너미이었다. 따라서 큰비가 내려서 상류에서 많은 물이 삼지(三支)·율곶이[栗串]의 지역으로 흘러들어오고, 여기에 조수가 밀려오는 때를 만나면 이 지역에서 바다와 육지의 물이 서로 만나기도 했다. 무너미의 특성상 이곳은 전부터 홍수로 실농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수전으로 본격 개발하지 않은 채 사냥터나 갈대를 채취하는 곳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그런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천방을 통해 대규모 보를 수축하고, 큰 물길과 봇도랑을 만들어 관개함으로써 비교적 안전하고 비옥한 농경지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표3] 전탄 일원에서 시행한 방천사업의 내용과 결과 전탄(箭灘)에 개거(開渠)에 소요되는 인력은 처음 황해도에서 8결 1부로 15,000명의 역부를 동원하면 20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역부 동원의 여러 문제를 검토한 후에 역부 10,000명을 40일간 동원하여 작업을 완료했다. 성종 16년의 공사는 공사전에 논의된 다양한 난관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마무리되었다. 전탄의 천방은 근처에 있던 돌로 둑을 만들었고, 도랑은 찰흙으로 된 땅이어서 물길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사전에 염려했던 모래와 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지강 벌판의 지세가 아래쪽으로 점점 낮아졌기 때문에 작업은 더욱 수월했다. 이듬해인 성종 17년 겨울의 공사에서 군정(軍丁) 1천여 명을 10여 일 동안 동원하여 비옥한 경작지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물길(水道: 봇도랑)을 만들면서 1차적인 개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당시 개간된 땅은 매우 방대해서 황해도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도 남아 하삼도에서 많은 수의 백성을 옮겨 경작케 하였다. 전탄의 개간과 관련한 사론에서 월산대군의 가노가 전탄의 개간을 건의했다는 점에 비추어 국왕에 의한 개간 주도를 통해 왕실의 사적 재정을 확충하는 수단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7] 성종 16년(1485) 전탄 일원 천방과 개간지의 현황 ▶ 15∼19세기 천방과 개간의 나머지 여러 사례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한반도 전 지역에서 천방을 통해 보(洑)를 설치하고, 이어 봇또랑으로 관개하는 시설을 마련해 나갔다. 조선시대 천방의 설치 과정과 상세한 내역을 살필 수 있는 첫 사례는 연기 현감 허만석에 의한 천방 작업이었다. 세종 10년(1428) 연기현감 허만석은 세종의 명을 받아 현감으로 내려온 후 가뭄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천방의 설치를 구상하고, 이를 부역 노동으로 실현해 낸 첫 번째 사례였다. 이는 일련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국가와 수령이 주도한 첫 번째 개간의 사례이다. 이어 세종 25년(1443)에는 압록강 연안에서, 1450년대에는 전라도의 만경과 태인 지방에서 동진강의 물을 끌어들여 관개하기 위해 하천 둑을 쌓은 바 있다. 이러한 천방의 설치는 경상도 개령과 금산에서도 시행되었는데, 금산의 흑운산에서 시작된 물길이 개녕 감천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기 까지 무려 9개에 이르는 물막이 뚝을 만들어 방대한 면적을 관개할 수 있었다. 감천 유역이 동서로 10여 리에 이른다고 하였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개령감천), 이는 개략 16㎢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는 허만석이 개간한 땅보다 5배 넓다. 16세기에는 국가의 간여를 받지 않는 가운데 지방의 사족이나 유력자들이 중심이 되어 천방을 설치하고, 저습지를 개간한 여러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기묘명현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김세필은 중종 14년(1519)년에 있었던 기묘사화에서 조광조에 사약을 내린 것의 부당함을 규탄하다가 경기도 유춘역(현재 음성군 생극면)으로 귀양갔다. 중종 17년(1522) 유배지에서 풀려났지만, 인근의 팔성리(당시 말마리)에서 서당을 짓고, 후학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다.
[그림8] 16~19세기에 천방으로 개간된 여러 사례 그런데 당시 김세필이 머문 곳은 유춘역과 무극에서 다소 급류로 흐르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의 바로 하류에 해당하는 곳이었고, 이곳에는 널따란 무너미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에서 김세필은 학문을 논하기 위해 종종 자신을 찾아오는 충주목사 박상의 도움을 받아 냇가에 둑을 막고, 천방을 설치하여 매우 많은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박상이 찾아와 말을 매는 곳이라 하여 말마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마을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걸출한 학자 8명이 배출되면서 ‘팔성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8명의 성인으로 불리는 대학자가 배출된 이면에는 응천의 무너미에 펼쳐진 들에서 거둔 풍성한 수확에 힘입었음은 물론이다. 16세기 중엽 팔성리로부터 장호원에 이르도록 완만하게 흐르는 응천을 따라 천방을 통한 개간이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성과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기묘명현이 김안국 역시 현재의 여주 금사면 일원에 머물면서 빈번히 교류했다. 18세기 중엽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이 마을을 들어보고, 이곳이 충주에서 가장 큰 4대 촌락 중 하나라고 설명한 바 있다. 우반동으로 널리 알려진 전라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우반동) 일대는 유형원의 9대조 류관이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서 받은 사패지였다. 한양에 머물던 유형원이 17세기 초 이곳 반계로 낙향하여 머물면서 조금씩 개간을 시작했다. 인조 14년(1636)에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柳成民)으로부터 우동리 동편의 땅을 사들였고, 17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 그의 손자 김번(1639-1689)이 일족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이후 이곳은 수전을 중심으로 본격 개간되었다. 20세기까지 개간과 수리시설의 확충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오늘날과 거의 유사한 경관을 이루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도 미개간의 무너미가 적지 않게 남아 있었고, 이곳들은 인구의 증가, 그리고 지속적인 범람으로 더 많은 토사가 쌓여 손쉽게 개간될 수 있는 여건을 기다린 연후에 개간이 이루어졌다. 경주 양동 마을과 안강읍 사이에는 매우 넓은 무너미가 펼쳐져 있는데, 이 지역 역시 산에 접한 지역에서 개간이 시작되어 19세기 후반에서야 오늘날과 유사한 경관을 가질 수 있게 개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 동학농민전쟁의 시발지로 널리 알려진 전라도 고부의 조병갑이 축조한 ‘만석보’의 예와 같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전에 사용 중이던 보를 확대하기 위해 증축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