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중세2분과)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로 시작되는 옛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우리에게 호랑이와 담배가 너무나 친숙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석기 시대 유적인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호랑이의 뼈가 발견되었고, 단군 이야기와 반구대 암각화에서 호랑이는 매우 중요한 동물로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각종 고분 벽화 속에서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는 오랫동안 국사 교과서의 표지를 장식하면서 한국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 사냥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과 함께 시골의 아낙네라도 호랑이를 잡기 위해 집 뒤에 함정을 팔 줄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한 때는 절반 이상의 당상관이 호랑이 사냥 덕분에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하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호랑이가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곳곳의 지명이 호랑이와 관련되어 만들어졌고, 곳곳에서 호랑이 이야기가 전승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림 1] 고구려의 수렵도(무용총)과 고려시기 수렵무늬 거울 ⓒ숭실대 박물관 소장
그런데 앞서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담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담배를 피던 시절이란 임진왜란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 ‘아주 먼 옛날’이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호랑이의 역사적 유구성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담배가 재배된 역사는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담배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기억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많은 것들이 고려 시기에는 없었지만, 조선시대에 새롭게 도입되어 널리 보편화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하여 밝힌 바와 같이 고려와 조선은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긴밀히 연결되어 생태환경과 그 구성 요소는 지금까지 역사학이 연구한 소재와 방법보다 더 명확히 각 시기를 살아가던 삶의 특징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한국사의 연구에서 생태환경사에 새롭게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문익점이 도입한 목화가 조선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역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고려 말까지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비단, 모시, 삼베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이는 각각 뽕나무, 모시풀, 삼(麻)를 재배하여 얻거나 야생동물을 사냥하여 얻었다. 그런데 고려 말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복식을 고려 시대 사람들과 확실히 구별할 수 있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한반도의 생태환경, 농업 경관과 경제 시스템을 크게 변화시켰다.
남부 지방의 많은 밭에서는 면화가 재배되었고, 함경도 같은 곳에서는 심지어 논에서 면화를 재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따라 면화가 다 자라면 곳곳에는 무궁화 닮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내 하얀 목화솜이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덕분에 많은 백성과 군인은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가볍고 질기며 따뜻한 면포로 만든 옷으로 한 해를 따뜻하고 쾌적하게 보낼 수 있었다. 기능성에 보존성까지 뛰어난 면포는 빠른 속도로 부의 축적, 부세 수취와 교환의 수단으로 자리 잡으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여기에 일본과 여진은 조선의 면포를 구하는 데 사활을 걸었고, 면포는 조선의 무역품이며 외교적 수단이 되었다.
[그림 2] 문익점의 목화시배지 기념관과, 목화솜의 아름다운 모습 ⓒ카카시의 평범한 일상 블로그
목화 재배가 확대되고 면포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한반도에서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뿐만 아니라 생태 환경의 측면에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면포의 생산과 교역이 확대되면서 더 많은 산림 지역이 밭으로 개간되었고 그곳에서 살아가던 야생 동물의 서식처는 줄어들었으며 사람과 야생동물간의 접촉은 크게 늘어났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한국인의 여러 활동은 고려 시대에 형성되었던 한반도의 생태 환경을 크게 변화시켰고, 이러한 생태 환경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사람을 둘러싼 자연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이미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설명되었다. 일찍이 페르낭 브로델은 인간의 활동이 다양한 요인이 각각 단기ㆍ중기ㆍ장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데 기후ㆍ식생 등의 자연 환경은 인류 역사 발전에서 장기지속을 결정하게 된다고 하였다. 역으로 인간의 역사적 활동을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설명해야 한다면 생태 환경에서 큰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총ㆍ균ㆍ쇠』라는 저명한 저작에서 재래미 다이아몬드 역시 문명 출현 과정에서의 나타난 불균형은 생태적ㆍ지리적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하였다. 야생동식물을 작물이나 가축으로 전환하는 속도의 차이, 문명이 온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된 원인 등은 인간과 생태적ㆍ지리적 환경이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진화론에 근거한 전통적인 설명 방식에서 강조한 인종 사이가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방식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생태 환경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개념틀은 뉴턴역학으로부터 양자역으로의 과학사적 전환이 진행된 20세기 초부터 제시되고 있었다. 이미 찰스 다윈은『동물학Zoonomia』(1794)에서 개체적 생명체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어 러시아의 과학자이자 과학사상가였던 베르나드스키(Vladimir I. Vernadsky)는『생물권The Biosphere』(1926)라는 책에서 ‘생물권(Biosphere)’ 개념을 주창하면서 ‘살아 있는 물질’과 ‘살아있지 않은 물질’ 사이의 관련성을 해명하였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키예프 출신의 라세브스키(Nicolas Rashevsky)는 ‘유기적 세계 전체(organic world as a whole)의 생물학적 일체성(biological unity)’의 연구를 주창함으로써 개별 생물체가 아닌 생물과 생물 사이의 관계의 연구를 주창한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로젠(Robert Rosen)은 분자생물학적 이해 수준을 넘어서서 생명을 개체의 몸 수준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관계론적 생물학(relational biology)’을 제안하였다. 20세기에 크게 발전한 분자 생물학의 DNA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생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 개체론적 생물학은 DNA를 넘어서는 생명체 내에서의 상호관계, 생명체와 생명체의 상호관계를 탐색하는 인식의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와 흐름을 같이하면서 생명체 상호간의 관계와 존재의 우주적 조건을 설명하는 개념과 이론으로 생태계, 가이아, 온생명 등의 이론이 제시되고 있다. 최근 생명에 대한 여러 이론은 공통적으로 관계와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 연구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러한 자연과학 분야에서 나타난 생명 현상을 연구하는 방법론의 변화는 동시기 역사학의 연구에서도 같이 진행되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프랑스의 아날 학파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 환경의 관련성을 깊이 연구하였고, 중국사와 일본사 분야에서 생태환경사를 역사학의 한 분야로 본격 연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축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는 생태 환경사에 대한 연구가 인간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면서 역사학의 연구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사 연구에서도 최근까지 급속히 연구의 지평이 확대되고 있으며, 이에는 인접학문의 연구 성과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인접 학문 분야에서 역사적 연구 성과를 제시하거나, 혹은 인접학문과의 학제적 연구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이는 역사학이 본질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이에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미술 및 음악사, 지리학, 의학, 분자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 문야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예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그림 3] 융합 연구의 사례 ⓒ2012 한국연구재단 학제간융합연구과제 <인간동물문화연구>의 연구 개념도
거의 모든 학문 분야와 관련된 생태환경사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 이제 막 첫 발걸음을 떼고 있다. 그럼에도 생태환경사의 가능성은 넓어 보인다. 생명체의 하나인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생명체의 일부이며, 다른 생명체의 생명활동으로 축적된 에너지를 생명활동의 원천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삶을 해명하는 것이 지금까지 탐구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 혹은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적 조건(혹은 우주에서 물리적 조건)에 대한 탐구를 필요로 한다. 넓어진 탐구 영역과 협동적 연구자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생태환경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도출된 연구 성과는 흥미롭다.
‘온생명(Global Life)’, 혹은 ‘생태계(ecosystem)’라고 부르든 두 개념 모두 인간은 지구에서 다른 모든 생물체와 관계를 맺으며, 이는 지구라는 독특한 물리적 환경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 생물체와 물리적 환경 사이의 모든 상호관계를 명확히 밝힐 수 있다면 각각의 시기에 전개된 인간의 역사적 활동이 갖는 의미는 더욱 넓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ics)이 다 같이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공간인 집(oikos)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어의 ‘집(oikos)’은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인간의 경제 활동과 자연 생태계는 상호의존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다는 언어적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생태환경의 결정적 변수였기 때문에 생태환경사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을 더욱 역사학답게 만들면서 모든 학문과 시간과 인간을 축으로 융합하여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생태환경사 관점에서 본 조선’이라는 대주제하에 다음 소주제를 순차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1. 프롤로그
2. 거시 생태 : 야생동물과 가축
3. 농지 개간 : 천방과 화전
4. 산림 천택 : 봉금과 여민공지
5. 미시 생태 : 생물학적 거래와 전염병
6. 종양 약재 : 山蔘(人蔘)과 家蔘(圃蔘)
7. 농업 경관 : 외래종과 작물화
8. 촌락 경관 : 고립에서 개방으로
9. 생태 경제 : 인구와 부세수취
10. 에필로그 : 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
참고문헌
ㆍ브리태니커 백과사전
ㆍ페르낭 브로델(주경철 역),『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까치, 1995
ㆍ정철웅,『역사와 환경-중국 명청 시대의 경우』, 책세상, 2002
ㆍ김동진,『조선전기 포호정책 연구-농지개간의 관점에서-』, 선인, 2009
ㆍ인간동물문화연구회 편,『인간동물문화』, 이담, 2012
ㆍ이항 외, 한국연구재단 학제간융합연구과제 <인간동물문화연구> 연구계획서,
2012
ㆍ장회익,『생명의 바른 모습, 물리학의 눈으로 보다,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한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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