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회의 후기3·1운동의 메타역사,3·1운동 연구사의 재검토곽금선(근대사분과) 한국사람으로 3.1운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시작된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수많은 독립운동 가운데 유일하게 국경일로 정해졌을 정도다. 2019년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한다. 이를 기념하여 한국역사연구회에서는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를 통해 100년이 지난 현재 3.1운동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기억되어 왔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지를 모색하고 있다. 2018년 3월 17일 오후 2시부터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406호에서 있었던 <3·1운동의 메타역사, 3·1운동 연구사의 재검토>는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가 기획한 두 번째 학술회의였다. 학술회의는 김정인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계신 김정인 선생님의 개회사와, 2018년 한국역사연구회장을 맡고 계신 이익주 선생님의 축사로 시작되었다. 발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우선 전체 학술회의의 1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고태우 선생님이 사회를 맡은 가운데, 발표자 선생님들 네 분의 발표가 이어졌다. 그 다음으로 2부에 해당하는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다. 김정인 선생님의 사회를 맡았고 박환무, 배성준, 방광석, 이형식 선생님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아쉽지만 필자는 원래 잡혀있던 선약으로 자리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4번째 발표부터는 듣지 못했다. 종합토론에서도 활발한 토론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자리에 끝까지 남지 못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첫 번째 발표는 도면회 선생님의 「3.1운동 원인으로서의 무단통치론 재고」 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3.1운동의 원인을 무단통치와 사회경제적 수탈, 민족자결주의의 수용 또는 러시아혁명의 영향에서 찾았다. 하지만 이는 1960년대 남북한에서 정립된 다소 선험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다. 당대인의 인식, 운동 주도층이 남긴 기록, 일제 당국이 작성한 3.1운동 관련 제반 보고서를 보면, 3.1운동의 발생 원인에 대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1919년 6월 작성된 『조선소요사건 상황』은 식민지근대가 만들어낸 사회경제적 부담과 민족적 차별, 그 가운데서도 정치참여와 교육의 부재 등이 3.1운동을 일으킨 주요한 원인이었음을 보여준다. 192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조선3.1독립소요사건』은 조선인 종교 지도자들이 경제적 호황으로 인한 자신감과, 정치적 권력욕, 그리고 그 배경에 있었던 민족차별 등에 기반하여 독립을 외치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내용은 독립운동으로써 갖는 당위와 관련하여 선험적으로 규정되었던 운동 발생의 원인 규명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3.1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당대의 다양한 모습을 실증적으로 재현하려 한다는 데서 흥미로웠다. 두 번째 발표는 배석만 선생님의 「3.1운동 경제배경 서술의 변화과정 분석」으로 3.1운동이 발발하게 된 경제적 배경에 대한 서술이,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분석했다. 3.1운동에 대한 동시기 서술에는 민족 상층부에서의 경제적 차별이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되었던 반면, 해방공간에서는 농민층의 경제적 수탈이 더욱 중요시 되었다. 1950년대 북한학계는 ‘약탈’의 도식으로 당대를 파악했고, 민족 상층부는 일제와 동일시되었다. 1969년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은 토지토사사업을 통한 농지 약탈과 회사령을 통한 한국 기업 억제라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안병직은 민족운동을 추진한 힘을 민족 상층부에서 찾고자 했는데, 이는 경제사학자들의 계보를 잇는 것이었다. 1989년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행한 『3.1민족해방운동연구』은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관점 위에서, 연구주제를 확장하고 구체적 실증에 힘을 기울였다. 반면 같은 해 동아일보사가 발행한 『3.1운동과 민족통일』에는 경제적 배경보다는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한 민족 상층부를 주목했다. 2000년에 이후로는 3.1운동에 대한 경제 배경 서술이 급격히 축소되는 모습을 보인다. 해당 발표는 비록 경제적인 부분에 한정하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한국사학계가 3.1운동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연구로써, 각 시대가 갖는 상이한 지점을 포착해내고 있다. 두 번째 발표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계속된 세 번째 발표는 박준형 선생님의 「전후 일본의 3.1운동 인식」이었다. 이 발표는 3.1운동 50주년을 기점으로 일본에서 진행된 연구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전후 하타다 다카시를 시작으로 3.1운동에 대한 전전의 평가가 수정되기 시작했으나, 전전의 연구 성과에 의존하는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1959년 조선사연구회와 1961년 일본조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1960년대 일본의 조선사학계에서는 내재적 발전론이 새로운 방법론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편 당시 일본에서는 신제국주의 등장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민족해방투쟁사가 유효성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1969년 『思想』의 3.1운동 50주년 특집에서 와나타베 마나부는 3.1운동에서 조선민중의 일관된 사상을 인정하며 정신사적 측면에서도 내재성의 논리를 구축했는데, 이는 앞에서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1970년대에는 3.1운동에 대한 남북한의 합의점을 찾기 위해 민족주의자를 주목하기도 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민중의 내용을 귀납적으로 포착할 것을 요구하는 방법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이후 일국사적 국민사적 시점의 연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되면서 민중운동사 연구는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되었다. 3.1운동에 대한 서술 역시 화석화되어 버렸다. 하지만 식민지지배의 책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는 반드시 지나야할 ‘통과 지점’을 무시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연구는 아베정권에 의해 과거 제국주의에 대한 망상이 다시금 피어오르고 있는 일본에서, 3.1운동의 연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네 번째 발표는 한승훈 선생님의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에 대한 재평가」는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한 인도, 베트남 등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세계사적 의의’에 대한 비판적 연구이다. 1974년 국정교과서에는 3.1운동의 대내외적 의의를 ‘민족’이라는 키워드로 귀결시키면서, 이후 중국과 인도의 민족운동을 일으키게 한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서술한다. 이는 해방 직후의 신문자료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당초 추상적인 차원으로 제기된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 구체화 된 결과였다. 한편 학계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있었다. 하나는 3.1운동이 아시아 여러 국가의 민족해방투쟁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별 국가가 당시 처해 있는 객관적 조건을 염두에 둬야한다는 시각이었다. 1989년 2월 16일 동아일보사의 주최로 열린 3.1운동 7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있었던 신용하와 구대열의 논쟁은 이러한 학계의 상이한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란 무엇일까. 발표자는 3.1운동과 5.4운동 등을 통해 일본의 식민정책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규명하는 것에서, 그 세계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제안한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독립운동이 이후 조선과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연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번 학술회의는 3.1운동에 대한 연구사의 재검토를 통하여, 지금까지 3.1운동이 우리에게 기억되어 온 방식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와 함께 이후 3.1운동이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해답은 각각의 발표마다 연구주제와 지역, 방법론 등에서 상이했지만, 현실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그 답을 구하려 한다는 사실만은 같았다. 현재 한국사학계에서도 운동사연구는 다소 침체되었다 할 수 있다. 비례하여 3.1운동에 대한 관심도 이전에 비해서는 시들어든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100주년을 맞이하여 3.1운동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관심이 환기되었으면 한다. 이는 한편으로 현재 우리사회를 되돌아보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해서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