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발표회 참관후기] 원 법전을 통해 본 고려후기의 제도와 사회 강재구(중세1분과) □ 일시: 2015년 9월 19일 토요일 2시 □ 장소: 연세대학교 외솔관 526호 □ 주최: 한국역사연구회 중세1분과 원법제 학습반 0. 원법제 연구의 필요성과 시의성 발표: 이강한(한국학중앙연구원) 1. 13세기 다루가치의 등장과 고려의 반응 -다루가치를 통한 몽골 지배방식의 경험- 발표: 김보광(고려대학교) 2. 고려 장애인 정책의 변화 -잔질, 폐질, 독질자를 중심으로- 발표: 이현숙(연세대학교) 3. 원간섭기 근친금혼 관념의 강화와 원의 婚俗 도입 문제 발표: 최봉준(가톨릭대학교) 4. 고려 만호부 제도의 도입과 전개, 그리고 유산 발표: 이강한(한국학중앙연구원) 근래 「고려후기」, 그 중에서도 고려와 원제국(몽골)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양적ㆍ질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그간 고려시대 연구자들의 꾸준한 연구의 축적, 그리고 다양한 연구방법론의 시도와 개발, 시야의 확대를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왕조는 거란과 여진ㆍ몽골까지, 유난히 많은 북방 유목민족과 치열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 관계의 흔적은 『고려사』ㆍ『고려사절요』와 같은 우리 측 사료뿐만 아니라 『송사』ㆍ『요사』ㆍ『금사』ㆍ『원사』 등 다양한 중국 측 사료에도 남아 오늘날 고려시대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법제 학습반〕(이하 원법제반)은 2012년에 발족하여 이제 세 돌 즈음이 된 젊은 연구모임이다. 원법제반은 그동안 『元史』 刑法志 등 다양한 元代 법전류를 주요 텍스트로 분석해왔다. 몽골의 제도와 풍습, 사회조직 등에 대한 이해를 위한 기초 작업인 몽골제도 연구는 「원 간섭기」에 해당하는 13~14세기의 고려후기사 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분야라는 점에서 원법제반의 힘찬 첫 내딛음이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원법제반 구성원들의 면면을 곰곰이 살펴보자면, 교류사부터 제도사, 사상사, 의학사, 정치사 등 각각 다양한 필모그라피를 가진 연구자들로 최근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돌이켜 보면, 처음 원법제반이 출범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부터 지금까지 이 연구자들이 내놓을 연구 성과에 늘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 같다. 아직 개척되지 않았던, 하지만 반드시 다루어야 할 연구 공간을 처음으로 용기 있게 문을 연 원법제반의 패기는 지금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젊은 연구자들의 젊은 연구모임, 진격의 원법제반이 드디어 첫 연구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발표회는 총론을 포함한 5개의 발표가 2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김윤정 선생님(연세대)의 차분한 사회로 시작한 첫 발표는 이강한 선생님(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총론이었다. 원법제사반의 초대 반장이자 주축인 이강한 선생님은 「원법제 연구의 필요성과 시의성」이라는 제하의 총론 발표에서, 刑政 차원에서 연구되었던 기왕의 元 法典 연구에서 탈피하고, 고려ㆍ몽골 양자 간 제도ㆍ문화 등의 갈등이라는 관점을 넘어 접목ㆍ융합ㆍ배합의 양상에 주목한 원 법전 연구의 필요성을 제안하였다. 「다루가치」와 「장애인 정책」, 「혼속문제」와 「만호부제」까지, 이들 주제에 대하여 다루어진 연구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특히, 元制의 관점에서 고려 사료에 보이는 여러 사료들의 조각을 맞추는 작업은 무척이나 지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교사적 연구는 원법제 연구의 시의성과도 직결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제 1주제 발표인 김보광 선생님(고려대)의 「13세기 다루가치의 등장과 고려의 반응」에서는, <다루가치를 통한 몽골 지배방식의 경험>이라는 흥미로운 부제가 붙어있다. “경험”으로 표현된 ‘다루가치’라는 몽골 제도는 고려가 몽골과의 관계 과정에서 몽골 제도의 이질성을 체험하고 그것을 소화하여 주도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데 효과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김보광 선생님은 그간 다루가치의 활동에 대해 ‘내정 간섭’이라는 일반적인 결론에 그치지 않고, “제도”로서의 다루가치에 보다 주목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연구는 먼저 原型으로서의 다루가치(원법제)를 검토하여, 고려 다루가치가 ‘몽골 지배조직의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았다. 몽골제국의 관료로서 고려에 파견된 다루가치는 기존 고려의 지배질서에 상응하는 권위를 보유함으로써 그와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국왕 등 고려의 지배층은 다루가치를 통해 몽골의 관료제도를 학습ㆍ활용하여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이어지는 토론에서는 元代 다루가치 연구로 잘 알려진 조원 선생님(한양대)이 고려 다루가치의 성격에 대해 질문하였다. 고려ㆍ안남지역에 파견된 다루가치가 몽골제국 내의 다루가치와는 별도로 파악ㆍ관리되고 있었던 정황을 언급하며, 이는 고려 다루가치가 제국 내 지방장관으로서의 다루가치와 유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측면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다루가치를 “기관”(衙門)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 지 등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져 토론의 열기를 북돋았다. 두 번째 발표인 이현숙 선생님(연세대)의 「고려 장애인 정책의 변화: 잔질ㆍ폐질ㆍ독질을 중심으로」에서는, 오늘날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잔질ㆍ폐질ㆍ독질에 대한 개념과 함께 그에 대한 고려의 정책에 대한 검토, 그리고 원률이 영향을 미친 후의 변화에 대해 다루었다. 잔질ㆍ폐질ㆍ독질은 법률상의 용어로서, 그 개념은 당의 율령에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서 공유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고려에서는 신체 손상자(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러한 고려의 장애인 정책은 원률이 적용되면서, 상해의 정도나 가해에 대한 형량, 국가의 복지 수준 등이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을 논하였다. 김순자 선생님(한국외대)의 토론에서는 다소 해석하기 어려운 잔ㆍ폐ㆍ독질의 개념을 정확히 하였다는 점에 논문의 미덕이 있다고 하였다. 최근 기초사료에 대한 역주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고, 그것이 연구 환경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개념에 대한 정확한 사용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필자 역시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래 법제(원률)와 토착 사회(고려)의 접촉 과정에서, 양자 간의 긴장이 없이 전자가 무비판적으로 후자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그에 대한 논증이 보강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잠깐의 휴식을 거친 후, 2부는 이현경 선생님(연세대)의 사회로 문을 열었다. 세 번째 발표인 최봉준 선생님(가톨릭대)의 「원간섭기 근친금혼 관념의 강화와 원의 婚俗 도입」에서는, 고려 초 이래로 지속되었던 고려의 족내혼ㆍ근친혼이 후기로 가면서 원친으로 통혼대상이 옮겨지는 추세에 주목하여 몽골의 혼속 풍습이 전래되면서 그 추세가 보다 강화된 것에 대해 다루었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근친혼과 같은 고려의 혼속 풍습에 대해 이미 고려전기부터 사회적 문제가 노정되어 규제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고려사회 내에서 문제가 제기되어 제한적으로 제재를 받던 근친혼은 고려후기에 들어와 혼인 당사자에게까지 처벌이 미치면서 근친혼에 대한 근본적인 규제가 가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편문화(동성금혼)의 준수라는 원 세조의 요구와 충선왕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지만, 고려전기 이래로 고려사회가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근친혼에 대한 문제의식과 규제의지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는 점에서 원법제에 대한 고려의 주체적인 수용태도가 주목된다. 따라서 고려사회에서는 보편문화로서의 원법제 도입에 긍정적이면서도, 고려의 전통적 풍습에 배치되는 경우에는 이를 거부하거나 폐기하는 등 원법제에 대한 유연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어지는 권순형 선생님(이화여대)의 토론에서는, 성리학적 보편성과 몽골 혼속제도의 실체와 관계와 같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특히, 원법제 상의 동성불혼과 관련된 조항에 대한 비교가 미흡하다는 지적은 발표자가 유념해야 할 지점이라고 판단되었다. 또한 이른바 “보편”, “성리학적 보편성”과 같은 용어 사용과 관련한 질문을 통해, 그것이 사상사분야를 넘어 제도ㆍ사회사분야로까지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끝으로 네 번째 발표인 이강한 선생님(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고려 만호부 제도의 도입과 전개, 그리고 유산」에서는, “만호부제”라는 대표적인 몽골 제도가 고려에 도입되는 과정과 그 영향에 대해서 치밀하게 다루었다. 그간 만호부제는 주로 군제사 분야에서 사안별ㆍ소재별 검토가 이뤄진 바 있다. 전론으로 만호부제를 다룬 연구는 매우 적은데, 이는 원형으로서 몽골 만호부제와 비교하기엔 변형으로서 고려 만호부제가 사료 상 나타나는 모습이 매우 파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강한 선생님 특유의 분석적 시각과 고려ㆍ몽골 양측의 사회 성격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이는 발표였다고 생각한다. 주목되는 것은 만호부제에 대한 도입ㆍ전개ㆍ유산에 따른 시기별 검토가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원법제 상의 만호부제가 기존 고려의 지배질서와 결합하는 과정을 수용 초기의 ‘갈등’에 국한되지 않고 ‘정착’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고 본다. 이런 관점의 확장은 몽골 만호부제가 도입되고 전개되는 과정에서 고려의 지방사회와의 습합과정과 양상에 관한 서술에서 돋보인다. 도입 초기 만호부제는 고려 군제와 접목되며 기존 지휘체계의 변동을 일으키는 한편, 고려 관료들이 만호부직을 수령하면서 고려와 원제국 간의 제도적 이질성을 해소하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처음 일본정벌을 위해 두어진 것으로 보이는 고려 만호부는 원제국 내 만호부와 같이 금주(합포)ㆍ전라ㆍ서경ㆍ개경ㆍ탐라라는 지역단위에 설치되면서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고려 만호부가 양곡침탈과 市易과 같은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점이 원제국 내의 둔전만호ㆍ해도만호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초기 군제적 성격에서 이후 지방행정 단위적 성격(外官)이 강화되었고, 다시 군제적 위상과 외관적 위상이 습합하면서 고려후기 제도 변화라는 유산을 낳게 되었다고 하였다. 윤훈표 선생님(연세대)의 토론에서는, 일본정벌이라는 동기가 사라진 이후에도 만호부를 고려에 존치시킨 동기에 대한 질문에 더하여 만호부의 경제활동과 관련한 지적 등 격렬한 토론이 이어졌다. 이 한 번의 발표회를 통해 원법제반이 몽골 법제에 대한 원숙한 이해에 기반하여 실제 고려후기 사회에 존재했던 여러 흔적들을 완전히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젊은 연구모임 원법제반은 이제 첫 연구발표회를 마쳤을 뿐이다. 같은 연구자로서, 또 후배로서, 학문에 대한 젊은 선배들의 열정과 힘찬 첫 발디딤에 큰 박수와 함께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