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발표회 후기] 고대 동아시아 도성의 공간구조와 의례의 재구성
□ 일시 : 2013년 11월 30일(토) 13시~18시 국제질서와 문화형성의 긴밀한 관계는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성을 넘어 항상 존재해왔다. 문화가 형성되는 각각의 요소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 시대별 상황에 따라 추이와 형태는 다르지만 변화가 시사하는 의미만큼은 변함이 없다. 수용과 융합, 갈등과 정착이라는 보편성과 시대의 특수성이 함께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는 4~6세기의 다원적 국제질서가 정리되고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로 재편되었다. 이는 곧 주변 국가인 신라와 발해, 그리고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의 외교・문화・군사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개최된 동아시아국제관계사반의 연구발표인 "고대 동아시아 도성의 공간구조와 의례의 재구성"은 7~9세기 중국 중심으로 재편된 국제질서의 영향과 그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도성, 의례, 외교 등의 주제를 통한 각 나라의 비교사적 검토는 당시의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는 물론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관심과 인식의 확대라는 측면을 제공해주었다. 이번 발표회는 한국역사연구회와 한성백제박물관이 공동 주최하였고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장소와 자료집을 후원했다. 2012년에 개관한 한성백제박물관은 넓은 공간과 깨끗한 시설로 조성되어 있었다. 발표회가 이루어진 대회의실도 매우 쾌적했다. 2013년도 회장 하일식선생님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고대사 분과장 이경희선생님의 사회로 발표회가 진행되었다. 발표자분들의 적절한 시간 안배로 지체 없이 발표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발표는 여호규선생님의 「6~8세기 新羅 王宮의 구조와 정무공간의 분화」였다. 국정의 핵심공간인 왕궁의 변화를 통해 당시 지배이념과 정치체제, 그리고 왕권 위상변화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하는 연구였다. 당시 국제질서를 받아들이는 첫 번째 장소인 도성, 즉 월성을 왕궁으로 지정하고 국가의례와 국정수행의 양상을 공간적 측면에서 내외적 변화를 보고자 한 것이다. 상고기 관사적 기능을 가진 남당이 국가의 정비와 더불어 국가의례와 정치회합을 개최하는 의례공간이 되었고, 7세기 중반 당 태극궁의 태극전을 모방하여 조원전으로 개편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변화의 결과 신라 왕궁은 월성 북문을 경계로 남쪽에 내조-중조(정전: 국왕의 정무), 북문과 그 외곽에 외조-관아지구가 위치하는 양상으로 구분되었다. 한편, 중대에 국가의례를 거행하던 崇禮殿은 하대에 향연성 의례공간으로 변모되는 등 하대 이후에도 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고학과 금석문자료,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연구성과를 참조하고 다양한 비교자료와 배치도 등의 근거자료 제시로 이해하기 훨씬 수월했다. 왕궁의 변화가 정치와 왕권, 그리고 지배이념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 발표였다. 두 번째 발표는 한영화선생님의 「신라의 사면과 의례공간」이라는 주제였다. 사면의 배경과 사면이 이루어진 공간을 통해 신라 도성의 의례공간의 위치와 기능을 추정하고 사면과정을 복원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었다. 사면은 왕의 정치행위와 연관되는 중요한 의례로 제의기반에서 점차 왕권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화되었다. 성덕왕 이후의 변화는 중국의 유교적 예제의 수용에 따른 상하관계의 확립으로 왕권의 정당성 확보와 제도의 안착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사면의 공간 역시 당의 태극전-승천문의 형태가 신라의 조원전-무평문과 유사하다는 점을 밝혀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증명하고자했다. 또한 일본의 경우 신라와 당과는 다르게 관아별로 사면을 진행하여 독자성과 전제성이 적었음을 비교하였다. 같은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받아들이고 시행하는 주최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와 비중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 발표였다. 두 번째 발표 이후 약 10분간의 휴식시간이 있었다. 휴식시간을 이용해 오랜만에 만난 분과원들 간의 안부인사가 이루어졌다. 잠깐 살펴보았지만 새로 지어진 박물관인 만큼 다양한 전시물과 체험공간이 있었고 깨끗했다. 시간이 된다면 박물관 전체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세 번째 발표는 이현주선생님의 「신문왕대 納妃禮의 도입과 의미」라는 주제로 이루어졌다. 신문왕 3년의 혼인 기록이 유교적 절차에 따른 왕실 혼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한 연구였다. 중국 납비례의 도입배경을 살피고 『大唐開元禮』와 비교하여 신문왕의 혼례절차를 재구성하고 특징을 파악하고자 했다. 발표자는 지증왕대를 기점으로 한화적 제도개편이 이루어졌으며 중대왕권 성립 이후에는 중국식 율령 및 예제 질서가 수용되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었고, 동원된 인원 중 남성관인 뿐만 아니라 관인의 처와 딸 등의 여성관인으로 보이는 신분도 참여했다는 점을 조명했다. 이를 통해 중대왕권의 지향성과 유교적 이상의 가시화효과에 의미를 두고자 했다. 의례 절차가 당의 가례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유교적 의례의 도입과 동원된 인원을 통해 중국의 영향을 살펴보고,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파악하고자 하는 주제였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발표는 김종복선생님의 「당 장안성에서의 외교의례와 외국 사신간의 외교적 갈등-신라・일본, 신라・발해 사신간의 爭長사건에 대한 재검토」라는 주제로 이루어졌다. 발표자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대한 각국의 인식문제에 집중했다. 이에 753년과 897년의 외국 사신들의 외교적 갈등인 爭長사건을 중심으로 당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주변 국가의 상호인식, 그리고 처리방식에서 당의 인식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외교의례 행사에서 발생한 사신들 간의 미묘한 신경전과 사건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또한 각 사건이 발생한 장소(연회, 황제알현)와 시기적 차이(각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당의 문제 해결방법 역시 흥미로웠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중심지인 당 도성의 의례공간에서 벌어진 외교적 갈등과 해결책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인식하고 파악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연구 주제였다. 토론은 종합토론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발표자와 토론자들의 참석 하에 각 발표에 대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졌다. 주제의 특성상 공통적으로 이야기 될 수 있는 변화와 흐름의 양상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단편적인 사실관계의 분석보다는 전후관계와 흐름에 대한 유연한 인식을 갖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다만 고대사의 고질적 문제인 도성의 범위와 위치 비정 문제, 단어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 점, 역할과 의미의 소급 문제 등이 지적되었는데, 이러한 문제점들은 더욱 상세한 고증과 사료분석을 통해 해결해나가는 방향이 제시되었다. 이번 발표회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 개편에 따른 7~9세기 고대 동아시아를 조망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사료부족과 단어정의의 어려움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의 자료와 비교사적 검토, 그리고 유기적인 이해를 통해 풍부한 발표회 자리가 마련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토론이 종합토론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주제의 장점이 있었고, 앞으로도 더욱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는 자리였다고 생각된다. 뒷풀이 자리에도 많은 연구자 분들의 참석으로 풍성한 이야기 장이 이루어지는 등 다방면으로 의미 있는 연구발표회였다. |